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타오르고 싶다 - 그림 혹은 내 영혼의 풍경들
김영숙 지음 / 한길아트 / 2001년 8월
품절


로드무비님이 이벤트 선물로 주신 이 책을 읽었다. 단숨에 읽히는 책이다. 그림 공부를 많이 한 사람보다는 이제 막 그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에게 알맞을 책이다. 나같은 사람 말이다. 새로운 것을 꽤 알게 되었다. 친절하고 바로 옆에서 이야기해주는 듯한 지은이의 글솜씨 때문에도 책은 막힘없이 술술 읽힌다. 그러나, 나에게 저자의 글은 어딘가 2%가 부족한 듯, 책을 다 읽고 나니 좀 허전한 감도 있었다.

소현이가 좋아하는 고흐의 자화상. 이걸 보고는 고흐놀이라며 내 목도리를 칭칭 감고 사진을 찍었었다.

이건 고갱. 다 아시다시피 고갱은 중년의 나이에 잘 다니던 회사와 아내 자식들을 버리고 그림공부를 하러 떠났다. 아, 그의 아내는 얼마나 황당했을까나. 고흐와 고갱의 그림을 보면서 옛날에 <달과 6펜스>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게 아마 그 둘의 이야기였지? 근데 어떤 얘기였는지는 가물가물.....그래서 리뷰를 써야 한다. 이 책에서는 한단락 정도로 잠깐 둘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다.

모딜리아니. 그의 그림의 여자들은 슬픈 것 같기도 하고, 감정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에서 모딜리아니의 행각에 대해 읽으니 또 그의 그림이 달라보인다. 학대받는 여인의 초상같은.....어쩌면 그 글은 안 읽는게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볼 때마다 이제 다른 상상은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흑.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딧>이다. 이 그림은 <천천히 그림읽기>란 책에서도 보았다. 여기선 세가지 버젼의 유딧이 나온다. 그 비교가 재미있다. 아르테미시아는 여성화가가 드문 시대에 활동했던 여성화가인데 그가 그린 유딧은 두려움이나 망설임이라곤 전혀 없다.

이것은 카라바조가 그린 <유딧과 홀로페르네스>. 저게 어디 목을 따고 있는 장면이란 말인가. 파리 한마리도 못 죽이게 생겼다.

클림트는 죽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들고 있는 유딧을 그렸다. 유딧은 알기 쉽게 말하면 이스라엘의 논개이다. 적장을 유혹해 목을 치는 장면을 이렇게 에로틱하게 표현하다니, 클림트의 유닛의 표정을 보면 살인에서 쾌감을 느끼는 정신병자를 그려놓은 것 같다.



각 단락의 맨 끝에는 세계유명미술관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있다. 교통편과 전화번호까지 있는.....나는 그걸 일부러 읽지 않았다. 지금 당장 갈 수도 없는데 읽어봤자 가슴만 아프다. 언젠가 그곳에 갈 수 있는 날, 여행계획을 세울 때 읽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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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05-05-15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독한 아름다움>과 겹치는 작품이 꽤 있군요.
2% 부족, 공감입니다.^^

깍두기 2005-05-15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2% 부족..... 뭔가 임팩트 있고 가슴을 콕 찌르는 문장이 없었다는....

하루(春) 2005-05-15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딜리아니의 그림이 좋군요.

panda78 2005-05-15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공감.. 2% 부족했어요. 지독한 아름다움이랑 이 책은 다 서점에서 읽고 왔지요.
그치만 한젬마씨 책보다는 훨씬 낫던걸요. ^^;

깍두기 2005-05-15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저도 모딜리아니 그림 좋아했는데 사연을 읽고 나니 갑자기 좋아하기 싫어졌다는.....ㅠ.ㅠ
판다님, 전 한젬마씨 책을 안 읽어서....판다님이 가장 재밌게 읽은 미술관련 책은 무엇인가요? 궁금^^

panda78 2005-05-15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제일 재밌게 읽은 걸 꼽으라고 하시면.. 꽤 어려운데요?
[르네상스의 초상화 또는 인간의 빛과 그늘] 이게 아주 재밌었구.. 고종희 씨 책들은 다 재밌었어요. 곰브리치도 역시나 좋구요. 조근조근 설명듣는 기분이 ^^
[화가와 모델] - 이건 그야말로 화가의 사생활 엿보기라 꽤 재밌었습니다. ;;
그리구.... 음.. 생각이 잘 안나네요. ^^;;; 다카시나 슈지 책들도 꽤 괜찮았어요.



