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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읽기의 혁명 2 - 경제를 읽어야 정치가 보인다 신문 읽기의 혁명 2
손석춘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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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읽기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사회과학 혹은 인문관련 서적에서 사회비판적 서적으로 옮겨가고 있다. 사회를 바르게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조금 감이 오고 있을 정도로 더딘 과정이기도 했다. 몰랐던 부분에 대해서는 안내를 받아 부족한 부분을 채워갈 수 있었는데 이 책도 그 중심에 놓여 있다. 사회비판적 서적을 읽는 사람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 않았던 이유에는 이 책에 나와 있듯이 진실을 왜곡하고 현상을 주관적으로 잣대 지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로인해 신문보기를 즐겨하는 나로서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보수신문의 하나를 구독하면서 정기구독이 끝나갈 무렵 고민을 거듭하다가 일간지는 그대로 대신에 주간지는 진보적인 매체로 따로 구독하게 되면서 나의 신문읽기가 그동안 얼마나 편향되어 있던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더욱 늘어갔고 이 책을 통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모르고 있어 죄가 되는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알아가면서 부딪히는 좌절감이 커 갈수록 앎에 대한 목마름은 더해가듯이 이제는 더욱 잘 알아서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희망도 싹 틔울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책읽기는 그 결실과도 같았다.




