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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과 젊은 그들의 모험 - 조선 엘리트 파워
안승일 지음 / 연암서가 / 2012년 4월
평점 :
개화란 말은 <역경>에 나오는 '개물성무(開物成務)'와 '화민성속(化民成俗)'의 합성어로서 개물성무는 사람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개발하고 사람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게 한다는 뜻이며,화민성속은 무지한 백성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만든다는 뜻이다.이는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백성을 교화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
기울어가는 구한말 19세기는 세기의 초입부터 다음 세기까지 왕조의 정권유지,외척의 세도,천주교인 탄압,외세의 개방압력 그리고 외세의 지배로 이어지는 힘없는 조선의 지난 궤적이 바꿀 수도 없는 엄연한 역사의 장이었다는 것을 통감한다.소수의 권세와 배부름,미래의 국가 대계를 위한 개혁과 혁신보다는 체제수호 및 일부 세력 유지로 인해 구한말 사회상과 관료들의 부패,민생도탄 등을 국론을 분열시키고 이웃 열강들에겐 조선을 삼키려는 좋은 구실을 안겨 주었다는 아픈 교훈을 얻게 된다.
18세기부터 싹트기 시작한 실학사상과 서양선진문물에 대해 서울 북촌 양반집 엘리트들은 박규수 집 사랑채에 모여 오경석,유대치 등이 서양선진문물에 관한 서적과 불교의 인권 평등사상을 주제로 탐독하고 토의했는데 이것은 유교의 위계질서를 통치수단으로하는 조선 왕실 당국과 민비 측근 수구파에선 볼 때 개혁파들이 탐독하고 토의하는 것은 그들에겐 '불온서클'이고 '반체제집단'으로 보기에 충분했다.
고종의 부인 명성왕후는 순종(1874년생)을 낳으면서 시아버지 흥선 대원군을 시골로 쫓아 내고 민비 체제를 확고히 한다.1860년대 천주교인 탄압과 일본과 맺은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1875) 그리고 임오군란(1882년)은 기존 병사들에 대한 푸대접과 별기군의 창설로 조선에 대한 청국의 영향력이 거세지자 김옥균을 위시한 급진 개혁파는 일본에 더 적극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게 된다.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 들이고 개화하는 방법을 놓고 각론적으로는 다른 견해와 자세를 보인다.김옥균,박영효,서상범,서재필들이 급진 개혁파라면 김홍집.어유중.김윤식 등은 개화사상의 본질은 동일하되 체제와 제도를 지키면서 서서히 개화하자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주창한다.특이한 점은 갑신정변을 앞두고 김오균은 환관 유재현과 궁녀 고대수(顧大嫂:되돌아보게 되는 통 큰 여자) 등을 포섭하여 궁궐 내의 주요 정보를 수집하게 했다는 점이다.
김옥균의 정신적 스승격인 박규수,오경석,유대치 등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1884년 12월 4일 우정총국 앞에서 정강 14개 조항을 <갑신일록>에 남기고 있다.청에 볼모로 가 있는 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케 하고 청국에 대한 조공허례(租貢虛禮)를 폐지하자는 것부터 6조(曹)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모두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들이 심의하여 처리토록 할 것까지 14개 조항이 개혁의 절실함을 보여 주고 있지만 왕조 수구 및 민비세력 등에 의해 갑신지변 세력들은 망명을 해야 하고 부침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김옥균은 김병기의 양아들로 그가 태어날 당시는 중국에선 홍슈취안의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고 영민함과 달변,해박한 지식과 진보적인 세계관,모험심과 추진력,그리고 정적의 자객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이 러시아 10월 혁명의 주인공 트로츠키와 비슷하다.그는 국제 정세에서 국가와 지도자가 나아갈 방향을 쓴 기화근사(箕和近事)와 조선의 영토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 조선여지도(朝鮮輿地圖)를 만들기 했다.불미스러운 점은 문공사관으로 증광시(천연두에 걸린 왕세자의 회복을 바라기 위해 실시한 특별 과거시험)를 관장하게 되었는데 양반 자제들만 합격이 되어 불공정한 시험이라는 이유로 평안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조급하게 거사한 갑신정변은 실패가 예견되었고 그는 치토세마루선에 몸을 싣고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그는 문명개화론자로 알려진 후쿠자와 유키치(그는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를 쓴 장본인이기도 하다)를 만나기도 하고 생명의 은인 치토세마루 선장 쓰지카쿠,치치시마에서 만난 와다는 그가 최후의 순간을 맞이할 때까지 동행이 되어 주고 김옥균의 도움으로 한성에서 사진관을 운영하게 된가이군지의 충정,홋카이도에서 만난 연인 스키타니 등은 망명시절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흠모했던 인물들이다.
조선인 최초의 프랑스 유학 홍종우는 귀국길에 일본에 당착하고 김옥균을 호시탐탐 죽이려 했던 이일직에 의해 돈으로 매수되면서 홍종우는 정변으로 출세길이 막혔다고 생각하던 참에 절호의 기회를 타게 된다.자신을 믿고 따라 주는 김옥균은 홍종우에 대해 호감을 느끼게 되면서 조.중.일의 삼국평화의 염원을 담아 리홍짱을 만나러 상해에 몸을 맡긴다.그의 곁에는 홍종우,가이군지,와다,청국 통역관 등이 대동하게 된다.상해 동화양행(同和洋行)에 투숙을 하고 그의 조력자 와다가 자리를 비운 사이 김옥균은 <자치통감>을 읽고 있었던 사이 홍종우는 무방비 상태인 김옥균을 향해 세 발을 발사하게 되고 그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이 죽음은 고종친인척과 민비의 측근들에 의한 합작품이고 그의 죽음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암묵적인 방조라고 생각된다.
그의 시신은 몇 일이 지난 상태에서 인천을 거쳐 양화진에 내려지고 능지처사된 후에도 난도지을 다했는데 그의 죄목은 '모반대역부도율'에 해당하는 대역죄이다.또한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역들의 가족과 친지들도 연좌제에 의한 심한 탄압과 자살 등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 했고 아관파천 직후 친러파인 이범진.이완용의 꼬임에 빠진 고종은 김홍집.김윤식.어윤중.정병하.장박 등도 포살령(捕殺令)이 내려지면서 안타깝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갑오동학혁명,을미사변,을사늑약,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구한말은 스러져 가는 나약한 왕조와 무능으로 인해 주권을 빼앗기게 되는 통한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또한 이 글을 읽고 있는 21세기 한반도는 김정일 사후로 남북관계의 재정립과 이웃 나라와의 관계개선과 실익을 도모하고 민생을 위해 위정자들은 돈과 명예,권력의 밥그릇 챙기기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곱씹어 볼 문제이다.특히 남북한 통일문제에 있어서는'봉산개도(逢山開道),우수가교(遇水架橋):산을 만나면 길을 내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듯이 난관을 차근차근 돌파해 간다)를 지난 아픈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 인내력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