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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백과사전을 읽는다 - 오래된 지식의 숲,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철 지음 / 알마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지봉유설과 성호사설은 조선의 정신적 지주이고 정체성을 띤 성리학의 세계에서 새로운 사회를 요구하는 현실적 필요와 관련되고 당대에 관한 개혁사상과 열정을 담고 있다.다만 절대 권력을 쥐고 있던 왕조와 강력한 관료체제의 그늘에서 지봉유설과 성호사설은 새로운 사상을 지탱하고 실천할 만한 개혁 사상가들이 출현할 수 없었던 한계를 지니고 있다.지봉유설을 씨줄고 삼고 성호사설을 날줄로 삼은 이 도서는 조선시대 당대의 각분야의 속살들이 살아 꿈틀거리는거 같다.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평가받는 지봉유설과 뒤를 이은 성호사설은 동일한 성격을 띠고 있는 18세기 채기지만 형식과 구성,편집 방식,내용 서술 방식 면에서 완전무결한 백과사전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사물과 지식을 그 속성에 따라 분류해 기록한 책'으로서 유서(類書)로 불리고 저자의 해설이 담겨 있기에 유설(類說)이라고 한다.이러한 유서는 중국에선 여씨춘추가 가장 오래되었고 조선에선 명종조 어숙권이 편찬한 고사촬요(攷事撮要)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이수광이 살다 간 시대는 정치,사회적으로 격동기에 있었다.1592년의 임진왜란과 1627년 정묘호란이 있었던 시기였으며 나라와 민생을 위해 노력하면서 무실(務實)에 힘썼다면 이익은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에게 세력을 빼앗긴 아버지(이하진)는 남인으로 진주로 좌천,유배되고 둘째 형마저 경종의 세자책봉 문제로 상소를 올렸다가 노론과 숙종의 분노를 사게 되면서 아버지,형을 잃게 되면서 과거와 입신양명을 접고 은거 생활을 하게 된다.
해제를 보면 지봉유설(芝峯類說)은 3,475 조목에 기록한 내용이 고서나 견문에서 나온 것은 출처를 밝혔으며 인용한 서적은 육경 이하 근세의 소설과 문집을 합쳐 348가(家)이다.이에 비해 성호사설은 경서를 연구하면서 논어,맹자질서(疾書) 등을 담은 책들을 지었는데 이런 분류에 들어가지 못한 글만 모은 것이 성호사설(星湖僿說)이며 사(僿)는 자질구레하다의 의미라고 한다.성호사설은 천지문,만물문,인사문,경사문,시문문으로 분류하고 있다.모두(冒頭)에 밝혔듯이 전자를 씨줄로 후자를 날줄로 하여 천지의 고증,사회 풍속,실학의 관점에서 본 역사,선비됨과 학문의 세계,음식 문화 등이 당대의 사상과 관념을 잘 반영하고 있다.지봉유설에는 '천주실의'를 간단히 소개하면서 중국의 지식인과 서양의 지식인의 문답 형식의 대화체를 실어 놓음으로써 실학사상의 면모를 알아차릴 수가 있다.또한 성호학파로 불리는 이익의 제자중에는 서학은 긍정하지만 천주교는 비판한 자도 있고 이 둘을 모두 수용하려던 이들도 눈에 띤다.대표적인 사람이 이벽,정약용,이승훈,권철신이다.
조선의 대표적 유학자였던 이수광과 이익은 이들의 저서가 학문과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객체라는 점에서 두 저서는 유학자로서의 입장이 다분하며 그 체계는 지봉유설의 경서부와 성호사설의 경사문에 잘 나타나 있다.지봉유설의 3,433개의 기사 중에 경서부에 실린 것은 348개이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호사설에는 3,007개의 기사 중 경사문에 실린 기사는 1,048개로 약 1/3가량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경전에 대한 해석보다는 유하가로서 당시의 학문 풍토를 비판하고 학문하는 자세를 밝힌 대목들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과학적인 학설과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어서인지 내용이 중국의 동양사상과 철학,신화 등의 요소가 색채가 짙다는 생각이 든다.예를 들어 무지개는 동물이 만든다,해먹는 두꺼비와 달 먹는 까마귀,우레는 땅속의 용이 만든다 등이다.그 중에서 재미와 흥미를 끌어 당기는 것은 오묘(奧妙)한 십간십이지의 세계이다.십간과 십이지는 이미 알고 있지만 소문(素問)에서 밝히고 있는 십간은 갑은 만물의 시초,을은 만물의 소멸,병정은 만물이 명확하면서도 강렬한 모습,무는 무성함,기는 만물이 생동의 기운이 소멸의 기를 누르고 일어남,경은 다시 고침,신은 만물이 무성하게 결실을 맺어 새롭게 이룸,임계는 만물이 스스로를 드러나지 않게 감추고 그 자리에서 술에 따라 새생명을 잉태하여 싹을 틔운다고 하며,십이지도 흥미로움을 더하고 있다.P141하단에서 P142상단 부분
성리학과 유교가 지배적인 국체였던 조선 후기에 이수광과 이익은 경서부와 경사문을 기초로 조선사회의 풍속과 실학 사상의 맹아의 단초 등이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내용 면면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수광과 이익의 해설도 빼놓을 수 없다.그들의 사상과 의지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이러한 실학 사상이 실행으로 옮겨질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과 한계로 국가의 발전이 더디게 흘러갔지만 분명 두 유학자는 당대보다는 보다 나은 조선 사회의 모습과 발전을 갈구하였고 그 의지와 열정의 결실이 지봉유설과 성호사설에 씨줄과 날줄로 잘 교직되어 후대 실학자들의 사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