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것에 대한 그리움 - 잊혀져가는 거의 모든 것의 아름다운 풍경
김종태 지음 / 휘닉스드림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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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도서를 통해 선조들의 숨결과 지혜,혼맥이 살아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지난 시절의 고단했던 촌부들은 땀으로 온몸이 얼룩지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했던 분들의 모습이 환영마냥 선연하게 다가온다.아침 잠도 없이 새벽닭이 "꼬끼오"하고 울어대면 어르신들은 잠에서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때론 논에 물꼬를 열고 논두럭에 자라난 풀이라고 깎기 위해 일찍 아침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선 길어 온 우물물에 싹싹 세수를 한 다음 아침 상에 앉아 맛있게 드시며 숭늉으로 입가심을 하셨다.특히 할아버지는 잎담배로 장죽의 담뱃대에 집어 넣고 뻐끔뻐끔 연기를 날리며 호젓하게 피우시던 주름진 할아버지의 근엄한 모습이 새롭다.

 

 

 

저자는 구리시 인창동 배나무 골에서 1960년대의 추억을 되살리고 잊혀져 가는 옛 것들을 되살려 선조들의 삶을 반추하고 그 속에서 선조들의 순박하고 지혜로운 것들을 모아 편하면서도 바쁘게 돌아가는 현세태를 꼬집으면서 돈으로만 해결하려 하는 배금주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나이가 들어가는 나도 이 점에 대해 공감하고 찬성한다.

 

 

 

역사는 늘 변천과 발전의 반복을 거듭해 왔다.인류에게 안겨주는 혜택은 무궁무진하지만 역으로 인류가 깊게 성찰해야만 하는 것도 지나간 옛 시절의 옛 것은 무심하지만 잘 전달해 주고 있다.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잔소리와 시집살이로 하루종일 밖에서 일하고 끼니 때가 되면 집에 와서 삼시 세 끼를 준비해야 하고 또 다시 논과 밭으로 일을 해야 하며 밤이 되면 말린 광목 옷을 뜨겁게 달구어진 인두로 빳빳하게 다리고 남편,자식들의 옷가지를 개기도 한다.그러다 졸음에 겨워 그만 잠들기도 한다.그에 비하면 아버지는 육체적인 일만 했지 집에 오면 말 그대로 왕 대접을 받는다.어머니가 부엌간에서 끓이고 삶고 지지며 버무린 음식들을 먹고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 실은 고향 소식'이라든지 권투 시합 등을 경청하며 나름대로 흥겨워하고 몸과 마음이 들썩뜰썩 하시던 모습도 어제의 일마냥 생생하다.

 

 

 

나는 이 글에 나오는 옛 것들은 보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고 직접 몸으로 움직여 본 것들이 대부분이며 생소한 것도 있다.전형적인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어린 시절의 초가집과 호롱불,빗,넓다란 마당,헛간,광,지게,타작,작두,절구통,서까래,구들장,조황신,봉당,버선,쪽,시루,반닫이,조롱박,양은 그릇,뒤주,대바구니,맷돌,화로,다듬이,또아리,골무,조리,놋그릇,체,키,부지깽이,고무신,고수레,서낭당,개떡,막걸리,엿장수,장독대,멍석(덕석),창호지,온돌,뒷간,우물 등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집에서 늘 보고 저절로 친해졌던 사물이고 존재였다.또한 학교를 왔다 갔다 하면서 '역전 상회'라는 곳에서 다양한 군것질 거리와 문구,간이 주막이 한 곳에 있었는데 또뽑기,달고나,눈깔사탕,뽀빠이 등을 자주 사먹고 물든 적이 있다.또뽑기에 우연히 당첨되어 멋진 만년필을 받게 되었는데 상회 주인의 늦장으로 몇 달 만에 내 품에 들어온 기억도 있다.그것도 갈 때마다 빨리 달라고 자주 졸랐기에 그나마 내 손에 들어온거 같다.

