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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온화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이것은 아주 기이한 이야기라고 책 속의 주인공은 말하고 있다. 영웅처럼 칭송받는 그였지만, 이전의 과거의 일이 그를 옭아매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대목이다. 자신의 이러한 평가에 대해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은 결국 그 모든 고민을 낯선이에게 토로하고 그는 이를 엮어 책으로 만들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엮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구도를 가지고 있다라는 말이다. 그렇게 커다란 사건이나 사고가 없는 잔잔한 이야기는 시작된다. 원래 그런 것이다. 인간의 고민의 원천은 결국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하루를 지내는 우리에게도 끊임없는 생각이 우물물처럼 솟아오르듯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내면의 고민과 번뇌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듯 한 느낌이 가득 차 있는... 낯선 이에게 고백을 하고 마는 주인공은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스물다섯에는 장교가 되는 호프밀러이다. 일상의 평온함 속에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그는 측은지심 즉 연민의 감정에 충실했기에 이러한 과거를 겪게 된다. 악의라고는 전혀 없는 그런 행동으로 말미암은 결과는 충격적이지만 결코 이해하지 못할 그런 수준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선의의 거짓을 고하기도 하는 일상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그렇다.
케케스팔바라는 부잣집에 놀러갔다가 흥겨운 분위기에 취해 춤출 것을 청하다가 일은 시작된다. 부들부들 떨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소녀에게서 좌절의 빛을 본 순간 그녀가 장애를 가진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고 만다. 그녀에게 주었을 상처 및 모욕감 그로인해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을 견뎌 내야하는 그런 작은 불안 등이 그를 그녀에게로 이끌었다. 사죄를 하고 다시 인정받고 싶다는 기분에 이끌려 저택을 드나들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기부터 호프밀러는 이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해졌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병자가 있는 그것도 상당히 마음의 상처가 깊은 히스테릭한 환자가 있는 집에 호프밀러의 등장은 빛과 같았고 그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으로 인해 따스해지는 눈빛과 다정스러움 등. 이를 통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함이나 만족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점점 더 증폭되기 마련이어서 그들에게 희망을 전도하는 일이 의무감을 주기도 했다. 에디트의 상황이 나날이 좋아지고 있고 그로인해 행복을 되찾을 수 있을 수도 있다는 순수한 믿음이 호프밀러를 잠식해갔다. 그리고 케케스팔바의 힘없고 지친 뒷모습에 대한 연민이 콘도르의 정직한 말들을 왜곡시켜 전달하는 행동으로 옮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에디트와 케케스팔바는 이를 통해 닫혀있던 희망의 문을 열어젖히며 호프밀러에게 좀 더 솔직히 자신을 드러내고 만다. 이것은 현실성을 가졌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빛처럼 등장한 호프밀러. 그를 바라보는 에디트의 심정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매일처럼 부딪히는 건강한 젊은 남성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호프밀러가 빈번히 케케스팔바 저택을 드나드는 일에 비한다면 훨씬 더 정상적인 일에 가깝다. 문제는 호프밀러의 고뇌였는데 사랑하지도 않은 여인의 집착을 묘사한 부분을 본다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 질 정도로 인간심리를 세세하게 분석해 낸다.
자신을 버려서라도 사랑을 하고 말겠다는 불구의 여인과 그녀를 온전히 거부할 수 없는 호프밀러. 그녀를 버려서는 안된다는 연민의 감정과 여인을 거부함으로써 다가올 결과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감정의 추를 조정하지 못한다. 책의 절반 이상이 호프밀러의 이 상황을 추적했다고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불편한 순간이 빼곡히 적혀 있다. 그를 비난할 수도 에디트를 욕할 수도 없는 것은 그의 의도가 순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 겪을 만한 내면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은 오해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기는 하지만 그의 잘못을 지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 모든 일을 오랜 시간 돌이켜 생각해 온 호프밀러의 자책감을 줄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충분한 연민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순간의 측은지심으로 인한 연민의 감정은 모두 쓸데없는 일이란 말인가 하는 고민도 해볼 수 있겠다. 결국 츠바이크가 말하는 사랑이란 이러한 연민의 감정까지도 책임질 줄 아는 것이란 말인가. 답은 그렇다고 보인다. 책의 마지막 훗날 콘도르를 피해 달아나는 호프밀러의 묘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의 연민은 나처럼 치명적으로 우유부단하지도 않았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힘이 있었다. 그런 그가 나를 심판할 수 있는 그가, 내가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그가 옆에 앉아있었다. … 몸이 떨리기 시작한 나는 어둠속에서 들키지 않기 위해 재빨리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 그러나 그 이후로 나는, 양심이 알고 있는 한 그 어떤 죄도 결코 망각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p.434】
【젠장, 당신은 연민으로 상대를 바보로 만든 엄청난 책임이 있어요. 성인이라면 어떤 일에 끼어들기 전에 생각을 해야 되고 어느 정도까지 관여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남의 감정을 마구 휘젓지 말아야 한다고요. 인정하세요. 당신은 아주 훌륭하고 존경할 만한 동기에서 이 선량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그가 용감하게 또는 소심하게 행동했는지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국 어떤 결과가가 되었으며 무엇을 이루었는냐 입니다.
연민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연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으로, 남의 불행을 보고 느낀 괴로운 충격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려는 조급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남의 고통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려는 본능적인 욕망일뿐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연민이기도 합니다만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 연민은 인내하며 참으면서 자기의 힘이 한계에 부딪힐 때까지, 아니 그 이상까지 견디기로 결심하는 것. 그것이 자기의 임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최악의 비참한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갈 수 있을 때에만 지치지 않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까지 희생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p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