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과 젊은 그들의 모험 - 조선 엘리트 파워
안승일 지음 / 연암서가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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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란 말은 <역경>에 나오는 '개물성무(開物成務)'와 '화민성속(化民成俗)'의 합성어로서 개물성무는 사람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개발하고 사람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게 한다는 뜻이며,화민성속은 무지한 백성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만든다는 뜻이다.이는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백성을 교화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

 

기울어가는 구한말 19세기는 세기의 초입부터 다음 세기까지 왕조의 정권유지,외척의 세도,천주교인 탄압,외세의 개방압력 그리고 외세의 지배로 이어지는 힘없는 조선의 지난 궤적이 바꿀 수도 없는 엄연한 역사의 장이었다는 것을 통감한다.소수의 권세와 배부름,미래의 국가 대계를 위한 개혁과 혁신보다는 체제수호 및 일부 세력 유지로 인해 구한말 사회상과 관료들의 부패,민생도탄 등을 국론을 분열시키고 이웃 열강들에겐 조선을 삼키려는 좋은 구실을 안겨 주었다는 아픈 교훈을 얻게 된다.

 

18세기부터 싹트기 시작한 실학사상과 서양선진문물에 대해 서울 북촌 양반집 엘리트들은 박규수 집 사랑채에 모여 오경석,유대치 등이 서양선진문물에 관한 서적과 불교의 인권 평등사상을 주제로 탐독하고 토의했는데 이것은 유교의 위계질서를 통치수단으로하는 조선 왕실 당국과 민비 측근 수구파에선 볼 때 개혁파들이 탐독하고 토의하는 것은 그들에겐 '불온서클'이고 '반체제집단'으로 보기에 충분했다.

 

고종의 부인 명성왕후는 순종(1874년생)을 낳으면서 시아버지 흥선 대원군을 시골로 쫓아 내고 민비 체제를 확고히 한다.1860년대 천주교인 탄압과 일본과 맺은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1875) 그리고 임오군란(1882년)은 기존 병사들에 대한 푸대접과 별기군의 창설로 조선에 대한 청국의 영향력이 거세지자 김옥균을 위시한 급진 개혁파는 일본에 더 적극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게 된다.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 들이고 개화하는 방법을 놓고 각론적으로는 다른 견해와 자세를 보인다.김옥균,박영효,서상범,서재필들이 급진 개혁파라면 김홍집.어유중.김윤식 등은 개화사상의 본질은 동일하되 체제와 제도를 지키면서 서서히 개화하자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주창한다.특이한 점은 갑신정변을 앞두고 김오균은 환관 유재현과 궁녀 고대수(顧大嫂:되돌아보게 되는 통 큰 여자) 등을 포섭하여 궁궐 내의 주요 정보를 수집하게 했다는 점이다.

 

김옥균의 정신적 스승격인 박규수,오경석,유대치 등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1884년 12월 4일 우정총국 앞에서 정강 14개 조항을 <갑신일록>에 남기고 있다.청에 볼모로 가 있는 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케 하고 청국에 대한 조공허례(租貢虛禮)를 폐지하자는 것부터 6조(曹)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모두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들이 심의하여 처리토록 할 것까지 14개 조항이 개혁의 절실함을 보여 주고 있지만 왕조 수구 및 민비세력 등에 의해 갑신지변 세력들은 망명을 해야 하고 부침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김옥균은 김병기의 양아들로 그가 태어날 당시는 중국에선 홍슈취안의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고 영민함과 달변,해박한 지식과 진보적인 세계관,모험심과 추진력,그리고 정적의 자객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이 러시아 10월 혁명의 주인공 트로츠키와 비슷하다.그는 국제 정세에서 국가와 지도자가 나아갈 방향을 쓴 기화근사(箕和近事)와 조선의 영토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 조선여지도(朝鮮輿地圖)를 만들기 했다.불미스러운 점은 문공사관으로 증광시(천연두에 걸린 왕세자의 회복을 바라기 위해 실시한 특별 과거시험)를 관장하게 되었는데 양반 자제들만 합격이 되어 불공정한 시험이라는 이유로 평안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조급하게 거사한 갑신정변은 실패가 예견되었고 그는 치토세마루선에 몸을 싣고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그는 문명개화론자로 알려진 후쿠자와 유키치(그는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를 쓴 장본인이기도 하다)를 만나기도 하고 생명의 은인 치토세마루 선장 쓰지카쿠,치치시마에서 만난 와다는 그가 최후의 순간을 맞이할 때까지 동행이 되어 주고 김옥균의 도움으로 한성에서 사진관을 운영하게 된가이군지의 충정,홋카이도에서 만난 연인 스키타니 등은 망명시절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흠모했던 인물들이다.