 

 

 

1972년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면서 초가는 차츰 사라지고 스레트 지붕과 기와가 줄을 잇고 1980년대가 되면서 양옥이 하나 둘 생기면서 시골 고향 마을도 차츰 변해 갔지만 동네 이웃들과 나누는 이야기는 늘 정담이 오고 갔고 제사나 잔치가 있으면 앞뒤로 서너 집은 꼭 음식을 담아 심부름을 하던 기억도 있다.당시 화장실은 헛간 옆에 있어서 밤이 되면 소변은 요강에 누곤 했다.다음 날 꽉 찬 소변은 할머니께서 치우고 짚으로 요강 속을 싹싹 닦곤 했다.어릴 땐 큰 것은 혼자 가기 무서워 할머니나 어머니가 측간 옆에 계시도록 부탁을 하곤 했는데 측간 입구 버팀목에는 새끼줄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그 새끼줄에는 여기 저기에서 온 주황색에 가까운 얇은 봉투에 부고장이 엮어져 있었고 보름달이라도 뜨는 날은 그나마 달빛을 벗삼아 공포심이 사그라들기도 했다.

 

 

 

봄,여름,가을,겨울 바쁘게 살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조부모님과 부모님은 몸을 사리지 않으시고 일에 매달리셨다.보리를 파종하고 보리싹이 틀 무렵이면 땅이 녹으면서 보리에 영향이 갈까봐 온 식구가 보리 논을 밟기도 하고 벼모가 자라고 모내기할 무렵이면 어두컴컴한 밤을 횃불로 밝히면서 동네 모꾼들이 모를 찔 때도 있었다.6월 여름이 시작되기에 논다랑이 물 속에는 풀들과 함께 거머리들이 자주 발목을 물기에 곤혹을 치르는 경우도 있었으며 한여름에는 벼 옆에 자라나는 피를 뽑고 아버지가 소독을 하시면 옆에서 줄을 이어주기도 하고 당기기도 했다.가을이 되면 식구와 놉(일꾼)이 하나가 되어 벼를 베고 한 켠에선 할머니나 어머니가 새참이나 점심을 또아리에 장방형의 광주리에 음식을 이고 오시고 바둑이도 쫄랑쫄랑 따라오던 시절도 기억이 난다.겨울에는 겨울나기를 위해 깊은 산 속에 부모님과 땔나무를 하러 간 적도 많다.이것도 모자라 아버지,어머니께서는 먼 타관에 가셔서 양은 그릇 장사를 하면서 생계와 경제자립도를 올리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전화와 텔레비젼,삐삐,핸드폰과 함께 편리한 세상을 맛보게 되었다.자식들은 장성하여 도회지로 이동하고 시골 마을에 남아 있는 분들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연로한 분들 뿐이다.간혹 성묘로 고향을 들르게 되면 경작하지 않는 논과 밭들이 무성한 풀로 가득차고 타지에서 이사 온 이방인들만 낯설기만 하다.돈을 벌고 출세를 하기 위해 도회지로 이동했지만 모두가 돈을 잘 벌고 출세를 하는 것은 아니다.돈에 눈이 멀고 출세의 줄에 서기 위해 지금 이 순간 젊은 청춘 남녀들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고도 냉혹한 세파의 늪에서 헤어나올 줄 모른다.때론 가련하게 보이기도 하다.시대가 변하고 생각과 주의가 다르겠지만 불과 몇 십년 전의 동화와 수채화같은 어린 시절의 정경은 다소 불편했지만 그 삶 속에는 돈으로 해결해 줄 수 없는 인간다움의 정과 행복,연민,동정,공동체의 진정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어른이 되고 자식들을 기르는 입장에 서고 보니 어른들이 우리들을 위해 각고의 열과 성을 보여준 것에 십분의 일도 못따라 가는거 같다.그것은 돈으로 해결하려 하고 편하게 살려는 보신주의가 뇌리에 가득차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비위생적이고 비실용적인 것이 그 옛날엔 많았지만 지금의 삶은 주거와 삶의 양식,행태가 거의 획일적이고 계산적이며 물질과 힘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기준을 삼기에 지난 시절의 선조들의 지혜와 수고,자애심은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오늘날의 세태와 비교할 때 훨씬 값지고 영원하며 존귀한 것이 아닐 수가 없다.

