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이 품은 한국사 세 번째 이야기 : 서울.강원도 편 지명이 품은 한국사 3
이은식 지음 / 타오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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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관련 도서를 읽다보면 지명과 인명이 많이 나온다.지명과 인명 모두가 한자어로 표기가 되다보니 뜻과 음을 제대로 알아야 지명에 담긴 의미,유래가 확실하게 다가오고 인명에 담긴 의미를 통하여 그 사람이 살아가는 향방을 유추해 볼 수가 있어 흥미도 있고 뜻을 제대로 알기에 이해력이 배가 된다.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지역과 지명은 역사와 유래가 있으며 모두가 한자어로 되어 있어 한자어에 관심과 애착이 있는 나에겐 '지명이 품은 한국사'를 읽으면서 해당 지역의 지명과 역사적인 사건,인물들의 행적,고사,전설,신화등을 골고루 알게 되어 무척 의미있는 독서시간이 되었다.

저자의 해박하고도 경륜있으며 꼼꼼한 사료조사,탐문등을 통한 지명이야기는 조상들의 숨결과 지혜,외적으로부터의 액막이,위인들의 통찰력,해당지역의 위인들의 고사(故事)등이 한데 어우러져 학습적인 효과도 충분하다고 보여진다.서울과 강원도편으로 나뉘어진 이 도서에서는 대개가 조선시대에 지명이 확정되어지고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1914년) 일본식으로 지명이 바뀌게 되면서 고유의 지명이 외세에 의해 보이지 않는 수탈을 겪는다.해방이 되고 지역민들의 이해관계,행정부서의 조정으로 인해 지명이 왔다갔다 하는 경우도 눈에 띈다.

내가 서울사람은 아니지만 서울에 근20년을 살다 보니 이정표 및 간판등에 실린 지명등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 도서를 통하여 꽤많은 지식을 얻은거 같아 다행이다.예를 들어 주교(舟橋)동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뵈러 가던 다리라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강원도 철원군 월정(月井)리는 아버지의 병구완에 정성을 다한 효녀를 달이 소원을 들어줬다는데서 유래가 되었고 일부 지역은 외세를 지키며 명성을 떨친 위인들 이름을 따서 도로명을 지었다고 한다.어찌되었든 역사와 시대를 함께하고 있는 지명은 단순하게 지어진 것이 아닌 당대 지성인들의 통찰력과 혜안,지혜가 담긴 것이기에 새삼 우리 고유의 지명을 잘 보전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궁류시로 친국을 당한 권필과 6.25전쟁시 부상으로 죽을 위기에서 살아난 윤성민장군의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지명과 사람 사이의 훈훈한 인간미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 되었다.인간은 짧은 삶을 살다 가는 존재이지만 인간이 남긴 지명과 동명,인명은 나라가 없어지지 않는한 오래도록 역사의 흐름과 함께 흘러가리라는 생각을 해보며 한국역사 속에 살아오고 있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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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황혼 - 대한제국 최후의 1년
정진석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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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아니땐 굴뚝에 연기나랴’라는 말이 생각이 난다.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있기 마련인데 100년 경술국치 전후를 하여 조선의 국내 상황과 국제 정세를 비교해 보면 조선의 위정자,관리,민초들 모두가 하루 죽도 먹지 못하고 신음신음 해가는 사람들의 누렇게 뜬 모습을 연상할 수가 있는데 정조대왕의 승하후 왕권의 부패와 조정 대신들의 자기 잇속 챙기기에 혈안이 된 나머지 서양의 선진 문물과 개혁의 가속화를 달리고 있던 일본에게 나라를 넘겨주는 불행한 과거가 있었음을 통렬하게 인지하고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미래의 한국을 밝고도 신명나게 해 나가야 함을 느끼게 한다.

 242편이라는 각 분야에 걸쳐 사료에 입각하여 고찰하여 정리 기록한 ’제국의 황혼’을 읽다 보면 역사는 늘 깨우친 자들이 많아야 하고 한 국가를 리더하는 최고 실권자는 아래사람의 진솔한 의견에 귀 기울일줄 아는 겸허한 마음과 수용의 폭이 넓은 인물이어야 함을 느끼게 한다.1860년대 이후 서양은 ’은둔의 나라’조선에 개화의 압력을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하지만 철옹성마냥 굳게 닫혀 있던 조선의 문은 결국 1876년 일본과 불평등 수호조약으로 이어지며 1880년대 일본 유학파 및 개화파에 의해 개혁의 물꼬를 트려고 하지만 고종의 수하에 있던 수구파들에 의해 좌절되고 고종은 앞날을 한치도 내다볼 줄 모르는 상태에서 민비시해를 겪으며 아관파천에 의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치욕의 피신을 하게 된다.

