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곤란한 감정 - 어느 내향적인 사회학도의 섬세한 감정 읽기
김신식 지음 / 프시케의숲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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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논쟁적인 세간의 이슈에 대해 의견을 보태는 일을 자제하게 되었다. 언뜻 공감을 표하는 좋아요 누르기도 입장을 드러내는 것만 같아 페이스북을 탈퇴했다. 의견을 갖지 않기로 했다기 보다는 굳이 내 의견을 표현할 필요가 있나 싶어졌달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내 마음보다 더 정확한 언어로, 근거와 팩트까지 줄줄이 꿰어진 고수의 글들이 타임라인을 촘촘하게 채울테니까. 이미 너무 많은 말들이 포화상태인 공간에 언어를 보태는 것이 소음공해에 일조하는 것 처럼 느껴졌던 것도 조금은 있다.

솔직히 지난주 내내 나는 뉴스에 반응하는 아메바 같은 상태였다. 믿고 싶지 않은 사실들에 테러 당하는 것 같았다. 오물이라도 묻은 것 같은 혐오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욕이라도 한바가지 해줘야 내 존엄이 훼손당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그러다 한때 지지했던 정치인의 사망소식과 미투소식을 함께 들었다. 안타까움과 배신감 사이에서 어떤 것이 더 내 감정인지, 애도와 분노사이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싶은지 잘 알수가 없었다. 미투가 루머가 아니라 사실이라면, 나는 아마 그 정치인에게 매우 분노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른 기사를 더 클릭하기 전에 짧고 빠르게 애도하기로 했다. 당신, 그 많은 일들 하느라 고생 참 많았습니다. 그 짧은 애도 이후에는 그를 지지하고 그의 업적을 존경하고 그의 능력을 신뢰했던 내 마음에 애도를 표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믿기 힘들만큼 비겁한 선택이고, sns에 계속해서 인용되는 말대로 ‘가해와 다름없는 자살’인데다, 무책임하기까지한 죽음이라서.

그렇다고 고인을 애도하는 사람들에게 비난의 마음을 얹을 생각은 없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이별을 받아들이는 것은 삶의 방식만큼 다양할 수 밖에 없다.)
먼저 피해자에게 연대하겠다는 입장을 표현하는 분들에게 애도의 마음이 없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고인에게 표를 행사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분노할테고.)

다만 고인의 죽음을 페미니즘 탓으로 돌리는 언설, 애도를 표하지 않는 이들에게 예의 운운하며 고인의 성추행 가해혐의를 지우려는 행위, 이때다 싶어 별의별 이유를 들어가며 미투에 재갈을 물리려는 무의식은 정말 반대한다.

염려스러운 것은 이 정념뿐인 듯한 소셜의 세계를 지켜보며 안타까움과 분노사이에서 더욱더 속이 시끄러울 꽤 굳건한 지지자 층에 속했던 페미니스트(지향적인)들의 마음상태이다. (사실 내가 그렇다) 감정이 케잌처럼 부드럽게 썰린다면 혹은 시간차를 두고 하나씩만 들어온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능하지 않은 일이지. (그래서 고인의 자살이 더 비겁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꼭 어떤 입장을 갖거나,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해주고 싶었다. 내가 그 문장에 위로 받았기 때문에.


"(p.105) 감정 전염을 탐구하면서 내가 당신과 나누고 싶은 마지막 이야기는 ‘감정의 타이밍’이다. 감정 전염은 당신이 영문도 모른 채 동조하게 된 감정을 믿고 따르길 종용한다. 감정전염이 일어나는 곳에서의 분위기는 뭔가 대표하는 감정 표출이 있으니 따르라고 무언의 압박을 선사한다. 그 감정이 표출되는 시간을 놓치지 말 것을 강요한다. 마치 당신이 느끼고 표해야 할 감정에 제때가 있다는 듯 말이다. - P105

하지만 이럴수록 당신과 나. 특정한 감정을 실시간으로 수긍하고 느껴야 한다는 분위기의 압박으로부터 다른 모색을 꾀할 필요가 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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