 

지금은 어머니만 남으시고 모두 작고하셨지만 이 글을 읽으면서 내내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마을 이웃들의 동정(動靜),산하의 고요함,평화,순리,공동체의 삶,상부상조의 정신을 되살리게 되고 그 분들이 나에게 보이지 않은 고귀한 지혜와 인내,자비심을 주신 것에 대해 가슴 가득히 감사할 뿐이다.지난 시절의 우리의 것을 제대로 알아야 내일의 우리 사회의 모습이 제대로 흘러갈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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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民國을 꿈꾼 탕평군주
김백철 지음 / 태학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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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蕩平)이란 의미는 당파간의 격력한 정치적 알력(軋轢)을 해소하기 위해 모색되고 실천된 정책으로 당파간의 정치적 대립과 분쟁이 없이 소융(消融).보합(保合)을 이룬 상태이다.조선 27대 왕조 중에 탕평하면 영조가 떠오른다.아버지 숙종과 이복형 경종(재위 5년)의 뒤를 이은 연잉군 영조는 역대 왕조 중에서 최장수를 누린다.그의 치세 기간 중에 가장 으뜸인 것은 주공의 주례를 통한 민본의식과 각종 부조리한 제도 개혁,양역변통을 통해 국가의 위기와 난관을 실천적으로 극복하려 했다.'옥의 티'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임에 이르기까지 한 장본인이기도 하여 영조를 평가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성군 여부가 엇갈리기도 한다.


동인과 서인의 싸움이 발단이 되어 결국 사색당쟁으로 붕당정치가 횡행하면서 나라의 발전은 더디고 민생은 피폐화 되어 가기에 영조는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내세워 흐트러진 나라를 되살리고 민심을 보듬어 가는데 주력하였다.안으로는 세종의 문화정치를 받들고 밖으로는 주공의 주례를 받아 들였다.이를 바탕으로 각종 제도와 세제 개편,인사 정책 등을 앉아서 명령하는 형태가 아닌 실질적으로 두 팔을 걷어 부치며 발안과 정책을 진두지휘하게 되었다.그것이 바로 속대전,속오조례,균역법,중앙과 지방의 인재,인사 정책 등에서 엿볼 수가 있다.특히 인사 정책은 친히 성균관에 가서 시범 강의에 해당하는 시학례(視學禮)에서 주례를 진강하도록 했는데 주례의 근간은 국왕과 백성의 관계를 설정하는 중요한 대목인데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君以民爲天)라는 것으로 유교적 민본 의식의 표현을 제시했다.물론 이 표현은 그의 부왕 숙종때부터 있었으며 국왕과 백성간의 관계 설정의 배경에는 양역변통이 있었는데 양역문제의 심각성과 구황 대책을 거론할 때엔 이러한 백성관을 십분 이용했고 18세기 조선 사회의 내부 상황을 이해하는데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영조는 군역의 폐단을 보완하기 위해 종래 양민들로부터 받은 베 2필을 1필로 감하고 어염,선세를 추가로 균역청에서 관리하는 등 양민들의 고통을 완화하는 균역법도 설치하였다.대외적으론 국제 정세가 안정되어야 하고 외세의 침략 가능성이 현격히 줄어들고 북벌 논의도 중단되어야 하는데 다행히도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청나라가 안정되고 평화기가 도래한다.이에 18세기 조선 사회의 모습도 양정의 수도 변동폭이 안정화되고 환국이 종식되어 영조는 탕평정치를 일관성 있고 강도 높은 대개격으로 추진할 수가 있었으며 양역변통에 대한 논의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던 것이다.