이 책은 1권에 이어 신문읽기의 혁명이라는 고갱이를 담고 있다. 신문읽기는 이해가 잘 될 터이지만 혁명이라니? 민주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민주시민으로써 신문읽기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여정은 과히 혁명의 과정이라 불리 울 만큼 어렵고, 어렵지만 그 길을 통해 모두를 위한 사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시민혁명으로 되찾은 민주사회를 위협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하나는 세상을 바르고 올바르게 볼 수 있는 창 그 언론의 주권을 되찾는 신문읽기의 혁명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책은 노무현 정권의 실패 이유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된다. 보수언론에서 주창하듯 잃어버린 10년은 과연 옳은 표현일까? 오히려 노무현 정권은 보수언론의 편집논리에 발맞추어 나아갔음을 관련 정책으로 제시하고 진보정권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통해 그 논리마저 진실이 아님을 지적한다. 노무현 정권은 보수언론과의 감정적 대치를 보이기는 했지만 실상은 그들의 논리와 같았음을 지적하면서 집권 후반기 국론 분열은 오히려 감정적 대치의 결과였음을 그리고 노무현 정권의 지지자들 그리고 개혁적 성향의 네티즌의 정파적 신문읽기에 그 원인이 있었음을 꼬집는다. 정파적 신문읽기는 이후 이명박 정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오고 있고 정책을 보지 않고 정치적 성향 혹은 정치적 인물에 대한 평가로 국론이 분열되는 상황을 불러오고 말았다. 더 큰 분열의 조짐은 그 결과물이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정파적 신문읽기의 ‘함정’을 뛰어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신문읽기의 혁명 그 첫 번째 방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구체적인 의문이 생긴다. 책은 차례대로 그 과정을 짚어주고 있기 때문에 따로 정리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일목요연하다. ‘경제면 넘어 경제 읽기’에서는 정치사회면 기사와 경제기사를 분리시키는 편집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우리 삶을 틀 지우는 경제를 정치와 별개의 영역으로 바라보는 신문읽기의 문제점을 부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 보수언론의 편집논리가 숨겨져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신문의 탄생과정에서 알 수 있다시피 성공한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상품을 광고할 매체를 찾고 있었고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신문은 자본가들의 논리를 반영하는 통로가 되어 왕과 귀족을 압박할 수 있었다. 물론 노동자들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본가들을 압박하고자 하였지만 자본력이 부족한 그들의 민중언론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자본가들이 행한 조치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민중언론을 약화하고자 하는 방안은 신문구독료 인하와 신문광고를 통한 통제였다. 몇 년 전부터 대기업 삼성은 진보신문에 광고를 싣지 않고 있고 얼마 전 주간지 한겨레에서는 진보언론의 미래를 고민하며 진보언론을 유지시킬 수 있는 방안은 현실적으로 구독료 인상밖에는 남아있지 않다 라고 지적한 바 있음은 이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문이 중산층을 겨냥해 기득권 유지를 위한 기사들을 쓰고 있는 이유는 신문사 자체도 대기업의 하나이고 그들의 고객 또한 중산층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인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정파적 신문을 넘어선 품격 있는 신문읽기도 필요하다. 신문의 품격을 판단하는 잣대 진실, 공정, 사랑을 알면 그 해답이 보일 것이다. 진실을 왜곡한 신문은 독이든 사과를 건네는 마녀와 같다. 우리는 매일 아침 건네 오는 신문이라는 사과에 독이 들어 있는지 아닌지를 판별할 줄 알아야 한다. “‘마녀’는 일반 독자들이 신문지면에서 찾기 어려울 만큼 깊숙이 똬리 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특권이나 기득권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겨냥해 때로는 ‘거친 색깔공세’로, 때로는 ‘먹음직스러운 사과’로 민심을 호도하고 있기에 더 그렇다.p.119” 진실을 왜곡하는 신문은 결국 공정을 해친다. 공정을 잃은 신문내용을 보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이 보수언론의 논리로 변질되어 갈 수 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편협적인 사랑이 아닌 정파를 뛰어넘은 인간애 동시대인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바로 그것이다. 이를 유의하고 지켜볼 때 신문의 품격은 되살아 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이제는 신문을 더욱 깊이 있게 읽을 줄 알 수 있게 해주는 단계로 돌입한다. 신문 속에 숨어있는 논리를 파헤치고 우리 모두에게 유의미한 일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곳에서는 세계화, 민중, 이해관계라는 핵심단어를 기억해야 한다. 세계화라는 논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 혹은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것인데 이에 관한 책으로 88만원 세대와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있으니 이를 통해 보충해 두어도 좋다. 결국 그들의 자유란 특정계급의 자유일 뿐이라는 설명에 눈이 닿는다. 세계적으로 퇴조하고 있는 이 논리가 대다수 국민의 요구를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보수언론의 논리가 숨어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민중에 대한 보수언론의 시각은 더욱 파괴적이다. 민중배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논리는 세계 노동자들의 요구를 싣지 않는 것으로도 알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파업과정에 대해서도 적대적인 것을 통해 확실시 된다. 이를 읽는 대다수 민중의 시각은 노동자들에게 차갑기만 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민중은 다름 아닌 신문 독자 자신이다. 스스로 민중이면서도 민중이란 말을 낯설게 여기는 현실은 신문의 여론 지배력에서 비롯한다. p.209"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일방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현실에서 자신이 민중임을 자각하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이해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것도 짚어둔다.




위의 내용을 살펴본다면 혹자는 이러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신문을 보아야 하는가? 이런 논리라고 한다면 곤란하다. 왜곡된 기사를 근절하고 바른 사회의 지평을 열어갈 참 언론을 만들어 가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자 신문의 갈 길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지배세력은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터넷의 혁명으로 많은 이들의 의견이 개진되고 보수언론의 논리가 힘을 잃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곳곳에는 어려움이 남아 있다. 민중의 요구를 반영하는 통로로써의 언론의 역할을 고려한다면 기득권자들의 논리가 담긴 신문을 대다수 민중의 요구로 채우는 신문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노력뿐이라는 공감이 필요하다. 그 공감을 만들어줄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자신의 경제생활을 단순히 ‘취업’이나 ‘호구지책’으로 여길 게 아니라 정치생활과 연결 짓는 다리로 신문을 읽으며 새로운 사회의 주체로 자기를 창조적으로 형성해 갈 때, 그때 신문 ‘읽기의 혁명’은 곧 ‘혁명 읽기’다. 그때 신문읽기는 예술이다.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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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선생님이 뽑은 우리 사회를 움직인 판결
전국사회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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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다는 표현은 진부하다. 이처럼 재미있고 유익한 법 교육 책을 만나게 되다니! 읽는 동안 다른 생각은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로 빠져들게 하는 책이었다. 게다가 유익하기도 하고 필요하기도 한 책이라는 생각이다. 법 교육의 필요가 증대되는 이유는 우리가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라는 기대도 있지만 당연히 알아야 한다는 당위성에 무게를 더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역시 법은 딱딱하고 어렵고 좀처럼 가까이 하기 어렵다는 인식은 깨지기 어려운 것 같다. 이런 모든 요구를 충족해 주는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은 그렇기 때문에 행운이다.