 

조선인 최초의 프랑스 유학 홍종우는 귀국길에 일본에 당착하고 김옥균을 호시탐탐 죽이려 했던 이일직에 의해 돈으로 매수되면서 홍종우는 정변으로 출세길이 막혔다고 생각하던 참에 절호의 기회를 타게 된다.자신을 믿고 따라 주는 김옥균은 홍종우에 대해 호감을 느끼게 되면서 조.중.일의 삼국평화의 염원을 담아 리홍짱을 만나러 상해에 몸을 맡긴다.그의 곁에는 홍종우,가이군지,와다,청국 통역관 등이 대동하게 된다.상해 동화양행(同和洋行)에 투숙을 하고 그의 조력자 와다가 자리를 비운 사이 김옥균은 <자치통감>을 읽고 있었던 사이 홍종우는 무방비 상태인 김옥균을 향해 세 발을 발사하게 되고 그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이 죽음은 고종친인척과 민비의 측근들에 의한 합작품이고 그의 죽음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암묵적인 방조라고 생각된다.

 

그의 시신은 몇 일이 지난 상태에서 인천을 거쳐 양화진에 내려지고 능지처사된 후에도 난도지을 다했는데 그의 죄목은 '모반대역부도율'에 해당하는 대역죄이다.또한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역들의 가족과 친지들도 연좌제에 의한 심한 탄압과 자살 등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 했고 아관파천 직후 친러파인 이범진.이완용의 꼬임에 빠진 고종은 김홍집.김윤식.어윤중.정병하.장박 등도 포살령(捕殺令)이 내려지면서 안타깝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갑오동학혁명,을미사변,을사늑약,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구한말은 스러져 가는 나약한 왕조와 무능으로 인해 주권을 빼앗기게 되는 통한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또한 이 글을 읽고 있는 21세기 한반도는 김정일 사후로 남북관계의 재정립과 이웃 나라와의 관계개선과 실익을 도모하고 민생을 위해 위정자들은 돈과 명예,권력의 밥그릇 챙기기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곱씹어 볼 문제이다.특히 남북한 통일문제에 있어서는'봉산개도(逢山開道),우수가교(遇水架橋):산을 만나면 길을 내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듯이 난관을 차근차근 돌파해 간다)를 지난 아픈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 인내력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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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버린 사람들 - 1866, 애절한 죽음의 기록
이수광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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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가르침과 교리,믿음은 절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이러한 믿음은 육신을 초개와 같이 불사르고 세속에 더럽혀진 영혼을 갈구함으로써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가슴 깊게 느낄 수가 있다.비단 어느 종교,종파를 떠나 자신이 의지하고 공동체 생활을 통해 교인들과의 두터운 관계를 통해 신심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나라가 어둡고 미래가 불투명한 시대라면 종교와 교리가 바로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 주고 그 종교를 바탕으로 의지와 열정,희생을 감수할 각오와 선각자적인 자세가 충만되어 있다는 것을 조선후기에 불어 닥친 천주교인에 대한 처형,유배 등을 통해 인지하고 깊게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프랑스 선교사 리델이 쓴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 살림 출판을 통해 프랑스 외방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선교 활동과 투옥 생활 등의 체험기를 통해 천주교 박해의 단면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번 도서를 통해 천주교 박해의 실상을 연대기,인물,사건배경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천주교 박해는 말그대로 피비린내 나는 처형극의 극치였고 교인들은 대개가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오상절개와 같은 기개를 보여 주었다.