깍두기 2005-05-16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워요, 판다님. 이런.....읽을 책이 이렇게나 많다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7 세트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스포일러 있음)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서 발생한 산업문명은 수백년 동안 전 세계로 퍼져, 거대 산업사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대지의 비옥함을 앗아가고 공기를 더럽히며 생명체마저 마음대로 바꾸어 버리는 거대 산업문명은 1000년 후에 절정기에 이르렀다가 이윽고 급격한 쇠퇴를 맞게 되었다. <불의 7일간>이라 불리는 전쟁에 의해 도시들은 유독 물질을 뿌리며 붕괴했고, 복잡하고 고도화한 기술체계는 소실되었으며 지표의 대부분은 불모의 땅으로 변해 버렸다. 그 후 산업문명은 재건되지 않았고, 인류는 영원한 황혼의 시대를 살아가게 되었다.

이야기는 이런 배경을 깔아두고 시작한다. 그러니까 나우시카가 사는 세계는 지금보다 천년도 더 나중의, 인류의 산업문명이 스스로 자멸하고 난 뒤에, 지구가 산업문명의 무덤이 되고 난 뒤에, 그 무덤 위에 세워진 세계이다. 그 세계는 땅 속의 오염물질 때문에 독기를 내뿜는 숲, 부해가 있다.

 
                                 <부해에 사는 식물(왼쪽)과 이야기의 배경 지도(오른쪽)>

부해는 엄청난 속도로 세상을 덮으려 하며 사람들은 독기를 피해 마스크를 쓰고 가까스로 살아간다. 부해에는 또 엄청나게 커진 곤충들과 '오무'가 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피하고 그것들과 싸워가며 살아야 한다. 그 와중에 또 두 나라간의 전쟁이 벌어진다.

여기까지 읽다보면 이 이야기는 물질문명을 맹신하고 서로간에 전쟁을 일삼는 인간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물론 그렇기도 하다. 두 나라는 전쟁의 와중에 전대의 문명이 봉인해 놓았던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안그래도 황폐한 지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서로를 죽이고 또 죽인다. 그 속에서 나우시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특별한 아이다. 그애에게는 적과 나의 구분이 없다. 그애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느낀다. 곤충도, 오무도, 적군도, 아군도 그에게는 생명이다. 숲사람 세름에게 나우시카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생명의 흐름 속에 몸을 두고 있어요. 나는 하나하나의 생명에 연연하고 말지만.....나는 이쪽 세계 사람들을 너무 사랑하고 있어요. 인간이 더럽힌 황혼의 세계에서 나는 살아가겠어요.

설령 어떤 계기로 태어났다 해도 생명은 다 같아요. 아마 히드라조차도....정신의 위대함은 고뇌의 깊이에 의해 결정되는 거예요. 점균의 변이체조차도 마음이 있어요. 생명은 아무리 작아도 그 밖에 우주를, 그 안에 우주를 갖고 있어요.

 

그러나 이렇게 하나하나의 생명을 사랑하는 나우시카가 내린 결론은 어찌보면 의외이다. 그는 전 문명이 세워놓은 원대한 계획을 거부한다. 지구를 정화하고, 인간을 고결하고 우아한 존재로 만들려는 계획을.....

아니! 그건 당연하다. 어찌 생긴 존재이건 생명은 그 자체로 자유의지를 가진다. 높은 자의 계획 따위에 맞춰 살 존재는 아니다.

소녀여, 너는 재생으로의 노력을 포기하고 인류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겠다는 것인가?

어리석은 질문이군. 우리는 부해와 함께 살아왔다. 멸망은 우리 삶의 일부로 자리하고 있어.

종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태어나는 아이는 점점 줄어들고....너희들에게 미래는 없다.인류는 내가 없으면 멸망한다. 너희들은 부활의 아침을 넘어설 수 없어.....너희는 위험한 어둠이다. 생명은 빛이야!

아니, 생명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이다! 모든 것은 어둠에서 태어나서 어둠으로 돌아간다! 너희들도 어둠으로 돌아가라!

이야기는 여기서 물질문명에 대한 경고의 수준을 넘어선다. 이제 이야기는 생명의 의미, 인간존재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생명은 그냥 빛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이라고, 생명은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존재할 수 없는 그 자체로 신이 깃든 존재라고 나우시카는 말한다. 그것이 대답이 아닌 '질문'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내가 나우시카에게 동의할 것인지 아직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뱉어놓은 온갖 오물을 뒤집어쓰고, 인간은 그렇게 나아가야만 하는가?

