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엄상궁의 천하 마지막 황태자 1
송우혜 지음 / 푸른역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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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끔은 줄서기를 잘해야 하고 운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물론 실력과 능력,재주까지 겸비한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말이다.빈자리가 생기면 운이 좋게 그 빈자리를 채워 주고 채워진 빈자리가 빛이 나게 되어 후세에 많은 이들로부터 칭송과 존경을 받는다면 그 이름 석자는 오래도록 후세에 길이 남으리라.

 

 

 

 조선의 구한말의 사회상과 정세는 풍전등화의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19세기말 서양의 개방압력과 신진인사들의 개혁세력들의 삼일천하,국내의 재정파탄과 청일전쟁과 삼국 간섭으로 조선은 말그대로 유교와 관료들의 무능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오리무중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일본은 삼국간섭(러.독,청)과 절대적인 권력의 좌를 쥐고 있으며 그들의 방해 세력의 장본인 명성왕후를 제거해야만 하는 절명의 상황에 놓이게 되고 미우라고로를 위시로 한 낭인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육을 당하고 야산에 석유를 뿌리고 한 줌의 재로 만들게 한 국치를 맞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과 명성왕후 아들 이척(순종)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 대는 허수아비꼴을 보여주게 되는데,엄상궁에 의해 고종을 경복궁에서 탈출시키려 춘생문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며 결국 고종은 아관파천에 의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잠시 피신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처참하게 죽은 명성왕후는 죽은 뒤 2년 후에 시신도 없는 상태에서 장례식이 치러지게 되며 상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고 고종의 마음을 잘 아는 엄상궁은 고종의 지밀상궁이 되어 아들 이은(영친왕:1897년)을 낳게 된다.

 

 

 1897년이 되면서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칭하게 되고 어린 이은(여덟살 때)은 엄상궁의 치밀한 의모와 계획하에 고종의 뒤를 잇고 왕세자비를 간택하게 되는데 그 간택 대상에는 <백년의 한>으로 유명한 민갑완씨도 포함되는데 그녀가 말하는 영친왕과의 간택 일지와 사료와는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지밀상궁이 된 엄상궁은 명실공히 황제의 부인이 되었기에 위세당당하게 천하를 호령하는 모습으로 정치감각과 권력욕,두둑한 뱃심과 사람의 심리를 움직이는 투시력마저 겸비하게 되지만 을미사변(을사늑약)에 의해 모든 권리를 빼앗긴 조선은 일본의 통치권에 들어가게 되고 영친왕은 일본의 정략에 의해 이토히로부미에 의해 강제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다.

 

 비록 어린 나이에 애기 시녀로 궁에 들어와 최고의 지밀 상궁까지 올라갔지만 국세가 기울어가고 일본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게 되면서 그녀의 야심찬 권력의 기도는 물거품이 되고 고종의 후궁으로서 고종을 잘 보좌하고 재물도 챙기는 힘과 권력을 한시대 누렸던 여걸로 인식된다.그녀는 천자를 옆에 끼고 제후를 호령하여 부린다는(挾天子以令諸侯) 것으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로 평가받지만 그녀가 아끼던 아들 이은을 멀리 떠나 보내고 마음 고생,화병이 얼마나 났을까를 생각하면 아련하고도 나라 잃은 서글픈 마음마저 내 마음을 휘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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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조선 최고의 사상범 - 한 천재의 혁명이 700년 역사를 뒤바꿔버렸다
박봉규 지음 / 인카운터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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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비정하다.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되기도 하고 오늘의 아군이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사실이다.다만 백성과 나라를 위한 기본 정치철학이라도 제대로 갖추고 행세를 한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현실 속에서의 정치꾼들은 그마저도 망각한 채 사리와 허울좋은 명예만을 추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합집산하는 모습이 참 꼴불견이다.제대로 국가의 안위와 민복을 위해 힘쓰는 자가 국사이래 얼마나 되는가는 조선의 개국 공신 정도전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그의 사상과 정치철학을 통해 인식하고 이해하며 공감하는 계기가 되어 다행이다.

