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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평점 :
바람이 세차다. 창문이 으스러질 듯 몸을 흔든다. 귓바퀴를 건드리는 파열음이 거세어지자 나는 몸을 일으켜 창 밖을 내다본다. 아스팔트 도로에 은행잎이 한가득 떨어져 있다. 비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며 차와 사람에 밟혀 뭉개어지며 쓸쓸히 버려져 있다. 창문 틈으로 비치는 형광등 불빛에 의지해 겨우 숨을 이어가는 은행잎을 측은히 여기며 나는 팔짱을 낀다. 저항하듯 바람은 더욱 거칠어진다. 나는 괜히 소음을 뿜어내는 제습기를 발로 툭툭 건드린다.
의자에 앉아 몸을 비튼다. 새우처럼 몸을 둥글게 말아 눈을 감는다. 말러의 2번 교향곡을 재생시킨다. 숨죽인 밤, 너울 치듯 몰아오는 어둠의 물결 틈을 '부활'로 파고드는 음악. 쏟아지는 음표의 무리에 나는 이미 무너진 몸을 가누지 못한다. 산산히 조각난 몸. 활이 현에 몸을 비빌 때마다 떨리는 음, 심장을 베는 듯한 소름 끼치는 비명에 나는 진저리친다. 나는 왜 매일 실패하는가. 나는 왜 패전한 군대처럼 무릎을 꿇는가.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의 끝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회색 거인의 거대한 몸뚱어리는 과연 몸을 일으킬 수 있을까. 걸어갈 수 있을까. 담장위를 걷는 소년같이 조심스레 무거운 발을 내디딜 수 있을까. 창문 틈으로 바람이 소리를 지른다. 넌 안 돼. 나의 억센 팔로 너의 몸을 옭아매었어. 덩굴 줄기가 잘리지 않는 한 너는 내 족쇄를 벗어날 수 없어.
장중한 음의 파도에 사람의 목소리가 새어들기 시작하면 나는 끝내 몸을 쓰러뜨린다. 고통의 시작이자 절정, 그러나 부활의 징조인 그것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떨림으로 울려온다. 세상을 초월한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 그때의 감동-팀파니와 북을 마구 때리고 온갖 금관악기를 폐가 터지도록 불어댄다 해도 결국 표현하지 못할 어떠한 폭발을 나는 글로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여리면서도 폭발적인 역설과 환희로 범벅된 말러의 음악은 한강의 손을 거쳐 한 편의 장편소설로 변화하였다. 말러의 교향곡이 악장별로 나뉘어 글에 녹아든, 음악 그 자체의 소설. 소설의 짜임과 철근 같은 이야기를 제쳐두고 작곡하듯 단어와 문장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긴 신체소설. 오로지 감각으로 작문에 임하여 감정을 제출한, 결기와 치기가 단단히 뭉쳐진 소설.
그 무렵, 때로 늦은 시간에 인주는 나에게 전화했다.
첫 마디는 언제나 정희야,였다.
(…)
정희야, 자니?
얘기할 게 있어서 전화했어.
나쁜 일이라고도 좋은 일이라고도 할 수 없어.
민서가 왔어.
어제. 짐 다 싸서 데려왔어.
정희야.
……민서 못 만나고 지낸 몇 달 동안, 다 끝났다고 생각했어. 남김없이 파괴됐다고, 완전하게 죽었다고 느낀 순간도 있었어. 그때 내가 정말로 죽었던 거라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아니, 죽기 전의 어딘가로 돌아갈 수는 없어. 되돌아가는 길 따위는 없어. 난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다시 시작하는 게 가능하다면…… 정말 가능하다면 말이야. 뭔가를 되살리는 게 아니라, 복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부서야 하는 것 같아. 아니, 그건 달라.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부서야 하는 거야. 누군가가 지금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말해. 지금까지 내가 그렸던 그림들…… 살아내려고, 어떻게든 존재해내려고 필사적으로 그렸던 모든 것들이, 다 가짜라고.