 1900년대에 이르러 국권은 점점 기울어가고 자신의 이익만 챙기려 드는 조정 대신들의 이해와 일본의 교묘한 병탄 작업이 맞물려 1905년 을사늑약이 이루어지게 된다.을씨년스러운 국내상황이 어두운 그림자로 드리워지고 외세와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서양은 조선이 일본에 먹히는 상황에 안쓰럽고 동정스러운 눈빛으로 보지만 실제적인 힘을 발휘하여 일본에 압력을 넣을 수가 있겠는가.한 인간관계에서도 꾸준한 왕래와 접촉,매끄러운 관계 유지가 환란을 겪었을 때 비로소 도움을 요청할 수가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교훈으로 삼게 된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다행히 1894년 갑오개혁을 필두로 과거제도 폐지되고 관민이 평등함을 주창하며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된다.전화기,철로,개인의 영업권,물류의 유통,보부상의 활발한 움직임,신식 교육의 확대등으로 유교 문화권에 젖어 있던 조선은 긴 잠에서 조금씩 깨어나고 잘 살아 보자는 각성을 하게 된다.다만 고종과 순종은 이미 물고종,물순종으로 일본에게 취급받고 황제에서 왕위로 격하되고 마는 상황을 볼 수가 있다.나라가 백척간두에 처해 있을때 민초들은 자발적으로 의병을 일으키고 독립을 위해 아니 가는 곳 없이 힘과 자금을 모아 독립 운동에 앞장 서지만 이미 일본의 위세와 탄압 앞에서는 힘없이 스러지고 고통 받는 사람들만 속출할 뿐이다.이때를 질세라 을사오적같은 놈들은 나라를 팔아 먹은 것도 모자라 은사금에 작위까지 받아 가면서 온 나라를 그들 손 안에 쥐락펴락 했던 것도 정치를 못한 위정자와 관리자들의 무능과 몸보신에 기인할 따름임을 느끼게 한다.

 그중에 안중근 의사의 제1대 통감 이토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암살하고 혹독한 재판과 살려 주겠다는 감언이설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오로지 ’동양 평화론’을 주창한 그의 대의는 당시 많은 지식인,민초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적국인 일본 특히 중국의 양치차오(양계초)같은 개혁가들에게도 커다란 사표로 작용되고 있음을 알때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며 그의 거사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의 모태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어느 시대이고 지배층은 자신의 몸보신,자신에게 빌붙고 귀 간지러운 소리만 전하는 수족들을 챙기면 안된다.직언을 하고 상소를 하며 국가가 풍전등화에 있을 수록 거국적인 차원에서 그들의 뜻을 경청하며 힘을 모아 국난을 타개해 나가는 철인 위정자,지혜롭고 현명한 위정자가 있었으면 한다.21세기는 지식 창조와 무한한  개인의 창의가 요구되는 시대인만큼 국가의 수장,참모,실세들도 밥 그릇 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지 말고 제발 나라의 미래,후손들이 잘 사는 나라를 설계하고 힘을 똘똘 뭉쳐 나가는 연대를 세계 만방에 보여 줘야 할 것이다.대한민국은 이제 명실공히 세계가 무시할 수 없는 국력을 자랑하고 있지만 국민들의 단결과 존중하는 마음은 희박하다고 생각한다.’제국의 황혼’을 통하여 100년전 기울어 가는 조선의 국내,국제 정세 속에서 후손인 ’나’는 무엇을 어떻게 배우며 향후 무엇을 어떻게 해 나갈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굳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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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의 미학 - 우리말 풍경 돌아보기
이상규 지음 / 살림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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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가면서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사용되는 말들이 어떤 때는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말(사투리,방언,토속어)로 주고 받으며 첫 대면이라든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격식을 갖추어 우리가 말하는 표준어로 대해야 할 때가 많이 있다.평소에 방언에 관심이 있어서인지 작품을 읽어 가노라면 작가의 말투가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게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기도 하고 자신이 타지역의 말을 모방해 보기도 한다.특히 한승원씨의 작품 속에서는 전남방언이 질퍽하게 묻어 나오고,김주영씨의 작품 속에서는 경북방언이 핏방울처럼 뚝뚝 떨어지며,이문구씨의 작품 속에서는 충남방언이 눈을 즐겁게까지 한다.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문자가 없던 시절,중국의 어려운 한자를 빌려와 이두문자로 표기하고 일제 강점기에는 그 아름답고 세련미 넘치는 한글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어강제교육으로 인해 한글이 말살되는 수난을 겪어 오기도 했지만 다행히 뜻있는 한글학자및 작가들에 의해 우리 한글은 인동초처럼 두터운 대지를 뚫고 세상을 향해 빛을 발휘하고 있다.