 

 

조선을 개국하면서 이성계에겐 하륜과 정도전이 수족으로 든든하게 받쳐 주는데 정도전은 역성혁명을 통해 조선의 모습을 고려의 귀족정치와는 다르게 민본위주의 백성을 섬기는 정치철학을 내놓는다.그는 중국의 주례에 담겨 있는 성리학을 기본으로 탕평정치의 구현에 힘쓰게 되는데 그의 정치이념과 철학의 발목을 잡는게 바로 이방원 세력이다.이성계의 아들로서 그는 정치권력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뿐 백성의 삶을 위한 기본제도와 틀 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이성계의 눈에 벗어난 아들이었기에 방석을 세자로 앉히려는 의도가 정도전의 생각과 일치가 되었던 것이다.이미 방석이 세자책봉이 이루어지고 세자 교육을 정도전 자신이 맡고 있던 상황에서 이방원은 좌불안석이었을 것이다.

 

 

정도전은 고려시대 번창하였던 사원과 승려들이 나라를 좀 먹는 한량쯤으로 생각하고 불교를 철저하게 배척하였는데 그의 저서 <불씨잡변>에 잘 나타나 있다.특히 정도전은 백성의 경제적 곤궁과 핍박을 제대로 알고 경제생활을 풍족하게 해주며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향상시키기 위해 농업생산의 증진,세금 균등,국가재정의 충실,가난한 백성에 대한 구휼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또한 그는 왕권중심의 정치를 기본으로 하되 재상정치(현재의 내각제)를 통해 신권을 강화하고 각분야에 대해 왕이 신들을 신임하며 소신있게 국정을 운영하기 위해서 재상정치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던 것이다.나아가 그는 구체적으로 전제개혁 즉,토지제도의 개혁을 통해 계민수전의 원칙에 따라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서 몰수하여 인구수에 따라 균등에게 분배하고 전 국민을 자작농으로 만들자는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정도전이 내세웠던 주요 골자인 민본위주,재상정치,토지개혁 등이 현대 정치에 접목하면 상당히 좋은 점도 있고 시대와 국민의 정서에 맞지 않은 점도 있지만 그가 내걸었던 개혁의 기치는 참신하고 백성의 신망을 사기에 충분하다.결국 그는 57세에 이방원파에 의해 살해되고 그가 꿈꾸었던 고토(古土) 요동수복의 꿈도 무위로 돌아가고 우리 땅이 한반도로 고착되는 국운을 맞이하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고려의 잘못된 제도를 새롭게 뜯어 고치고 백성들을 하늘처럼 섬기려 했던 개혁 사상가 정도전의 꿈이 <조선왕조실록>,<조선경국전>,<삼봉집> 등에 의해 각색되었지만 그의 이념과 사상은 본받을 점이 많다.무엇이 나라를 위하고 어떻게 하는게 백성들을 위한 참된 정치인지를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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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백과사전을 읽는다 - 오래된 지식의 숲,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철 지음 / 알마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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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봉유설과 성호사설은 조선의 정신적 지주이고 정체성을 띤 성리학의 세계에서 새로운 사회를 요구하는 현실적 필요와 관련되고 당대에 관한 개혁사상과 열정을 담고 있다.다만 절대 권력을 쥐고 있던 왕조와 강력한 관료체제의 그늘에서 지봉유설과 성호사설은 새로운 사상을 지탱하고 실천할 만한 개혁 사상가들이 출현할 수 없었던 한계를 지니고 있다.지봉유설을 씨줄고 삼고 성호사설을 날줄로 삼은 이 도서는 조선시대 당대의 각분야의 속살들이 살아 꿈틀거리는거 같다.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평가받는 지봉유설과 뒤를 이은 성호사설은 동일한 성격을 띠고 있는 18세기 채기지만 형식과 구성,편집 방식,내용 서술 방식 면에서 완전무결한 백과사전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사물과 지식을 그 속성에 따라 분류해 기록한 책'으로서 유서(類書)로 불리고 저자의 해설이 담겨 있기에 유설(類說)이라고 한다.이러한 유서는 중국에선 여씨춘추가 가장 오래되었고 조선에선 명종조 어숙권이 편찬한 고사촬요(攷事撮要)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이수광이 살다 간 시대는 정치,사회적으로 격동기에 있었다.1592년의 임진왜란과 1627년 정묘호란이 있었던 시기였으며 나라와 민생을 위해 노력하면서 무실(務實)에 힘썼다면 이익은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에게 세력을 빼앗긴 아버지(이하진)는 남인으로 진주로 좌천,유배되고 둘째 형마저 경종의 세자책봉 문제로 상소를 올렸다가 노론과 숙종의 분노를 사게 되면서 아버지,형을 잃게 되면서 과거와 입신양명을 접고 은거 생활을 하게 된다.

