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너무도 지독한 참상, 인간만이 저지를 수 있는 비인간적인 행위의 한가운데 있어본 사람은, 그렇다, 이렇게 어릿광대가 될 수 밖에 없는 거다. 정신분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거고. 외계인 트랄파마도어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지구에서 전쟁을 예방한다는 생각도 어리석은 거군요."
"물론이오."

"하지만 이 행성은 평화롭잖아요?"
"오늘은 그렇소. 다른 날들은 당신이 보았거나 읽은 어떤 전쟁보다 잔혹한 전쟁을 벌이지. 우리가 전쟁에 대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보지 않을 뿐이오. 무시해버리는 거지. 우리는 영원토록 즐거운 순간들만 보며 지내요. 오늘 동물원에서처럼. 이 순간은 정말 멋지지 않소?"

"멋집니다."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지구인들도 그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거요. 끔직한 시간은 외면해 버리고 좋은 시간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오."

모든 것은 예정되어 있고,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자유의지란 없다는 이 엄청난 비관론에 몸을 내맡기지 않고는 빌리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개미떼 태워죽이듯 몰살시키는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불가피한 일이었소"    "압니다"

"전쟁이란 그런 거요"     "압니다. 전 불평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지상은 지옥이었겠소?"      "그랬지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시오"      "이해합니다"

"선생은 심정이 착잡했겠소? 거기 지상에서 말이오"

"상관없었습니다" 빌리가 말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어요. 모두들 자신이 할 수 밖에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 뿐이니까요. 나는 그것을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웠습니다"  

이 대화를 읽으면 오해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숙명론에 맡겨놓고 체념하자는 것인가? 그러나 책을 다 덮은 후 나를 휩싼 것은 더할 수 없는 슬픔이다. 흐느껴 울고, 통곡하고, 분노하는 것보다 더한 슬픔. 정말 깊고도 깊고도 깊은 슬픔. 그래서 참 말을 잇기 힘들다. 이 글도 쓰기가 참 힘들다.

사실 우리 모두 트랄파마도어인의 도움을 받을 것도 없다. 우린 이미 '끔찍한 시간은 외면해 버리고 좋은 시간에 관심을 집중하는' 법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나만 해도 드레스덴 폭격이 뭔지도 몰랐잖은가. 그리고 우리는 묘비명에 이렇게 쓸 것이다.

Everything was beautiful, and nothing h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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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05-07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고도 깊은 슬픔을 느끼게 될까 봐 두려워 이 책을 피한다면, 그 또한 끔찍한 시간은 외면해 버리는 것이 되려나요.

깍두기 2005-05-07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랙유머와 SF적인 요소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좀 안 맞는 글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제게는 사실적인 글보다 훨씬 울림이 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