 

정조 후반기에 들어온 천주교는 개방적이고 실용주의에 가까운 정조는 천주교인들에게 심하게 대하지 않았지만 정조 사후 조대비의 수렴청정과 안동김씨의 세도정권을 위한 신유박해에서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천주교인과 프랑스 선교사들의 희생이 1886년 조불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천주교는 조선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윤지창의 조상에 대한 폐사(廢祀)사건부터 신유박해,임오박해,기해박해,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천주교인들은 한결같이 배교의 회유를 물리치고 그들이 믿는 천주의 교리를 끝까지 지켰다는 점이다.안동 김씨,풍양 조씨 등의 정권 장악과 조선 왕권의 강화,유교체제의 붕괴 우려가 천주교인들의 거대한 희생양이 되었으며 병인박해를 통해 프랑스 로즈 제독이 이끄는 강화도 점령 사건은 조선의 뒤떨어진 화승총,화살과 프랑스의 신식 무기 앞에 강화도는 초토화가 되고 천총 양헌수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면서 외세의 침략과 개방 압력은 국내 천주교인들을 더욱 탄압으로 몰아가고 말았다.또한 천주교인에 대한 탄압과 회유,군문효수형은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였고 그즈음 동학과 민생의 도탄 등으로 조선의 국내 상황은 말그대로 오리무중이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개혁은 아래로부터 불붙기 시작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물론 교리를 대표하는 사람과 선교사들도 탄압과 희생의 대상이 되었지만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민초들의 뜨거운 신심이 조선의 개방에 커다란 역할과 작용을 했다고 생각되며 역사라는 것은 위정자들의 선각적이고 개방적이며 민심을 아우르며 치세를 행하는 자가 진정한 애국자이고 위인이며 후세에 기리 칭송과 존경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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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2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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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 역사 관련 도서를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사료를 바탕으로 충실하고도 생생한 현장감을 살려 재미와 교훈을 안겨 주는 점이다.특히 조선시대는 숭유억불 정책과 성리학에 바탕을 둔 왕조의 정체성과 왕권과 사대부들의 낭과 패와 같은 이해관계 속에서 왕위 계승과 훈구파와 사림파,민생을 외면한 당쟁,외국 문물을 실사구시에 맞게 적기에 수용하지 못했던 조선 오백년 역사가 후대들에게 많은 교훈을 안겨 준다.역사는 위정자들의 선각자적인 안목과 통찰력,시대를 앞서 읽고 실천해 나가는 수용력과 진보적인 사고,민생을 최고로 여기고 받느는 '민본위주'가 한 나라의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켜 간다고 생각한다.

 

 

조선 왕조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왕위를 지키고 '탕평책'으로 민본 정책을 펼친 여조에겐 역사의 오점을 남긴 아들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부분이다.이덕일저(著)의 <사도세자의 고백>을 통해서 영조가 사도세자에 대한 기대감과 그가 뒤주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까지 부자 관계가 그리 탐탁치 않은 '견원지간'과 같은 갈등과 고뇌의 연속이었고 사도세자의 죽음은 단지 영조 개인의 선택과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닌 주변 인물들의 고변과 친인척의 관여가 커다란 요인이 아닐 수가 없다.또한 당대 노론과 소론이라는 당파간의 치열한 이전투구가 소론으로 분류된 사도세자에겐 치명상이 되었고 훗날 자신의 아들 정조에 의해 명예가 복원되고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들은 엄중한 처벌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희궁에 의해 태어난 사도세자는 돐을 지나면서 동궁으로 승격되고 차기 왕위를 계승할 인물로 영조는 점찍었다.그래서 일찍부터 세자시강원에 보내 논어,맹자 등 사서를 학습시키고 예의범절,왕으로서의 체모와 자질 등을 관원들로부터 익히게 하는데 사도세자는 공부보다는 체질적으로 밖으로 나가 노는 것을 즐기고 학습엔 그다지 흥미가 없었던 모양이다.이러한 학습 과정이 영조의 귀에 들어가니 때론 부왕에게 타이름을 받고 꾸지람을 들어가면서 사도세자가 철이 들고 자신의 뒤를 이어주기를 바라지만 나아지지를 않게 된다.또한 왕이 되어야만 한다는 심리적 강박증과 일반불안장애,충동조절장애 등으로 헛것을 보기 시작하고 1760년(26세) 자신의 생일날 부왕을 욕하기 시작하고 나경언이 올린 고변서가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세자로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그것은 왕손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빙애) 끌어 들이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북성(北城)으로 유람까지 한 점이 세자의 자질을 훼손시켰고 실망스럽다는 것이었다.