 

해제를 보면 지봉유설(芝峯類說)은 3,475 조목에 기록한 내용이 고서나 견문에서 나온 것은 출처를 밝혔으며 인용한 서적은 육경 이하 근세의 소설과 문집을 합쳐 348가(家)이다.이에 비해 성호사설은 경서를 연구하면서 논어,맹자질서(疾書) 등을 담은 책들을 지었는데 이런 분류에 들어가지 못한 글만 모은 것이 성호사설(星湖僿說)이며 사(僿)는 자질구레하다의 의미라고 한다.성호사설은 천지문,만물문,인사문,경사문,시문문으로 분류하고 있다.모두(冒頭)에 밝혔듯이 전자를 씨줄로 후자를 날줄로 하여 천지의 고증,사회 풍속,실학의 관점에서 본 역사,선비됨과 학문의 세계,음식 문화 등이 당대의 사상과 관념을 잘 반영하고 있다.지봉유설에는 '천주실의'를 간단히 소개하면서 중국의 지식인과 서양의 지식인의 문답 형식의 대화체를 실어 놓음으로써 실학사상의 면모를 알아차릴 수가 있다.또한 성호학파로 불리는 이익의 제자중에는 서학은 긍정하지만 천주교는 비판한 자도 있고 이 둘을 모두 수용하려던 이들도 눈에 띤다.대표적인 사람이 이벽,정약용,이승훈,권철신이다.

 

조선의 대표적 유학자였던 이수광과 이익은 이들의 저서가 학문과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객체라는 점에서 두 저서는 유학자로서의 입장이 다분하며 그 체계는 지봉유설의 경서부와 성호사설의 경사문에 잘 나타나 있다.지봉유설의 3,433개의 기사 중에 경서부에 실린 것은 348개이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호사설에는 3,007개의 기사 중 경사문에 실린 기사는 1,048개로 약 1/3가량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경전에 대한 해석보다는 유하가로서 당시의 학문 풍토를 비판하고 학문하는 자세를 밝힌 대목들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과학적인 학설과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어서인지 내용이 중국의 동양사상과 철학,신화 등의 요소가 색채가 짙다는 생각이 든다.예를 들어 무지개는 동물이 만든다,해먹는 두꺼비와 달 먹는 까마귀,우레는 땅속의 용이 만든다 등이다.그 중에서 재미와 흥미를 끌어 당기는 것은 오묘(奧妙)한 십간십이지의 세계이다.십간과 십이지는 이미 알고 있지만 소문(素問)에서 밝히고 있는 십간은 갑은 만물의 시초,을은 만물의 소멸,병정은 만물이 명확하면서도 강렬한 모습,무는 무성함,기는 만물이 생동의 기운이 소멸의 기를 누르고 일어남,경은 다시 고침,신은 만물이 무성하게 결실을 맺어 새롭게 이룸,임계는 만물이 스스로를 드러나지 않게 감추고 그 자리에서 술에 따라 새생명을 잉태하여 싹을 틔운다고 하며,십이지도 흥미로움을 더하고 있다.P141하단에서 P142상단 부분

 

