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김범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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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성격은 개인의 태고난 가정 환경과 기질,체질,성향,사회적인 구조,인식 등에 의해 반영된다고 생각한다.민초와 같은 국가의 구성원으로부터 수장에 이르기까지 면면이 다르고 각양각색이다.하물며 일국의 왕이 나라를 다스림에 공평무사와 탕평을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폭정과 음주,가무 등 국사를 소홀히 하고 타락된 음행 생활과 원망의 대상에 대한 보복 등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조선 왕조 27대 가운데 연산군 시대가 사화와 보복,폐위 등으로 얼룩진 음울한 시기가 아닐 수가 없다.

 

조선12대 임금이지만 조나 종이 아닌 군(君)으로 불리는 것은 연산군이 국치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생모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린 자들에게 커다란 보복 살인과 유배 등이 이루어지고 수많은 궁녀들과 사냥,음주,가무,변태적인 행동(말의 교미를 관음하는 등)이 그의 사후 격하 시호로 명명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글은 연산군 일기와 조선 왕조실록에 의거하여 연산군이라는 한 인간과 시대의 내면을 촘촘하고도 이해하기 쉽게 서술하고 있다.생모 윤씨가 정희왕후에 의해 간택되는데 윤씨의 검소함과 현숙함이 성종의 총애를 받게 되지만 윤씨가 자신의 처소에 비상(砒霜)과 방양서(方禳書:굿하는 방법을 적은 책)를 숨겨둔 사실이 발각되면서 성정고 정희왕후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고 성종을 독살할 가능성 심각한다고 판단하면서 그녀의 비극은 폐비와 별거,폐서인과 출궁을 거쳐 종국엔 사사에 이르게 되고 그녀의 집안은 풍비박산의 지경에 이르게 된다.

 

세자 시절의 연산군의 자질은 긍.부정이 엇갈리지만 학문적인 면에서는 커다란 흠은 엇지만 성종 후반으로 갈수록 학습 태도가 방만하고 이해력도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진다.성종대에 삼사의 위상이 제고되면서 그가 즉위하자 마자 국왕과 대신에게 간언과 탄핵이 제기되고 연산군은 이를 능상(凌上:윗사람을 능멸한다)로 규정하면서 치세시절의 가장 핵심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연산군과 사마의 충돌은 외척의 임용과 포상에서 주로 보여진다.

 

연산군은 성종의 묘지문을 보다가 판봉상시사 윤기견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그게 자신의 외조부 유호를 잘못 쓴것이 아니냐고 승정원에 물으면서 생모 윤씨가 죄로 폐위되어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날 수라(水喇)를 들지 않고 충격과 비통을 깊게 비췄으며 창원부사 조지서에 의해 폐비의 추승을 건의 받으면서 그 작업은 활기를 띠게 되고 조선의 국정은 폭정과 탄압의 연속으로 이어지게 된다.

 

연산군은 정치적 숙청으로 전면적이 아닌 제한된 규모로 이루어졌는데 그것으 국왕.대신과 삼사의 대립이 시작되는데 무오사화(1497년)가 이루어지고 무오사화는 세 단계로 진행된다.발단은 김일손의 사초에 세조와 관련된 불충한 내용이 담겨 있고, 그와 교유한 관원.선비들이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문제로 확대되며,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견되면서 사제관계를 매개로 붕당을 결성해 역사와 현실에 역심을 품은 사건을 규정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이에 연루된 자들은 대부분 유배,사형,파직,좌천,징역과 노역,고신삭탈로 피화된다.

 

이어 연산군 1인에 의해 갑자사화가 발생하는데 그 발단은 잔치에서 어의에 술을 엎지른 이세좌 사건과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왕명을 이행치 않은 홍귀달 사건이다. 피화자는 대신과 삼사를 중심으로 한 모든 신하들이 포함되었다.갑자사화는(1503년) 능상의 척결과 폐모(생모 윤씨) 사건이 보복이라는 두 가지 원인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발발하는데 사적인 감정이 압도적이었다는 점이다.그가 치세 12년을 거치고 폐위될 때까지 갑자사화의 끝은 '장기적인 숙청'형식으로 이루어지며 처참하기 이를데 없으며 권력의 자의성(恣意性)이 극치를 보이고 전제 왕권의 몽상과 황음(慌淫)에 침윤되어 가던 국왕이 행사한 폭력의 극점을 보여주고 있다.갑자사화가 발발하면서 곧이어 폐모 윤씨에 대한 사건의 전말을 조사하고 이에 연루된 성종의 후궁의 자식,인척,양반들이 주를 이루고 일반적인 처형 외에 부관참시.쇄골표풍.파가저택 같은 극한적인 형벌이 적용되면서 규모와 대상은 거대하고 참혹하기만 하다.

 

갑자사화가 수그러들면서 연산군은 토목공사를 시작하는데 목적은 유흥을 즐기려는데 있다.그는 가장 중요한 유흥지인 궁궐의 담장을 높여 외부의 시선과 접근을 엄단했는데 담장은 이중으로 사슴뿔과 같은 녹각책을 설치한 뒤 그 안팎에 녹각성을 조성했다고 한다.또한 정궁과 이궁을 분리 설치하고 그의 유흥지인 궁궐 근처의 민가까지 철거하면서 금표 설치도 동시에 이루어졌다.그도 인간인지라 이러한 행위가 안되었다는듯이 철거한 여염들에게 쌀과 베를 보상으로 주었다고 한다.하찮고 전시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말년은 국치보다는 사적인 취미와 황음에 치중했다.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국왕의 작태는 결국 중종 생모인 정현왕후에 의해 폐이되고 폐주가 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위리안치되어 30세의 젊은 나이에 역질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사냥과 황음의 만연,추문의 확대,재정 지출의 급증,정무의 태만 등으로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군주가 되고 말았다.한 나라의 수장은 예나 지금이나 불편부당한 중립적인 자세와 민심에 귀를 기울이고 공정한 인사 정책과 나라의 안위에 몰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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