나우시카가 청정한 세계가 돌아왔을 때 쓰여질 새로운 인간의 알을 파괴하며 "제가 지은 죄에 몸서리가 쳐집니다. 우리처럼 흉폭하지 않은, 온화하고 현명한 인간이 되었을 알이에요"라고 하자 옆에 있던 왕이 한 말.

"그런 건 인간이라고 할 수 없지....응?"

슬프지만 긍정할 수 밖에 없는 저 대목을 보면서, 결국은 나도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인간은, 오물을 뒤집어쓰고, 나아갈 수 밖에 없다고.


폐허가 된 땅을 허무가 담긴 긍정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나우시카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기에, 인간은 긍정할 만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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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5-14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이미 오염된 환경에 적응해버렸다는 대목이 참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리뷰 멋지게 잘 쓰셨네요~

깍두기 2005-05-14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참 슬펐어요. 인간이란 존재가....마치 바퀴벌레가 자기가 더러운 존재란 걸 깨달았을 때 같았다고나 할까...
 

 

 

 

 

 

<얼음과 불의 노래>라는 판타지 소설이다.

추천글을 보면;

현대 판타지의 거장 조지 R.R. 마틴으로부터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작품이 나왔다. 그는 이 장르가 갖춰야 할 최고의 것만을 모아 위대한 작품을 창조해냈다. 방대한 스케일, 숨막히는 모험, 다양한 인물상을 깊이 있고 사실적인 배경 속에서 치밀한 이야기로 엮어나가는 작가의 힘이 과연 놀랍다. - Chicago Sun Times

<얼음과 불의 노래>는 재미있게 읽힌다. 이 책의 미국적 액션 및 속도감은 <반지의 제왕>의 영국적 유머 및 고색창연함과 분명히 구분된다. 하지만 이들은 판타지라는 만국 공통의 코드를 공유하며, 그 코드를 공유해 보는 것은 한국 독자들에게 즐거움이 될 것이다. 21세기 초입에서 한국적 판타지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싶다. - 이영도 (<드래곤 라자>의 작가)

이야기 자체가 바로 마법인 '진짜 마법'을 톨킨 이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기분 좋은 감동이었다. 복잡하게, 그러나 정교하게 얽힌 이야기를 현란할 정도의 유연함으로 풀어가는 글솜씨에 가슴이 저밀 정도였다. 앞으로 20년이 지나면 이 책은 <반지의 제왕>의 뒤를 잇는 판타지의 고전이 되어 있을 것이라 장담한다.
- 김민영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의 작가)

놀라운 것은 작가가 마치 '신'처럼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냉혹할 정도로 공평하다는 것이다. 영리한 인물에게는 신체의결함을 숭고한 인물에게는 또 다른 부덕을, 심지어 꽤 호감을 얻은 인물에게마저도 과감한 죽음의 퇴장을 안겨주는 등 모든 인물을 장기 말처럼 다룬다. 말이라고 해서 평면적인 '도구'로 전락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들은 각자 장기판 위에서 살아남고 승리하기 위해 처참하게 싸우고 있는 인간들이다. - 우지연 (소설가)

오랜만에 모든 것을 잊고 장편 판타지에 빠져보고 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샘솟는다. 그런데 워낙 권수가 많은 책이라 누군가에게 검증을 받고 싶다. 이 책 읽으신 분, 혹은 주위의 평을 들어보신 분 제게 조언 좀 부탁드립니다.

<앰버 연대기>를 읽을 때의 그 혼이 빠질 것 같은 경험을 다시 할 수 있을 것인가......그러나 너무 흥미진진하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한데 그것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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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5-05-13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독하세요^^
저는 요즘 눈아프고 어지러워서 속도가 안 나요 ㅠㅠ

panda78 2005-05-14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1부만 읽었는데요. 앰버만큼 재미나진 않았던 기억이.. 책 들면 못 놓는다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탄탄하고 치밀한 구성으로 이름이 높다고 하더군요. ^^
근데 책도 이쁘게 나왔구.. 2-3부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저도 솔솔 듭니다.
호정무진님 이거 읽으신 거 같던데 함 물어보셔요. ^^

깍두기 2005-05-14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주님도 이 책 읽고 계신가봐요?^^
판다님, 앰버만큼은 아니라구요? 하긴 앰버보다 재미있는 것이 그리 흔하겠나요, 우워어~~~~ 그냥 앰버를 다시한번 읽을까?^^

panda78 2005-05-14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엔더 위긴 시리즈는 읽으셨는지요? 그것도 꽤 재밌는데.. ^^