성리학과 유교가 지배적인 국체였던 조선 후기에 이수광과 이익은 경서부와 경사문을 기초로 조선사회의 풍속과 실학 사상의 맹아의 단초 등이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내용 면면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수광과 이익의 해설도 빼놓을 수 없다.그들의 사상과 의지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이러한 실학 사상이 실행으로 옮겨질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과 한계로 국가의 발전이 더디게 흘러갔지만 분명 두 유학자는 당대보다는 보다 나은 조선 사회의 모습과 발전을 갈구하였고 그 의지와 열정의 결실이 지봉유설과 성호사설에 씨줄과 날줄로 잘 교직되어 후대 실학자들의 사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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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직업의 역사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8
이승원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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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은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기본이기에 일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무엇을 어떻게 하여 살아갈지는 각자의 능력과 재주에 따라 달라지기에 들어오는 수입도 다양할 것이다.부모가 물려준 재산이 많아 힘들이지 않고도 거뜬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하루 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눈물겹도록 처절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그 먹고 사는 문제가 자신 앞에 놓여진 일종의 일거리이고 직업일 것이다.일을 해야 먹고 살 수가 있고 보람을 느끼며 그 속에서 나와 가족,사회를 위해 사명감도 느낄 수가 있고 나아가 명예와 권력까지 제대로 지킬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어릴 적 보았던 부모님과 주위 사람들,선생님들이 일하던 모습은 몸으로 하느냐 머리를 쓰는 정신적 노동이냐로 구분하여 직업의 세계를 어느 정도 인식하고 이해했던거 같다.나를 낳아 준 부모님은 더 나은 직장,삶,수입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논과 밭으로 일을 하러 나갔고 때론 객지에서 이런 저런 장사를 하면서 생계에 힘쓰기도 했고 물질적 유산을 남겨 주려 힘쓰던 시절을 기억한다.지금이야 먹고 사는 문제를 떠나 자신의 계발과 여가 선용,취미 활동 등에 치중하는 현대 부모들과 비교하면 그 옛날 부모님들은 손과 발,몸을 이용한 육체적 노동이 주를 이루었으며 그 삶이 참으로 아등바등하지 않았을까 싶다.그렇게 헌신적이고 자애로운 젊은 날의 노력과 고통이 여생엔 은혜가 넘치는 복으로 보답이 되어야 하겠지만 시대가 바뀌어 더 많은 돈과 물질을 요구하고 숭상해버린 탓인지 부모와 자식간의 온기 넘치는 정과 유대는 식은밥마저도 못한 처지가 되버리고 만거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한국의 구한말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잠깐 나왔다가 사라져 버린 직업의 세계는 내가 듣고 보고 느낀 직업도 있지만 생소하게 다가오는 직업도 있다.직업은 한 사회의 지배적인 욕망의 배치와 경제적 매커니즘을 대변하는 것이다.또한 어떠한 직업이 사라졌다해도 그 직업에 대한 욕망이 사라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 글에서 소갷는 직업세계는 조선이 기울어가고 조선총독부에 의한 피지배에 놓여 있던 당시의 일상 풍경과 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가 있다.즉,전화교환수,변사,기생,전기수,유모,인력거꾼,여차장,물장수,약장수를 들고 있는데 전화교환수,유모,약장수,차장은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보고 듣고 겪었던 직업이다. 전화 손잡이를 돌려 교환수에게 전화 신청을 하고 엄마를 일찍 여의고 젖이 모자라 젖동냥을 하던 이웃,노천 극장에서 영화 및 연극이 상연되기 전 으례 약장수의 신명나게 선전하던 약장수의 기세,초.중시절 통학시절 콩나물 시루보다 더 빽빽하게 손님들을 밀어 넣고 "오라이"하던 차장의 억세고 당당한 목소리는 지금은 희미한 기억과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삶의 흔적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나오는 직업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그들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원튼 원치 않든 권력자의 노리개감이 되기도 하고 낮은 일당에 분노가 일어 요즘말로 노동 조합을 결성해 총독부에 저항의 표시를 분출하기도 했다.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은 인력거꾼 김첨지의 기구하고도 눈물겨운 스토리는 당대 서민들의 밑바닥 삶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또한 '북청 물장수'로 유명한 물장수 이야기는 식수로 사용 가능한 우물이 부족하여식수를 조달하기 위한 물장수가 새벽바람을 가르고 물을 퍼날랐던 것이다.