사회선생님들의 깨어있는 의식이 만들어내 책. 우리 사회를 움직인 판결은 진지한 고민으로 시작된다. 사회과교육에서 말하는 민주시민의 양성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법교육의 방법에 대한 모색이 원인이었다. 교과서에 실린 법조문이나 그 속에 내재된 원칙을 암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그 원인이 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판결들을 모아 살아있는 법 교육을 하려한 것은 적당한 방법이 될 수 있었다.




다양한 주제를 모았지만 여러 줄기는 하나의 기둥을 중심으로 한다. 바로 시민의 권리 신장에 의한 민주사회의 실현 그것이다. 홀로 혹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함께 연대해 이룩한 성취를 담은 사건들이 꽤 많다. 그리고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논쟁에 대한 것들도 다수이다. “법은 법칙이 아니라 논쟁이고 합의입니다.”라는 책의 서문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겠는데 법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고 법과 관련한 사회적 쟁점에 대해 참여하고자하는 적극적인 의미의 시민이 만들어 가는 사회를 위한 작지만 큰 노력이라고 볼 수 있겠다.




【법이란 외부에서 주어진 어떤 진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사회적․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 법이란 사회적 합의다. 그 과정에는 논쟁이 필요하다. 그래서 법은 끝없는 논쟁이다, 그리고 그 논쟁의 주체가 시민이고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 한다. … 사회적 논쟁의 주체가 시민이며 그 논쟁의 결과물이 법이라는 것, 그것이야말로 법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가 아닌가 한다. p.44】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비단 사건과 그에 대한 판결을 알게 되는 것만이 아니다. 워낙에 많은 사건을 담을 수 없었던 것인지라 뽑아놓은 사건들은 우리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큰 의미가 있는 시간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논쟁 속에 진행되고 있는 사건들을 만남으로써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해결방안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역사를 통해 오늘을 생각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듯이 이 책 속의 판결들이 우리를 더 나은 민주 사회,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의로운 자는 박해받기 마련이라는 어느 성인의 말이 옳다면 어쩌면 패배한 소수가 옳았을 수도 있다. 우리가 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다수가 기록한 역사보다는 그 역사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소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건들은 끝났다. 하지만 사건을 둘러싼 논쟁이 끝나선 안 된다. 왜냐하면 다수 의견에 따라 판결이 내려졌지만 다수가 정의를 독점하는 것은 아니 때문이다. 떨지 않는 나침반이 죽은 나침반이라면, 논쟁이 사라진 사회는 죽은 사회다.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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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사회학
수디르 벤카테시 지음, 김영선 옮김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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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에게는 필수의 관심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연구가 오랫동안 지속되어왔고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정립이 이루어진 시기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으로 자리매김을 해왔다. 오늘날 사회학이라는 학문은 인문과정의 하나로 축소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여전히 사회 곳곳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학문을 하는 연구자들에게는 학문의 대상으로써 매력을 발휘하고 결국은 더 나은 사회로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정책책임자들에도 그러할 것이다.




결국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당위성은 현실에서의 적절한 쓰임과 무관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연구를 지속하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겠지만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 그 목표일 것이다. 그러한 측면으로 본다면 이 책은 사뭇 특이하기는 하지만 좋은 의도로 볼 수 있겠다. 연구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객관적 입장의 고수로 인해 나타나는 도덕적 비난도 감수해야 하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벤카테시라는 인물은 이러한 비난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그런 연구자였음에는 분명하다. 이 책이 미국의 흑인 빈민가에 대한 정책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는 확인할 수는 없으나 지하경제의 구조와 그들의 네트워크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 충분하니 말이다.