 

 

나경언의 고변에는 배후 인물로 김한구,윤급,홍계희를 꼽으면서 즉각 나경언을 효수했다고 한다.그 배후를 밝히는 것은 권력 중심부에 있었던 인물들이고 깊게 조사가 진행되면 권력 중심부가 피바다가 될게 불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여오는 두려움과 꺼림칙함으로 나경언 한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일단락된듯 하지만 세도세자는 역시 '뜨거운 감자'로 당시 조정의 살벌한 분위기를 몰아가고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이유는 그의 정신 분열증과 당쟁에 희생되었다는 점인데 평소 논리적이었던 영조가 신령의 말을 거론하면서 '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다'라는 점이 직접적 이유이며 이는 <영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폐세자반교>는 <승정원일기>나 <한중록>에서 엿볼 수가 있지만 구체적이지 않고 그 해당부분이 삭제되었다.<대천록>,<현고기>,<모년기사>에 수록된 <폐세자반교>에서 '세자를 폐위하노라'라고 명령을 전국에 반포했으며 선희궁의 말은 폐세자로 삼아야 할 당위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세자가 내관,내인,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 명이오며,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중략)...장번내관을 내쫓고 어린 내관,별감들과 주야로 함께 있으면서 재화를 그들에게 나눠주고 기생,비구니와 음란한 일을 벌였습니다.그리고 제 하인을 불러 가두기까지 했고 잘못이 너무 심하여 한 번 아뢰고자 하나 모자의 은정 때무네 차마 아뢰지 못했습니다. P214에서

 

 

이제 사도세자는 부왕에 의해 자결을 요구받지만 변명과 살고 싶다는 항명을 고하지만 한 번 굳어진 마음을 되돌릴 수 없게 되며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죽이려 발의한 사람은 장인 홍봉한이라고 한유 등 공홍파(功洪派) 혜경궁 친정을 공격하지만 혜경궁은 극구 부인한다.다만 <영조 실록> 및 <임오일기>에는 뒤주가 들어오기 전 장인 홍봉한이 이미 입궁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시간의 선후와 진실성의 의심이라는 점에서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거구의 세도세자는 숨이 막히는 뒤주 안에서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하기에 관원들이 뒤주 밑에 뚫린 구멍으로 음식물을 제공하지만 이를 알아챈 영조는 구멍을 막고 뒤주 윗쪽으로는 풀잎을 얹어 놓아 굶주림과 원한,외로움,분함,자책감으로 뒤주에 들어간지 8일만에 싸늘한 시체로 변하게 된다.

 

 

부왕에 대한 사도세자의 괴씸죄,역모,고변 등이 절대권력의 왕조시대였던 당대에 영조는 왜 자식을 비윤리적으로 죽였는지는 당대의 당쟁과 부왕의 심기를 거스르게 한 사도세자의 행적들이 종합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지 않았는지 모른다.영조는 자식이 죽고 초라한 장례 의식을 치르게 하지만 사도세자의 묘지명에는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죽었다는 비보를 들었노라.라고 후회와 분노의 심정을 드러낸다.이 글은 <승정원 일기>,<영조실록>,<한중록>을 바탕으로 쓴 글이고 저자는 이덕일저자가 쓴 <사도세자의 고백>에 대해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많은 비판을 서슴치 않고 사료에 바탕을 두지 않고 진실성과 어긋난 글이라고 반박한다.