 

 

물질문명과 과학의 발전으로 힘들고 대접을 받지 못하는 직업은 하나 둘씩 사라지고 새롭고 편리하며 삶의 윤기와 풍요를 더해 주는 직업으로 대체해 오고 있다.인류의 조상이 후손을 이어나가듯 직업의 변천도 흔적과 무늬를 더해 가면서 우리 조상들이 삶을 꾸려 나갔던 시절을 반추해 보면서 현대인의 자화상까지 들여다 볼 수가 있는 사라진 직업은 눈과 귀로는 접할 수가 없지만 눈을 감고 회상하면 그 시절 일반인의 삶의 애환을 휘감았던 직업들의 명암이 교차되어 온다.한국의 근대 문화와 일상의 상징적 풍경을 직업으로나마 간접체험해 볼수가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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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최후의 숨결
에밀 부르다레 지음, 정진국 옮김 / 글항아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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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구한말 조선에 대한 서양세력의 침략과 그들의 각축장이 되었던 대한제국의 모습을 4년여의 기간 조선 각지를 누비고 보고 들은 것을 사진과 함께 멋지게 기록해 놓은,프랑스의 철도 기사 에밀 부르다레의 글을 읽으면서 기울어 가던 대한제국의 정황과 민초들의 생활 모습,외세의 역풍등을 알게 되었다.또한 역사서라고 하면 흔히 왕족 중심의 정사를 다룬 실록이나 편년체가 아니라,외국인의 눈으로 직접 그려 놓은 글이라 신뢰성과 함께 조선말기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좋은 사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프랑스 철도와 광산 개발에 관련된 기술자문,프랑스어 학교에서 일하는 가운데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하니,광산 개발에 따른 이익권을 쟁취하기 위한 관련국의 이권다툼,프랑스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학동들의 생각,꿈,희망등을 읽어 갈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당시 조선은 '은자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서양 제국들에게 알려 지지 않은 봉건적이고 조상을 숭배하는 유교 국가였기에,외부 세력과의 개방과 개혁적인 사상보다는 내치를 다지고 기울어가는 국권을 다스리는데 몰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또한 그가 조선을 여행하고 떠날때쯤에는 불행한 역사,을씨년스러웠던 을사늑약이 체결된 해이기도 해서,이 도서를 읽으면서 참으로 마음이 어둡고 아팠다.

사진으로 보는 구한말의 각지의 모습도 아련하고 조상들의 삶의 흔적과 숨결이 물씬 전해져 옴을 느끼게 되었고,선조들의 일상과 국운이 마치 회색빛에 물든 나머지 금방이라도 소각되어 없어질 듯한 아찔함도 있었고,너무나도 세상 물정 모르는 순박한 백성들의 웃는 모습,서양인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모습등이 닫혀 있던 쇄국의 분위기를 더욱 자아내게 하였다.

개항초의 제물포항구의 초가집들,적산 가옥들,바다위에 떠있는 돛단배의 한적한 모습들,서대문의 위용과 프랑스 공사관을 두고 멀찍이 보이는 목멱산,남산의 자태,쓰개치마를 입고 어디론가 총총히 걷는 아낙네의 모습,상투와 수염을 기른 장정들의 거무잡잡하고 생기잃은 모습,꽃상여를 이끌고 망자의 넋을 위로하는 장례식 모습,서낭당과 무당들을 통해 잡귀와 행운을 기원하는 샤머니즘의 사상등이 익숙한 장면이면서도 그 시절의 일반적인 살아가는 방법이고 모습이었던 거같다.

  저자 에밀 부르다레는 서울부터 시작하여 기차를 타고 제물로 가고,다시 송도의 일상의 모습을 남겼으며,서북부의 도읍지 평양의 모란봉과 금강산 유점사등을 통해서 명승지와 고적지를 읽어 갔을 것이며,마지막 여정 바람,물,여자가 많은 제주도의 모습을 남기고 있다.

국운이 쇠하여 가고 민초들의 삶도 그다지 밝지 않았지만,조상들의 일상은 순박하고 남을 해코지 않는 착한 사람들이었던 거같다.다만 양반과 상민은 존재했으리라.말을 탄 양반의 단정하고 말쑥한 옷매무새가 옆에서 시중들고 양반의 비위를 맞추며 길 떠나는 이들의 표정과 옷매무새는 너무나도 상이함을 느끼게 된다.

어둡고 힘들었던 그 시절의 객관적인 여행 에세이를 진흙 속에서 진주를 캔듯,내 마음은 참으로 흡족했다.지나간 우리의 역사를 투명하고 실재적으로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고,이러한 자료를 오래도록 소장하고 자식들에게도 물려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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