대학원 생으로 연구 조사를 위해 시카고 최악의 빈민가 로버트 테일러 홈스에 방문하게 된 벤카테시의 긴 연구 내용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강렬한 첫 인상을 가졌던 제이티는 갱단의 영향력 있는 중간보스에 해당하는 친구였다. 자신의 전기를 쓰는 것으로 착각한 제이티는 벤카테시의 방문을 막지 않았고 벤카테시는 처음에는 갱단을 중심으로 시간이 흐른 뒤에는 빈민가의 구조와 사람들의 네트워크에 대한 연구를 해 나아간다. 갱단의 보호를 받고 있는 로버트 테일러의 모습과는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는 순진한 연구자는 이 모든 과정을 글로 남겼다. 




로버트 테일러 주택단지는 남부의 가난한 흑인들을 안정적으로 수용하자는 좋은 취지로 만들어졌지만 이 후 백인 사회의 차별과 멸시로 인해 빈민가로 전락했다. 실업률은 갈수록 높아졌고 흑인들은 대부분 지나치게 가난했다. 남자들은 갱단에 가입해 마약을 팔았고 여자들은 매춘으로 자식들을 벌어 먹였다. 치안이 불안한 이곳으로 출동하고자 하는 경찰이 없기 때문에 범죄가 만연했다. 역설적이게도 이곳의 질서를 회복하는 역할은 갱단의 업무 중 하나가 된다. 갱단을 이끌고 있는 제이티가 지역사회에서의 자신의 업적을 강요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남자들을 이끌고 있는 것이 갱단이라면 여자들을 관리 하는 것은 주민 대표였다. 사람을 이끌어 나가는 힘을 가진 이들은 대가로 돈이나 물건들을 받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든 생활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정부의 구제정책 또한 중간 관리자 격인 이들을 통했으므로 경찰이 이들과 손을 잡고 돈을 갈취하는 모습도 찾아 볼 수 있다. 




빈곤의 악순환과 범죄의 증가는 이곳에 낙인찍힌 이미지였다. 외부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내부 흑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지하경제의 모습을 파헤치면서도 이러한 모습에 쉽게 동의를 보내지 못하는 벤카테시의 모습은 순진해 보일 정도다. 호기심은 더 많은 곳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고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공동체를 굴러가게 하는 동인을 발견하게 된다. 네트워크. 공동체 내에 속한 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상부상조의 모습은 빈민가의 흑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무엇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어쩌면 다른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조치들이 너무도 당연시 하게 이루어지는 이곳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담아낸 것이 놀랍다.




거의 10년간 방문을 통해 어울렸던 주민들은 이제 거의 대부분 뿔뿔이 흩어졌고 갱단활동의 축소로 그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10년 동안 그들 삶을 참여 관찰한 연구자로써 벤카테시는 그 오랜 시간만큼 어려움도 겪었다. 바로 연구자로서의 도덕적 책임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를 사회적으로 괴짜라고 하는 면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갱단의 마약판매와 총격사건, 그리고 폭력사건, 경찰의 부적절한 처사 등에 손을 놓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기가 어려웠던 때문이다. 벤카테시는 연구를 위해 이 사실들을 묵인하는 자신을 부정수익자로 표현하기도 한다.