 

 

조선의 사회는 엄격한 절대 왕권과 세습체제하에 있었기에 왕의 심기나 비위를 거스르는 행위나 행적은 커다란 재앙과 화를 자초하게 된다는 교훈을 얻는다.한 편 자신의 뒤를 이어가고 왕조를 더욱 빛내 줄것을 크게 기대한 만큼 아들 사도세자의 행위와 행적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덧붙여 사도세자를 모시고 충언과 간언을 했던 권력 중심부의 관원과 사대부들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사도세자의 죽음을 막았어야 마땅하지 않았는가 한다.그러나 절대권력 앞에서는 부모형제,자식,친인척도 당대 사회는 용서와 화해는 없고 능상에 어긋나면 죽음과 유배,강등과 좌천,노비로 전락되는게 어두웠던 조선의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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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김범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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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성격은 개인의 태고난 가정 환경과 기질,체질,성향,사회적인 구조,인식 등에 의해 반영된다고 생각한다.민초와 같은 국가의 구성원으로부터 수장에 이르기까지 면면이 다르고 각양각색이다.하물며 일국의 왕이 나라를 다스림에 공평무사와 탕평을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폭정과 음주,가무 등 국사를 소홀히 하고 타락된 음행 생활과 원망의 대상에 대한 보복 등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조선 왕조 27대 가운데 연산군 시대가 사화와 보복,폐위 등으로 얼룩진 음울한 시기가 아닐 수가 없다.

 

조선12대 임금이지만 조나 종이 아닌 군(君)으로 불리는 것은 연산군이 국치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생모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린 자들에게 커다란 보복 살인과 유배 등이 이루어지고 수많은 궁녀들과 사냥,음주,가무,변태적인 행동(말의 교미를 관음하는 등)이 그의 사후 격하 시호로 명명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글은 연산군 일기와 조선 왕조실록에 의거하여 연산군이라는 한 인간과 시대의 내면을 촘촘하고도 이해하기 쉽게 서술하고 있다.생모 윤씨가 정희왕후에 의해 간택되는데 윤씨의 검소함과 현숙함이 성종의 총애를 받게 되지만 윤씨가 자신의 처소에 비상(砒霜)과 방양서(方禳書:굿하는 방법을 적은 책)를 숨겨둔 사실이 발각되면서 성정고 정희왕후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고 성종을 독살할 가능성 심각한다고 판단하면서 그녀의 비극은 폐비와 별거,폐서인과 출궁을 거쳐 종국엔 사사에 이르게 되고 그녀의 집안은 풍비박산의 지경에 이르게 된다.

 

세자 시절의 연산군의 자질은 긍.부정이 엇갈리지만 학문적인 면에서는 커다란 흠은 엇지만 성종 후반으로 갈수록 학습 태도가 방만하고 이해력도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진다.성종대에 삼사의 위상이 제고되면서 그가 즉위하자 마자 국왕과 대신에게 간언과 탄핵이 제기되고 연산군은 이를 능상(凌上:윗사람을 능멸한다)로 규정하면서 치세시절의 가장 핵심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연산군과 사마의 충돌은 외척의 임용과 포상에서 주로 보여진다.

 

연산군은 성종의 묘지문을 보다가 판봉상시사 윤기견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그게 자신의 외조부 유호를 잘못 쓴것이 아니냐고 승정원에 물으면서 생모 윤씨가 죄로 폐위되어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날 수라(水喇)를 들지 않고 충격과 비통을 깊게 비췄으며 창원부사 조지서에 의해 폐비의 추승을 건의 받으면서 그 작업은 활기를 띠게 되고 조선의 국정은 폭정과 탄압의 연속으로 이어지게 된다.

 

연산군은 정치적 숙청으로 전면적이 아닌 제한된 규모로 이루어졌는데 그것으 국왕.대신과 삼사의 대립이 시작되는데 무오사화(1497년)가 이루어지고 무오사화는 세 단계로 진행된다.발단은 김일손의 사초에 세조와 관련된 불충한 내용이 담겨 있고, 그와 교유한 관원.선비들이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문제로 확대되며,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견되면서 사제관계를 매개로 붕당을 결성해 역사와 현실에 역심을 품은 사건을 규정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이에 연루된 자들은 대부분 유배,사형,파직,좌천,징역과 노역,고신삭탈로 피화된다.