 
영조는 이상적인 성인 군주 요순의 강조가 도덕성을 강조하는 듯 보였지만 요순과 동일시된 국왕은 초월적인 권력자로 재탄생했으며,이를 전재권력의 형성으로 변질되었으며,재위 전반기에 붕당 간 경쟁과 균형을 모색하면서 속대전의 편찬과 균역법의 탄생을 이끌어 냈지만 그의 건강 악화와 을해옥사 및 임오화변 등 정국변화에 밀려 국책 사업들이 소강 상태에 놓이게 된다.자신감에 찼던 영조도 뜻밖에 장수를 누리면서 새로운 동력을 찾아야 했고 국책 사업들을 재추진하기에 이르렀는데 대표적인 것이 동국문헌비고 편찬,서얼(庶孼)의 등용,비공(婢貢)의 폐지 등이다.이것은 국왕의 강력한 권위를 바탕으로 이룩된 성과물이다.


이복형 경종의 절대적인 믿음과 지원하에 탄생된 영조는 최장수의 재위를 누리면서 그가 꿈꾸던 민국의 이념을 절대화했으며 제도와 문화,세제,인사 정책에 이르기까지 절대권력으로 바꾸어 놓으려 했다.잘못된 제도를 개혁하고 백성을 하늘로 여기려 했던 그의 이념은 반대파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지만 끝까지 밀고 나가려는 의지와 실천력이 귀감이 된다.영조의 다양하고도 전방위적인 치세와 정책을 통해 그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탕평책과 균역법을 통한 신료와 백성에 대한 배려가 결국 잘 사는 조선을 꿈꾼 그의 신념과 정치철학이 아닐었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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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재발견 - 다산은 어떻게 조선 최고의 학술 그룹을 조직하고 운영했는가?
정민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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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석학이면서 수많은 저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선생에 대해 진귀한 자료와 그의 발자취를 간접 체험하는 계기가 되어 무엇보다도 다행이다.조선후기 천주교가 탄압과 박해를 받으면서(신유사옥) 형(정약전)과 함께 각각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그가 1801년부터 1818년까지 18년간 강진 유배시절 후학을 양성하고 승려 및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방대한 저술과 시첩 등을 엮어 내기도 하고 아끼는 후배에겐 아낌없는 조언과 지원이 있었다.또한 학파(기호학파와 영남학파)간의 대립도 엿보이고 그의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도 학문의 자질을 전승한거 같다.

이 도서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주로 다산과 그와 교유했던 분들의 시와 시첩이 오랜 세월과 함께 색이 바랬지만 그 학문적 가치는 높다고 생각한다.그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들을 찾아 나선 저자의 발품과 자료의 소지자들과의 끈질긴 교섭력의 결과물이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대표적으로는<매옥서궤>,<다산여황상서간첩>,<수종시유첩> 등의 자료가 있고 그림으로는 <매조도>와 <일속산방도>가 인상에 남는다.매조도의 경우는 그의 첩에 의해 태어난 자식을 그리워하면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다산은 강진 유배시절 강학과 제자 교육,사지 편찬과 불승과의 교유,공간 경영과 생활 여백,다산 일문의 행각과 낙수(落穗)가 주요 내용이다.교학 방식은 단계별,전공별,맞춤형,실전형,토론형,집체형으로 나뉘고 있는데 꽤 단계별,수준별 교육의 전형이라 보여진다.다산여황상서간첩에선 제자 황상에 대한 애정이 잘 나타나 있으며 배우는 사람의 자세로서 혜(慧),근(勤),적(寂)이 있어야 성취감이 있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또한 승려 초의,호의,하의 등 3명의 승려들은 성씨가 다산과 같은 정(丁)씨여서 아꼈는데 천대를 받던 불교보다는 자신과 같은 유학의 학문세계로 동참해줄 것을 권유하는 대목도 눈에 띈다.