미국에는 여전히 빈곤한 지역과 범죄로 고통 받고 있는 지역이 많다. 이 책에서 나온 시카고 주택공사의 졸속 행정이 또 얼마나 많은 빈민들을 양산해 내었는지 배워야 할 점은 곳곳에 남아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서민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내놓은 정책들이 오히려 서민들의 고통을 가중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의 삶을 바로 보고 이해할 때만 올바른 정책이 만들어지고 실행될 수 있는 것은 당연지사인 것이다. 대학의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가 된 벤카테시는 당시 연구자의 신분이었음에도 이러한 사실을 인식한 진정한 사회학자였음에 틀림없다. 그를 괴짜라고 부르는 사회인식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변화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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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괴짜 사회학자의 무모한 참견.<괴짜 사회학> - 수디르 벤카테시-
    from 내가 있는 이야기 2009-11-05 09:44 
    인도 태생이며, 미국 중산층 출신 사회학자 수디르 벤카테시라는 젊은 사회학자 한 명이 있다. 무모할 정도로 겁이 없었던 그는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사회학 연구를 위해 마약이 들끓고, 살인, 폭력, 매춘부들이 난무하는 시카고 빈민가 한복판에서 갱단과 어울리며 10년간 빈민 사회학연구를 하게 된다. 그가 위험한 시카고 빈민가 '로버트 테일러 공용주택단지'에서 사회학 연구를 하게 된 계기는 아주 단순하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선호하는 통계와 각종 수학 기호..
 
 
login 2009-11-05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종종 놀러 올게요^^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 (양장본)
데이비드 덴비 지음, 김번.문병훈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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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학생들에게 장소에 대한 인식을 설명하면서 연령이나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의미를 달리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후일 학교로 다시 돌아오는 학생 혹은 어른들은 참으로 용기 있는 이들이라는 말을 했었다. 아이들에게 현재의 삶을 더욱 충실히 해야함을 당부하는 의도로 전한 이야기였지만 평소 나의 개인적인 견해였다. 학창 시절 의미를 깨우치지 못한 공부내용에 대한 미련 때문 일텐데 그 땐 지금생각으로 너무 현실적이고 자아도취적이었다. 좋은 책들을 읽고 있었지만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위대한 책들의 작가 덴비는 자신과 마주하기 위해 또는 일상에서 들려오는 뜻 모르고 의미 없는 비판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30년 전으로 돌아갔다. 이는 참으로 용기 있는 행동이요 의미 있는 전략이기도 했다.




그는 그리고 읽었다. 그냥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비판과 성찰을 동시에 해내었다. 위대한 책들이라는 단어 속에 내재되어있는 정치성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 또한 작가가 끊임없이 고민한 부분이었다.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눈총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진 고전이라는 책들을 읽어나갔다. 왜 오늘날 수세기 전의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지 전쟁을 찬미하고 성불평등을 고취하려고만 하는 이러한 책들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야 했는지 스스로 확인하고는 이내 불평들을 잠재운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 책들의 가치는 무한한 것임을 깨닫는다.




그와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공간적으로는 미국이지만 보편화 되어가는 미디어 속에 성장하는 세대인 만큼 성향이 비슷한 면이 많다. 자신을 마주하지 못하는 성향은 나이 때문 일수도 있겠지만 점점 더 심화되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때 생각하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이 책들이 큰 힘을 실어줄 것이라 작가는 확신하게 된다. 그들이 함께 읽었던 책만으로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을 이끌어 주던 교수들의 강의는 이를 어렵지만 가능하게 해주었음은 물론이다.




첫 강의는 호머의 일리어드로 시작된다. 이 책을 통해 자아를 확립하게 될 것이라는 테일러 교수의 지적이 흥미롭다. 전쟁을 노래한 시이며 전쟁이 주제인 이유로 잔혹하고 길기 까지 한 시인데 말이다. 자아는 과거로부터 창조되기도 한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쟁을 노래한 시이지만 결과까지 찬미한 시는 아니었다는 저자의 설명이 인상적이다. 끊임없는 비판 속에서도 이 책이 가져다주는 의미를 퇴색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는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 생각할 바를 짚어주기에 의미가 있는 책이다. 당대 사회에서도 개인 혹은 조직의 이기심을 잠재울 수는 없었던 이유 때문인지 이에 대한 성찰이 많다. 결국 그리스의 와해로 인한 지식인의 고뇌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책은 시간적 환경을 달리할 뿐 고민거리는 같다.