 

이어 연산군 1인에 의해 갑자사화가 발생하는데 그 발단은 잔치에서 어의에 술을 엎지른 이세좌 사건과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왕명을 이행치 않은 홍귀달 사건이다. 피화자는 대신과 삼사를 중심으로 한 모든 신하들이 포함되었다.갑자사화는(1503년) 능상의 척결과 폐모(생모 윤씨) 사건이 보복이라는 두 가지 원인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발발하는데 사적인 감정이 압도적이었다는 점이다.그가 치세 12년을 거치고 폐위될 때까지 갑자사화의 끝은 '장기적인 숙청'형식으로 이루어지며 처참하기 이를데 없으며 권력의 자의성(恣意性)이 극치를 보이고 전제 왕권의 몽상과 황음(慌淫)에 침윤되어 가던 국왕이 행사한 폭력의 극점을 보여주고 있다.갑자사화가 발발하면서 곧이어 폐모 윤씨에 대한 사건의 전말을 조사하고 이에 연루된 성종의 후궁의 자식,인척,양반들이 주를 이루고 일반적인 처형 외에 부관참시.쇄골표풍.파가저택 같은 극한적인 형벌이 적용되면서 규모와 대상은 거대하고 참혹하기만 하다.

 

갑자사화가 수그러들면서 연산군은 토목공사를 시작하는데 목적은 유흥을 즐기려는데 있다.그는 가장 중요한 유흥지인 궁궐의 담장을 높여 외부의 시선과 접근을 엄단했는데 담장은 이중으로 사슴뿔과 같은 녹각책을 설치한 뒤 그 안팎에 녹각성을 조성했다고 한다.또한 정궁과 이궁을 분리 설치하고 그의 유흥지인 궁궐 근처의 민가까지 철거하면서 금표 설치도 동시에 이루어졌다.그도 인간인지라 이러한 행위가 안되었다는듯이 철거한 여염들에게 쌀과 베를 보상으로 주었다고 한다.하찮고 전시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말년은 국치보다는 사적인 취미와 황음에 치중했다.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국왕의 작태는 결국 중종 생모인 정현왕후에 의해 폐이되고 폐주가 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위리안치되어 30세의 젊은 나이에 역질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사냥과 황음의 만연,추문의 확대,재정 지출의 급증,정무의 태만 등으로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군주가 되고 말았다.한 나라의 수장은 예나 지금이나 불편부당한 중립적인 자세와 민심에 귀를 기울이고 공정한 인사 정책과 나라의 안위에 몰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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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894년 여름 - 오스트리아인 헤세-바르텍의 여행기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 지음, 정현규 옮김, 한철호 감수 / 책과함께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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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안(壁眼)의 오스트리아 여행가에 의한 19세기말 조선의 기행문은 호기심으로 가득차기도 하지만 당대 조선 국내 사정이 개화파와 수구파,외세의 부침 속에 샌드위치에 있었던 터라 후대의 한사람으로서 조금은 우려스러운 면도 있었다.바르텍이 본 1894년 여름의 조선의 국내 모습은 부산과 제물포,서울이 주가 된다.당시 상황은 외세의 힘을 빌려 동학혁명이 일어나며 그로 인해 불붙은 청.일전쟁으로 조선의 앞날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오리무중'의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볼피첼리의 <청일전쟁>과 부르다레의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을 통해 구한말 조선의 실상과 백성들의 속살을 들여다 보기도 했지만 이번 견문기는 당시 조선의 모든 분야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그 느낌을 소상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그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는지는 모르지만 구한말 조선의 교역량(1883~1893)에 상품과 화폐를 대별하여 구체적으로 보여준 점도 역사를 연구하고 관심있는 이들에겐 커다란 자료임에 틀림없다.

 

그는 나가사키를 떠나 부산에 상륙한 다음 부산에서 몇 일 머물다 제물포로 이동하고 다시 한양(서울)로 이동하는 과정을 그린다.하얀 광목과 짚신을 신은 조선의 백성과 청.일전쟁의 와중에 조선에 상주하는 청국민과 일본인 그외 선교사로 들어와 포교활동을 하는 서양인들은 마치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거 같이 다가온다.길을 가더라도 일본인이 앞장서고 다음은 중국인 맨 마지막엔 조선인은 짐 끄는 마차처럼 터벅터벅 걷고 있는 점이 한스럽기도 하고 애달프기도 하다.