다산의 부자론은 예나 지금이나 대동소이하지만 진정한 부자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데 옳은 일을 해서 이롭게 된 경우,옳은 길을 갔는데 손해가 된 경우,나쁜 일을 해서 이로움을 취한 경우,나쁜 짓을 해서 결국 해는 입는 경우를 들려주고 있다.대부분 둘째와 셋째의 선택을 두고 고민과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세상의 이치가 도덕군자가 아닌 이상 성실함보다는 성과를 중시하기에 세번째가 많지 않을까 싶다.나아가 다사나은 원포(園圃) 이를 테면 과수원이나 채마밭을 가꾸고 일구어 자급자족 및 판매로 인한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되도록 꼼꼼하게 들려주고 있고 가정에서의 아내의 역할(게으르지 않고 알뜰살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유배시절 아끼고 소중하게 여겼던 제자,승려들,후학들과의 교유와 그의 사후 맏아들 학연,추사 김정희,황상 등이 그를 기리고 학문과 우정을 나누는 시와 서간들이 세속을 벗어나 유유자적하고도 풍치있으며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는 소인묵객(騷人墨客)의 절정을 담대하게 보여주고 있다.형극의 길인 유배지의 생활이지만 다산은 조정에 대한 불만 및 원망보다는 자신의 학문세계를 초지일관 조직하고 운영하며,그와 주위 사람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밀착시켜간 점이 무엇보다 대인이라고 할 만하다.읽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 한국 간행물 윤리위원회 파워북로거 지원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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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년의 역신들 - 계유정난과 사육신
한국인물사연구원 지음 / 타오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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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사에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세상 물정과 경륜,정치관이 뚜렷하지 않아 대신 수렴청정을 하면서 어린 왕이 치세를 할만한 경륜이 되었을 때 비로소 국내의 모든 일을 관장할 수가 있었는데 왕위에 오르자 마자 나이가 어리고 정사를 제대로 이끌어 가지 못할거라는 의구심과 영웅심이 발동하여 나이 어린 왕을 배척하고 유배시키며 자살로 생을 마감케 했던 인물이 조선 7대조 세조이다.그가 바로 수양(首陽)대군으로 세종의 아들이었고 비운의 왕 단종(端宗)의 숙부이기도 했던 그는 1453년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의 숙적이었던 김종서와 안평대군(그의 아들까지)을 자객을 시켜 제거하고 유배보내기도 하는 등 세조는 탄생과정이 찬탈이고 피로 얼룩졌다고 보여진다.

일명 계유정난이라고 일컬어지는 단종 제거 및 유배는 조선 정치사에서 비극중의 비극이다.세조는 단종으로부터 옥새를 받고 중국 명과의 사대교린을 지키며 명으로부터 정치적 인정을 받으며 조선 왕조 7대 왕으로 13년간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기도했던 것이다.

어린 단종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면서 한많은 세월을 보내고 노산군으로 강등되는 등 치욕과 굴욕을 삼켜야만 했다.과연 단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문제점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수양대군 개인의 입신출세라는 명예와 권력욕에 다름 아닐 것이다.단종이 유배 생활을 하는 가운데 왕권의 정통성를 잇고 국가의 체모를 제대로 수립하기 위해 단종 복위에 앞장선 인물들이 바로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이다.단종 복위에 조금이라도 가담한 인물은 태형 및 변방의 노비로 보내버리고 주모자들은 거열형에 처하는 등 극형을 일삼았다.

* 사육신 : 성삼문,박팽년,하위지,유성원,유응부,이개

* 생육신 : 김시습,원호,조여,남효온,이맹전,성담수

단종 복위를 적극 제거하기 위해 정난공신이 있었으니 그들이 한명회,권람 등이다.특히 한명회는 난세의 인물로서 30대 후반에 권람에 의해 말단 공직에 부임하고 말년에는 이조판서까지 역임하는 등 권력의 요람을 왔다 갔다 했던 인물이고 죽어서는 부관참시라는 비극을 맞이하기도 했다.세종조 집현전에서 학문을 쌓기도 했던 성삼문 등은 세조의 눈에 가시가 되어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던 것이다.노산군은 세조의 사사의 명이 알려지면서 결국 쓸쓸히 청렴포에서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게 되고 그를 따르던 시종과 궁녀들은 단종의 죽음을 쫓아 동강의 금강정 절벽에서 몸을 던짐으로 써 충성을 다했던 것이다.