위대한 책들 상, 하권을 더한 이 책은 일리어드를 시작으로 울프까지 너무나 많고 방대한 고민거리를 담았다. 이 책들의 고민거리를 일일이 지적한다는 것은 무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고전읽기를 주저하게 된다면 우선 이 책을 읽고 시작하는 것은 어떠할지. 컬럼비아 대학에 테일러 교수와 스텐판슨 교수가 덴비를 이끌어 주었던 것처럼 덴비의 이 책이 우리에게 길잡이 역할을 해 줄 것이라 믿는다. 책에 대한 내용이 어렵고 이해하기 불가해 보여도 걱정할 것이 없다. 막간이라는 부분을 각 책 설명 뒷 부분에 넣어 더 쉬운 이해를 돕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려움은 곳곳에 책읽기를 방해한다. 워낙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기에 그럴 수도 있지만 저자 개인의 생각을 두서없이 이야기하는 듯한 방식도 그 이유인데 이것은 읽는 동안 익숙해지기도 하니 미리부터 걱정하는 것은 기우가 될 듯하다. 이 책의 추천사에 이런 글이 있었다. “이 책의 놀라운 점은 누구나 고전의 바다로 풍덩 뛰어들고 싶은 욕망을 갖게 한다는 데 있다.” 이 말에 절대적인 공감의 표시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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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정진홍의 인문경영 시리즈 1
정진홍 지음 / 21세기북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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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좋은 것을 만날 수 있다한들 숲속을 깊이 들어가다 보면 길을 잃기 쉽다. 고전이나 좋은 책들을 접하면 좋다는 것을 알지만 읽으면서도 깨달음을 얻기란 쉽지 않을 것과도 같은 이치다. 물론 오랫동안 다독을 해온 이들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으나 경영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그 일이 쉽지 않을 터다. 이 책은 숲을 헤매지 않도록 조력해 주는 안내서와 같은 책이라 볼 수 있다. 그 역할을 정진홍이라는 인물이 톡톡히 해내었다고 과감히 말하고 싶다.




읽는 내내 가슴 속 무언가가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좋은 책이라는 표현정도로는 부족한 이 느낌이 사뭇 생소하면서도 좋다. 정진홍이라는 사람의 혜안에 놀랍다고나 할까. 책 속의 소개된 책들은 가볍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어렵지 않으면서도 관심을 가지게 하는 절제된 언어들이 그렇다. 어려운 말을 쓰지 않는 것도 아닌데 절로 이해가 가도록 만드는 비상한 재주를 가진 이야기꾼이다. 많은 책으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할 것들을 저자 본인은 이미 얻은 듯 보인다. 감성을 움직이는 이야기꾼이 이 시대의 승자라는 말은 저자에게 닿는 말 일 것이다.




이토록 대단한 책을 낸 정진홍이라는 인물은 읽는 책이 단연 많거니와 읽었던 책에서 본질을 꿰어보는 눈을 가졌다는 점에서 감탄을 자아낸다. “항상 깨어있으라”는 역사의 교훈을 항시 잊지 않고 실행 할 줄 아는 이다. 그가 소개하고 있는 책들 그리고 책의 인물들과 내용 너무 많고 축약할 부분이 많아 결국 그에 대한 칭찬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역사의 흥륭사를 시작으로 하여 쇠망사에 이르기까지 배워야 할 덕목과 21세기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덕목들을 말하고 있지만 일목요연하게 짚어주는 책은 아니다. 많은 책과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그 때 그 때 우리가 가져야할 면들에 대해 이야기해 줄 뿐이다. 남은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어떻게 읽고 느끼며 가져가야 하는지는 독자 자신의 몫인 것이다. 허나 숲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사라진 느낌이다. 어느 새 자신감이 생겼고 얻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으며 헤쳐 나아갈 의지가 생겼다. 과연 경영을 만나다라는 제목의 값을 톡톡히 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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