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7 세트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스포일러 있음)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서 발생한 산업문명은 수백년 동안 전 세계로 퍼져, 거대 산업사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대지의 비옥함을 앗아가고 공기를 더럽히며 생명체마저 마음대로 바꾸어 버리는 거대 산업문명은 1000년 후에 절정기에 이르렀다가 이윽고 급격한 쇠퇴를 맞게 되었다. <불의 7일간>이라 불리는 전쟁에 의해 도시들은 유독 물질을 뿌리며 붕괴했고, 복잡하고 고도화한 기술체계는 소실되었으며 지표의 대부분은 불모의 땅으로 변해 버렸다. 그 후 산업문명은 재건되지 않았고, 인류는 영원한 황혼의 시대를 살아가게 되었다.

이야기는 이런 배경을 깔아두고 시작한다. 그러니까 나우시카가 사는 세계는 지금보다 천년도 더 나중의, 인류의 산업문명이 스스로 자멸하고 난 뒤에, 지구가 산업문명의 무덤이 되고 난 뒤에, 그 무덤 위에 세워진 세계이다. 그 세계는 땅 속의 오염물질 때문에 독기를 내뿜는 숲, 부해가 있다.

 
                                 <부해에 사는 식물(왼쪽)과 이야기의 배경 지도(오른쪽)>

부해는 엄청난 속도로 세상을 덮으려 하며 사람들은 독기를 피해 마스크를 쓰고 가까스로 살아간다. 부해에는 또 엄청나게 커진 곤충들과 '오무'가 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피하고 그것들과 싸워가며 살아야 한다. 그 와중에 또 두 나라간의 전쟁이 벌어진다.

여기까지 읽다보면 이 이야기는 물질문명을 맹신하고 서로간에 전쟁을 일삼는 인간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물론 그렇기도 하다. 두 나라는 전쟁의 와중에 전대의 문명이 봉인해 놓았던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안그래도 황폐한 지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서로를 죽이고 또 죽인다. 그 속에서 나우시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특별한 아이다. 그애에게는 적과 나의 구분이 없다. 그애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느낀다. 곤충도, 오무도, 적군도, 아군도 그에게는 생명이다. 숲사람 세름에게 나우시카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생명의 흐름 속에 몸을 두고 있어요. 나는 하나하나의 생명에 연연하고 말지만.....나는 이쪽 세계 사람들을 너무 사랑하고 있어요. 인간이 더럽힌 황혼의 세계에서 나는 살아가겠어요.

설령 어떤 계기로 태어났다 해도 생명은 다 같아요. 아마 히드라조차도....정신의 위대함은 고뇌의 깊이에 의해 결정되는 거예요. 점균의 변이체조차도 마음이 있어요. 생명은 아무리 작아도 그 밖에 우주를, 그 안에 우주를 갖고 있어요.

 

그러나 이렇게 하나하나의 생명을 사랑하는 나우시카가 내린 결론은 어찌보면 의외이다. 그는 전 문명이 세워놓은 원대한 계획을 거부한다. 지구를 정화하고, 인간을 고결하고 우아한 존재로 만들려는 계획을.....

아니! 그건 당연하다. 어찌 생긴 존재이건 생명은 그 자체로 자유의지를 가진다. 높은 자의 계획 따위에 맞춰 살 존재는 아니다.

소녀여, 너는 재생으로의 노력을 포기하고 인류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겠다는 것인가?

어리석은 질문이군. 우리는 부해와 함께 살아왔다. 멸망은 우리 삶의 일부로 자리하고 있어.

종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태어나는 아이는 점점 줄어들고....너희들에게 미래는 없다.인류는 내가 없으면 멸망한다. 너희들은 부활의 아침을 넘어설 수 없어.....너희는 위험한 어둠이다. 생명은 빛이야!

아니, 생명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이다! 모든 것은 어둠에서 태어나서 어둠으로 돌아간다! 너희들도 어둠으로 돌아가라!

이야기는 여기서 물질문명에 대한 경고의 수준을 넘어선다. 이제 이야기는 생명의 의미, 인간존재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생명은 그냥 빛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이라고, 생명은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존재할 수 없는 그 자체로 신이 깃든 존재라고 나우시카는 말한다. 그것이 대답이 아닌 '질문'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내가 나우시카에게 동의할 것인지 아직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뱉어놓은 온갖 오물을 뒤집어쓰고, 인간은 그렇게 나아가야만 하는가?

나우시카가 청정한 세계가 돌아왔을 때 쓰여질 새로운 인간의 알을 파괴하며 "제가 지은 죄에 몸서리가 쳐집니다. 우리처럼 흉폭하지 않은, 온화하고 현명한 인간이 되었을 알이에요"라고 하자 옆에 있던 왕이 한 말.

"그런 건 인간이라고 할 수 없지....응?"

슬프지만 긍정할 수 밖에 없는 저 대목을 보면서, 결국은 나도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인간은, 오물을 뒤집어쓰고, 나아갈 수 밖에 없다고.


폐허가 된 땅을 허무가 담긴 긍정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나우시카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기에, 인간은 긍정할 만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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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5-14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이미 오염된 환경에 적응해버렸다는 대목이 참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리뷰 멋지게 잘 쓰셨네요~

깍두기 2005-05-14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참 슬펐어요. 인간이란 존재가....마치 바퀴벌레가 자기가 더러운 존재란 걸 깨달았을 때 같았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