아니, 아무것도 안 무서워.
아무것도 후회 안 해.
지금부터 시작이야.
P. 322-4
교향곡이 절정에 다다르면 모두는 땀에 젖는다. 마침내 도래한 부활의 날. 구원과 축복의 오라가 사람들을 감싸고, 연하고 투명한 희망의 막이 생성되는 시간. 새 시간. 세계가 바뀌고 사물이 바뀌는 천지. 환상의 아우성 속에 번지는 인주의 얼굴을 생각한다. 밤늦게 미시령을 찾아가 마녀처럼 흩날리는 눈발을 보았던 인주. 그녀는 낭떠러지에 떨어져 의식을 잃었고 종내 죽었다. 자살로 결론짓는 다수의 틈에서 홀로 반기를 드는 여인, 정희. 인주의 유일한 친구를 자처하며 인주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기 위해, 인주와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보이는 남자 강석원과 맞서게 된다. 강석원은 인주의 유작전을 준비하는 동시에 인주의 그림들을 실은 전기를 작성했다. 핵심 내용은 인주가 자살했다는 것. 그에 대항해 정희는 자신만의 인주의 전기를 쓰려고 한다. 자신의 인주에 관한 추억과 기억들을 상기한다. 성인이 된 인주가 즐겨찾았던 사람들을 하나둘씩 만나며 인주에 대해 새로운 것을 환기한다. 정희는 결국 "나는 너를 몰랐다, 네가 나를 몰랐던 것보다 더.(335)"라는 고통스러운 고백을 내뱉는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인주는 결코 자살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
말도 안 되지. 서(인주) 선생이 왜 자살을 해. 당연히 사고지. 서 선생을 눈곱만큼이라도 아는 사람은 그런 말 못 해. 얼마나 아등바등 살았어. 얼마나 몸부림을 쳐댔어. 살려고 그렇게 몸부림을 쳤지, 죽으려고 그랬겠어요? 애는 또 얼마나 어리고. 그 애한테 얼마나 끔찍했어? 그렇게 정 많은 사람은 자살 못 해. 여기 배우는 애들한테도 정성이었어요. 안 해도 될 일들을 다 껴안고 골병이 들었지. 다들 그렇게(인주가 자살했다고) 생각한다구? 데려와봐요. 평론가? 교수? 미술판 사람들? 웃기고들 있군. 미안해요, 내가 요즘 마음이 이래…… 이 빌어먹을 눈물이. (208)
인주에게는 혈우병을 앓는 외삼촌이 있었다.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때로는 자신이 여자인지도 모른다'고 털어놓은 그는 피에 대해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 경외감은 그를 매사에 조심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자신이 아닌 세상을 보호하려는듯 세심하게, 소심하게 움직이는 남자. 그를 인주와 정희는 사랑했다. 인주에게 그는 부모님 대신 자신을 키워준 보호자였고 정희에게 그는 사춘기의 두근거리는 감정을 해소할 이성이었다. 인주는 외삼촌이라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활기차고 쾌활하고 당당하게 살아갔고 운동신경이 좋은 강점을 살려 소질을 발하고 있었다. 정희는 심오한 철학을 지닌 미술가로서의 외삼촌에게 우주와 삼라만상에 대해 들으며 미술을 시작했다. 인주는 그림을 싫어했다. 정희와 외삼촌이 좁은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을 때면 홀로 마당에서 줄넘기를 넘거나 마루에 누워 낮잠을 자곤 했다. 그들은 늦은 저녁 함께 산책을 나가기도 했으며 감자를 삶아먹기도 했다. 그러다 그가 죽었다. 뇌에 피가 고여 작업실에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인주는 그날로 두문불출하기 시작했다. 장대높이뛰기를 하다 절게 된 다리를 계속해서 썩혀두며 한 발짝도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수 년 동안이나.