깍두기 2005-05-14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엔더의 게임, 사자의 대변인, 제노사이드, 엔더의 아이들까지, 전권이 집에 있지요^^
사자의 대변인까지만 재밌었어요-.-; (엔더의 게임은....죽음이죠. 밤을 꼴딱 새게 되죠)

starrysky 2005-05-15 0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판다님처럼 1부만 읽었는데 막 다음 권이 읽고 싶어 미칠 지경은 아니었답니다. 단 한 명의 위대한 영웅이 모든 사건을 이끌어가는 구조가 아닌 것은 마음에 들었지만 다른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을 정도도 아니었고요. ^^ (으악, 너무 초를 쳤나요? 죄송;;)
그리고 엔더 시리즈는 정말 앞부분은 좋은데 갈수록 사람을 실망시키죠. 히잉..

앗앗앗, 근데 지금 책소개 페이지 보니까 제가 읽었던 것과 장정도 다르고 구성도 달라졌네요. 그때는 1부 4권, 2부 4권이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_@ (바부팅!) 할튼 저는 앞의 4권만 읽었사와요. ^^;
 
디스크월드 1 - 마법의 색 ㅣ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테리 프래쳇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책 뒷표지에 보면 큰 글씨로 이렇게 써 있다. "판타지 마니아라면 안 웃을 수 없다" 이 말은 즉, 판타지 마니아가 아니라면 안 웃을 수도 있다는 말이겠다. 그래서 난 좀 안도했다. 내가 파안대소할 수 없었던 것은(가끔 얼굴을 실룩이긴 했지만) 내가 판타지 매니아가 아니기 때문이야. 내 죄는 아니라고.

또 책날개엔 이렇게 써 있다. "정말로 재미있다. 위트가 넘치고 아주 해학적이다. 프래쳇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패러디한다" 이 말은 날 슬프게 만들었다. 뭘 패러디했는지 원본을 알아야 웃든가 말든가 하지, 나처럼 밑천이 딸리는 사람은 어느 대목에서 뭘 패러디했다는 자세한 설명이나 있으면 모를까 웃기 힘들다는 말 아닌가.

그러나 나같은 사람에게도 이 책은 상당히, 꽤 재미있다. 비록 "분명히 이거보다 더 재미있는 내용인데 내가 몰라서 못 웃는거야" 라는 안타까움이 책을 읽는 간간히 나를 괴롭혔지만 말이다.

일단 캐릭터가 기상천외하다. 마법이라곤 쓸 줄 모르는 마법사가 있다. 최강 마법 딱 하나를 알고 있긴 하나 그 주문은 자기가 원한다고 내뱉을 수 있는 주문이 전혀 아니며, 그 주문을 외웠다간 뭔 일이 벌어질 지 그 자신도 모른다. 마법사가 마법도 모르고, 겁은 또 겁나게 많고, 알고 있는 최상의 작전은 삼십육계 줄행랑이나 주인공인 고로 절대 죽지 않고 요리조리 잘도 피해 나간다.

또 너무나 순진무구한 관광객이 있다. 순진무구한 탓에 두려움이라곤 없다. 자기 주변에서 벌어지는 피투성이 혈투를 그는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듯 즐긴다. 까딱하다간 서로의 목을 겨누고 있는 용사들 사이를 파고 들어가 "싸인 좀 해주세요" 할 판이다. 이 사람의 단순명료한 상황판단을 우리는 좀 배워야 한다.

높은 곳이 무섭지 않아?

두송이꽃은 구름 그림자로 얼룩덜룩한 자그마한 풍경을 내려다 보았다. 사실 무섭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다.

아뇨. 왜 무서워해야 하죠? 10킬로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든 10미터에서 떨어지든 죽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린스윈드는 이 말을 공정하게 생각해보려 했지만, 무슨 논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두송이꽃은 관광객, 린스윈드는 그를 안내하는 마법사이다. 그러나 사실은 시종일관 두송이꽃이 린스윈드를 일촉즉발의 모험으로  안내한다. 마법사는 맘껏 두려워하고, 관광객은 그야말로 모든 상황을 '관광'한다.

온갖 용사와 마법사, 마법검 등등이 등장하는 이 모험담에서 최강자는 관광객이 가져온 '짐짝'이다. 최강 짐짝.......우스우면서도 공포스러운.......하여간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캐릭터이다.