단종이 죽고 244년이 흐른 (1701년) 숙종에 의해 단종 복위가 이루어지고 단종에 대한 명예가 회복된다.다만 이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남효온에 의한 육신전과 조선왕조실록의 비교표에는 약간의 차이가 발견된다.예를 들어 단종의 왕위 등극시 나이를 육신전은 16세,조선왕조실록은 13세로 기록되어 있고 김문기를 사육신에 넣어야 될지 말지가 확실하지 않은 상태이다.이는 사료와 기록에 의한 깊은 고증과 방증이 필요할 것이고 사학자 및 연구자들의 객관적인 결과를 기대해볼 뿐이다.

세상 경험이 부족하고 철이 덜든 단종은 문종의 적자로서 당당히 왕위에 올랐지만 불행하게도 숙부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단종 복위 운동에 노산군(단종)도 연루되었다고 확정짓고 세조의 치세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그를 사사하려 했고 그는 사약을 받는 대신 차라리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단종의 비애이고 운명이 아닐까 한다.사필귀정이 통했던 것일까,단종은 다행히도 숙종에 의해 복위가 결정되고 명예가 회복되어 그에 대한 시시비비가 가려지게 된 것은 역사를 바르게 세우려 했던 생.사육신의 노력과 바른 역사를 세우기 위한 후학들의 노력의 결정체가 아닐까 한다.어린 나이로 괄시받으며 유배까지 가야만 했던 비운의 단종의 모습이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는 그의 한(恨)과 시름이 녹아져 있는것만 같다.

* 한국 간행물 윤리위원회 파워 북로거 지원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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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이 품은 한국사 네 번째 이야기 : 서울.경기도 편 지명이 품은 한국사 4
이은식 지음 / 타오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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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의 유래와 역사,문화를 알게 되면서 자연스레 그곳의 전설과 풍물,인물들을 구체적으로 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이은식저자의 도서는 두번째로서 읽으면 읽을 수록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지역의 지명과 유래,역사,문화를 새롭게 다져가는 시간이 되었고 서울.경기도편을 통해 한반도의 중심 역할과 풍수지리사상,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의 삶과 사상등도 알게 되었다.지명에는 역사가 숨 쉬고 있기에 사라진 풍속이나 생활 습관까지도 엿볼 수가 있고 고유 지명만이 갖고 있는 향취와 멋도 느낄 수가 있었다.

서울의 남태령의 유래부터 까마귀를 닮은 섬 오이도에 이르기까지 고유 지명은 만든 사람부터 전설과 인물들의 발자취가 물씬 풍겨져 옴을 알게 되었는데 고려와 조선시대에 지명이 대부분 만들어지고 당대 임금과 지체 높은 관료들의 입김과 풍수지리에 의한 지명 만들기도 눈에 띈다.그만큼 조선시대에는 풍수지리학을 중시하고 한양이라는 곳도 풍수지리학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영화감독 및 배우였던 나운규의 성북구 아리랑 고개를 보더라도 고려시대 김부식의 <삼국사기>이 아리라(阿利那)는 길다라는 아리와 물이라는 라가 합쳐져 만들어졌는데 농경민족이었던 한반도가 '아리라'문화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역사의 한 시대를 풍미하다 살다 간 관료와 위인들의 업적과 이와 관련한 문화적 가치,풍속등이 지명과 깊게 연관되어 있고 당대의 사건과 비화에 얽힌 것들도 많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지명은 단순히 지역의 이름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전설과 사상,(역사적)사건과 이를 극복하려는 주술적 신앙등도 내재되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지명을 쉽게 구별하고 파악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것에 대해 관심과 애정이 어린이들에겐 과연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지명의 유래에 얽힌 역사적 사건과 위인들의 업적,당시의 풍습과 사상들을 자연스럽고도 주체적으로 배워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한자문화권에 있는 한국문화의 정서상 한자어를 갖고 있는 지명에 대해 정확한 한자어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이를 자랑스럽게 오래도록 유지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또한 서울과 경기지역의 지역명과 유래등을 자세하게 풀이하고 이를 역사적 사건과 사상,위인,관료들과 연관지어 서술한 점이 역사공부에도 크게 유용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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