인주는 그 사이 변하였다. 조용해졌고 여려졌다. 살은 쪽 말라 가죽만 보일 지경이었고, 가장 큰 변화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인주의 그림은 어두웠다. 인간의 심연의 고통만을 꺼내 연필로, 펜으로 옮겼다고 표현할 수 있을 그림이었다. 인주가 수 년 간 감내해오고 묵혀두고 곪도록 두었던 상처의 둑 터짐. 고뇌 고통 고독 쓸쓸함 외로움 비애 비통, 그러나 신성함조차 느껴지는 그림.
<김명숙>
부활의 기쁨은 오래간다. 환희의 송가, 감동에 도취한 음악은 쉼 없이 흐른다. 인주의 마지막. 구급차 안에서의 긴박한 시간. 인공호흡기를 착용한 인주는 갑자기 숨을 내쉰다. 들숨과 날숨이 충돌한다. Breath Fighting. 삶에 대한 열망. 살고 싶다는 의지. 삶을 향한 투쟁 정신으로 인주와 정희는 이어진다.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살아야만 해. 살아 내야만 해. 삶의 아픔과 인간의 죄악을 낱낱이 폭로한 전작들에 대한 답변-살아 내야 한다. 갈대처럼 충분히 흔들리며, 불어오는 바람을 두 팔로 받아내며, 넓은 벌판에 발을 뿌리박고 견뎌내야 한다. 이 삶을 사랑해야 한다.
구원의 시간이 끝나고 눈앞에 닥친 세계. 적응해 나가야 한다. 살아내야 한다.
'통증은 모든 곳에 있다. 격렬하다.' 처음의 빛은 광명으로 인주를 감싼다. 그러나 그녀에게 처음의 빛은 너무 밝아 고통스럽다. 인주는 자신의 삶이 조금은 어두워지기를 바랐다. 탁한 음영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길, 자기를 이해할 수 있길 소망했다. 인주는 거칠고 투박한 선의 그림을 버리고 외삼촌의 그림을 따라간다. 오로지 종이와 물, 먹으로만 이루어진 그림. 마치 우주의 탄생을 표현한 듯한 먹그림. 죽음와 삶의 경계를 종이 안에 담아내며 인주는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느낀 것일까. 죽기 일 년 전부터 그녀는 세상과의 소통을 단절한다. 일 년 동안의 공백. 정희는 아득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 무거운 두 발을 차례로 내딛는다. 회색 거인의 무거운 발. 거대한 두 다리. 걸어갈 수 있을까. 정희는 걸을 수 있었다.
얇은 유리막 사이로 터져나오는 핏물. 닥쳐오는 죽음의 경계선. 격정의 폭풍이 몰아친다. 한 손엔 대항을, 한 손엔 저항을 들고 투쟁하는 인물들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신성한 격렬함. 끈질기게 삶을 이어나가는,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인물들을 한 손으로 가볍게 쥐어본다. 터지기 직전까지.
심장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듯 흐르는 감각. 각혈의 단어, 문장, 문단, 책.
말러의 교향곡이 끝나고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퍼진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두 번 부딪친다. 다시 앉는다. 정면을 응시한다. 두 팔을 한껏 옆으로 뻗어본다. 눈을 감고 느낀다. 어느새 근처에 펑퍼짐하게 팽배한 고통과 상처, 이 아픔들을. 달의 뒷면에 서려 있는 슬픔을.
살아내야 한다.
이 년 가까이 스테로이드 제제로 치료를 받았지. 부작용으로 온몸이 백 킬로그램 가까이 부풀어 올랐어. 견디기 어려웠어. 그렇게 육중한 몸으로, 조그만 상처도 내지 않으려고 절절매면서, 어린 누나가 안간힘을 다해 벌어오는 돈으로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는 게.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구나.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몰라. 햇볕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뛰어갔지. 시냇물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맑은데, 돌들이 보였어.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긴…… 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그중에서 파란 빛이 도는 돌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지.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그게 무서워서, 꿈속에서 나는 조금 울었던 것 같아. (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