그리고 이 책의 또 하나의 매력은 이야기가 벌어지는 새로운 세상, 디스크 월드에 대한 묘사이다. 이 세상은 커다란 원판(디스크)이고, 이 원판은 커다란 네 마리 코끼리가 받치고 있으며 그 코끼리들은 거대한 거북이의 등짝 위에 올라타고 있다. 이 세계의 우주관은 둘로 대립되고 있는데, 이 거대한 거북이는 한 걸음 한 걸음 우주공간을 쉼 없이 나아갈 뿐이라는 '정상우주론'과 세상을 짊어지고 있는 여러마리의 거북이들이 한 곳을 향해 모여들어 짝짓기를 위한 빅뱅이 일어난다는 '빅뱅설'이 그것이다. (우하하하, 정상우주론과 빅뱅설, 기가 찰 노릇이로고^^)

다소 산만한 슬랩스틱 코미디식의 이야기 전개가 정신없을 수도 있다.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외국인이 본다면 100% 공감할 수 없는 것처럼, 이것도 우리가 100% 즐길 수는 없다. 그래도 새로운 세상과 인물을 만나는 즐거움은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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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5-31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30권이나 나오고 계속 나오고 있다면서요, 저도 1,2권 사 놓긴 했는데, 1권 앞에 좀 읽다가 말았어요. 열심히 잡고 읽으면 재밌을 것 같기도 한데 말이죠. 이 작가 영국인들이 굉장히 아끼는 작가라 BBC에서 무슨 리스트 만들면,헤밍웨이, 셰익스피어 이런 작가들과 함께 3-4작품씩 넣는 저력을 보이더라구요.

깍두기 2005-05-31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저는 이 책과 또 그 <히치하이커>같은 책을 보면 말이죠, 아주 안타까운 감정을 느낀답니다. 분명 미치게 웃긴 얘기일 텐데, 우리가 그들 문화를 이해 못하고 그 시절, 그 장소에 있지 않아서 모르는 유머여서 조금밖에 웃을 수 없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그러나 뭐, 우리에게는 <프란체스카>가 있잖아요^^;;

하이드 2005-05-31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회 연장한대요~ ㅋㅋㅋ
 
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너무도 지독한 참상, 인간만이 저지를 수 있는 비인간적인 행위의 한가운데 있어본 사람은, 그렇다, 이렇게 어릿광대가 될 수 밖에 없는 거다. 정신분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거고. 외계인 트랄파마도어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지구에서 전쟁을 예방한다는 생각도 어리석은 거군요."
"물론이오."

"하지만 이 행성은 평화롭잖아요?"
"오늘은 그렇소. 다른 날들은 당신이 보았거나 읽은 어떤 전쟁보다 잔혹한 전쟁을 벌이지. 우리가 전쟁에 대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보지 않을 뿐이오. 무시해버리는 거지. 우리는 영원토록 즐거운 순간들만 보며 지내요. 오늘 동물원에서처럼. 이 순간은 정말 멋지지 않소?"

"멋집니다."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지구인들도 그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거요. 끔직한 시간은 외면해 버리고 좋은 시간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오."

모든 것은 예정되어 있고,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자유의지란 없다는 이 엄청난 비관론에 몸을 내맡기지 않고는 빌리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개미떼 태워죽이듯 몰살시키는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불가피한 일이었소"    "압니다"

"전쟁이란 그런 거요"     "압니다. 전 불평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지상은 지옥이었겠소?"      "그랬지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시오"      "이해합니다"

"선생은 심정이 착잡했겠소? 거기 지상에서 말이오"

"상관없었습니다" 빌리가 말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어요. 모두들 자신이 할 수 밖에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 뿐이니까요. 나는 그것을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웠습니다"  

이 대화를 읽으면 오해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숙명론에 맡겨놓고 체념하자는 것인가? 그러나 책을 다 덮은 후 나를 휩싼 것은 더할 수 없는 슬픔이다. 흐느껴 울고, 통곡하고, 분노하는 것보다 더한 슬픔. 정말 깊고도 깊고도 깊은 슬픔. 그래서 참 말을 잇기 힘들다. 이 글도 쓰기가 참 힘들다.

사실 우리 모두 트랄파마도어인의 도움을 받을 것도 없다. 우린 이미 '끔찍한 시간은 외면해 버리고 좋은 시간에 관심을 집중하는' 법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나만 해도 드레스덴 폭격이 뭔지도 몰랐잖은가. 그리고 우리는 묘비명에 이렇게 쓸 것이다.

Everything was beautiful, and nothing h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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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05-07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고도 깊은 슬픔을 느끼게 될까 봐 두려워 이 책을 피한다면, 그 또한 끔찍한 시간은 외면해 버리는 것이 되려나요.

깍두기 2005-05-07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랙유머와 SF적인 요소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좀 안 맞는 글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제게는 사실적인 글보다 훨씬 울림이 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