제물포는 왜색보다는 유럽 스타일의 호텔과 상점,우체국과 영사관 건물이 세워지고일본인 구역과 유럽인 구역의 경계선을 그어 놓았다는 점도 특이하다.또한 일본인들이 사교모임으로 당구장과 끽차점(喫茶店:다방)이 있었다.조선인은 얼씬도 못하고 밥이 보약이라 밥을 주식으로 하고 후식은 숭늉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제물포에 살던 백성들의 주된 일은 고기잡이,노 젖기,짐 나르기 등 고단하고 티가 지 않은 일용직이 위주가 됨을 알게 된다.

 

제물포에서 한양까지는 30마일 정도이고 영등포에서 마포까지 가려면 돛단배를 타야 하고 홍수가 나면 통나무로 얽어 놓은 다리를 떼어야 홍수에 휩쓸리지 않으며 그가 본 조선인의 체격은 중국,일본인보다 골격이나 신장면에서 월등하다고 한다.행차는 조랑말을 이용하고(지체 높은 사람),짐은 인력거나 지게를 이용한다.그가 한양에 도착해 가장 인상적인 점은 사대문을 지키는 성문의 열고 닫음이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다는 점이다.이것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지켱 하고 해가 진 뒤에는 성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고 노숙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가 한양의 풍경을 맛보고 기록하기 위해 남산 정상에 올라 바라본 모습은 커다란 분지와 같고 그 분지 안에 빼곡히 집들이 맞붙어 있었다.그 초가들은 납작한 오둑막의 초갖붕 1만여 개가 마치 공동묘지의 회색 봉분처럼 다닥다닥 늘어서 있고,도로도 없고 눈에 띄는 건물이나 사원,궁전,나무,정원이 없었다고 한다.마치 몰락해 가는 조선 최후의 숨결이 소리없이 전해져 오는거 같다.

 

음식에 대해선 구역질 나는 것이 많다고 소감을 피력하고 왕이 먹는 음식의 종류와 식사 시간만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유일하게 임금만 우유를 마실 수가 있다는 점이다.또한 불상사나 외부로부터의 위협이나 위험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전국 여덟 곳에 봏화(熢火)를 지핀다는 점이고 내시와 시동(侍童),여인들이 궁궐을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그러면서 그는 조선의 백성만큼 순박하고 온후한 민족이 없는데 국정을 관할하는 왕조 및 사대부의 무능으로 인해 거짓과 범죄적인 곳은 없을거라고 술회하고 있다.

 

조선의 다양한 계급 중에 단연 가장 높은 위치는 귀족(사대부)이고 가장 낮은 계급은 상인,선원,간수,짐꾼,중,백정,무당으로 소위 '일곱 가지 천한 직업'으로 분류하고 있다.봉건적인 위계질서와 신분이 정착한 당시 조선에서 노예와 몸종 제도로서 많은 귀족들이 몸종을 거늘리며 종의 자식을 매매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자유로운 신분의 남자가 여종과 결혼은 할 수 있되 그 사이에서 낳은 딸은 마음대로 사고 팔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조선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서적 인쇄술과 금속 활자,도자기,채색 백자,닥나무로 만든 종이 등 조선인의 손길과 숨결로 만들어진 창조적이고 독특하며시대를 앞서가는 우수한 점이 많은데도 외부 세계와 철저히 폐쇄시키고 탐관오리의 억압과 착취,무능력한 왕조 및 사대부의 이권 다툼 탓에 명맥을 유지하던 산업마저 뒷걸음을 치고 조선의 운명은 '종이 호랑이'에 지나지 않고 황혼의 제국의 길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시대이고 국가의 수장은 민본위주가 되어야 한다.모든 일은 절대다수를 차짛는 민초들로부터 발생하고 기인한다.민초들의 말을 경청하고 국가의 대계를 수립해 나갈때 비로소 그 나라는 발전할 수밖에 없다.현재 정치권을 볼 때 갑론을박하면서 자리다툼이나 이권 챙기기에 바쁘기만 할 뿐 민생문제나 서민들의 고초를 제대로 알기나 하는지 분노가 치밀 뿐이다.조선말 벽안의 한 여행가가 보고 듣고 발굴해 낸 자료를 정리한 '조선 견문기'는 조선의 전체는 아니더라도 조선의 심장을 통찰력있게 그려낸 글이기에 사료 및 학습연구로써 전혀 손색(遜色)이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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