 표준어의 정의를 ’현대 서울에서 교양있는 사람들이 두루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라고 한다.그외 언어는 그럼 뭐란 말인가?라면서 작가는 방언 및 토속어를 범국어권에 집어 넣어 주기를 주문한다.또한 방언에 대한 국민의 인식 태도가 눈에 띄는데,향토 문화의 중요한 유산,국어의 역사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문학 작품의 사실성 살리는 요소,언어 통일에 장애가 되지 않음,지역 감정을 유발하지 않음이 압권을 보인다.우리나라에서 방대하다고 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글을 읽는다든지 어떠한 것을 조사한다든지 할라치면 찾아 볼 수 없는게 수두룩한다는 것이다.또한 한반도는 해방과 더불어 원치 않게 이념의 남북으로 갈라져 남은 표준어로 서울말을,북은 문화어로 평양말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방언의 묘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현장에서 사용하는 민중의 목소리를 생생히 들려주고,작가의 마음과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정적인 묘사일 것이다.그 한 예를 인용해 보려 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P58~59

 멋진 시를 감상하니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시인 백석은 누구에게도 침해받지 않은 사랑의 공동체인 ’마가리(오막살이)’에서 사랑하는 나타샤와 함께 살기를 기원하는 애틋하고 애절한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짚가리’형태의 지리적 분포로 방언권(기호형,호남형,중부내륙형,동부 산지형,남부 고원형,영남 내륙형,남해안형,동해안형)과 흡사하다고 제시하고 외양간,벼,부추를 모델로 방언 분포 지도를 보여주고 있다.
근현대 작품 속의 방언도 묘미가 있어 지루한 줄 몰랐는데,채만식의 [천하태평춘],조정래의 [태백산맥][아리랑],최명희의 [혼불],정지용의 [향수],홍명희의 [임거정],이기영의[고향],현길언의[용마의 꿈],이용학의 [낡은집]과[동면하는 곤충의 노래],김소월의[진달래꽃]중 기억이라는  시의 1연에 쓰여진 난해하면서도 정감있으며 주옥같은 방언들이 활용되었다.

 작가는 우리나라의 어문 정책의 현주소의 모순투성이를 고쳐 나가려는 의지가 없음을 꼬집고 표준어와 표준국어대사전을 지목하면서,한 나라의 규범어를 규정하여 불편 없이 사용,사전에 그 내용을 실어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또한 일본은 메이지 시대부터 방언을 수집하고 언론에 보도되는 신조어를 매년 수집해서 30권짜리 ’국어대사전’을 만들어 언어의 곳간에 담아 두고 있다며 [표준국어대사전]의 잘못을 답습할 것이 아니라 국민이 알고자 하는 모든 언어 자료를 차근차근 수집 정리하여 일상 언어의 곳간을 채워 나가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21세기는 한국 사회가 정보 기술 강국으로 웹 기반 사전 편찬 기술을 구축해야 하며 디지털 강국으로써 우리의 한글언어를 배우려는 한류열풍에 맞춰서라도 우리들이 사용하고 하는 일상언어에서부터 시,문학등에 걸친 언어들을 한 곳에 담아 놓는다면 필요할 때 끄집어 내어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어 내고 나라의 말을 멋지게 펼쳐 나가지 않을까 싶다.아울러 남북한으로 나뉘어져 이질화된 우리 말을 남북의 언어학자들을 위시해서 폭넓은 인재들이 지혜를 집적해서 [겨레말큰사전]을 제작해 나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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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 장수 문순득, 조선을 깨우다 - 조선 최초의 세계인 문순득 표류기
서미경 지음 / 북스토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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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는 19세기 순조가 즉위 하자마자 서학(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고 수많은 교인들이 처형 및 유배를 가게 되는데,당시 학문과 사상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정약용.약전 형제의 흑산도,강진 유배는 커다란 국가적 손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어부(홍어장수)인 문순득이라는 사람에 의해 그가 홍어잡이에 나서 알 수 없는 폭풍을 만나 추자도,류큐(오시마),여송(필리핀),마카오,안남(베트남),중국 대륙을 횡당 북경에 도착하여 조선의 사절단과 합류하여 그의 고향 우이도 지금의 소흑산도에 당착하기까지 38개월이라는 해상과 이국 땅에서 겪었을 마음 고생과 체험담은 당시 이국의 실정과 풍물,언어등을 간접적이나마 체득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아닐까 싶다.

 '사농공상'이라는 직업적 귀천을 규정지은 조선 후기 우이도에서 태어난 어부 문순득은 향년 25세가 되던해 사나운 폭풍을 맞아 앞이 보이지 않는 해상을 넘실넘실 흘러서 추자도 근처로 가게 되고 다시 일본의 복속하에 있었던 류큐의 오오시마(지금의 가고시마현 소속)에 머물다 또 다시 바다 위를 떠돌다 간 곳이 여송(필리핀)이었으며,해풍이 잔잔한 날을 선택하여 간곳이 마카오였다.

 문순득은 비록 배우지 못한 신분이었지만 총기는 밝았던지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던 정약전에겐 소상하게 구술로 전달하여 <표해시말>이라는 책자로 그의 표류 역정이 전해지고 되고,역자들 역시 그가 표류지로 밝힌 오오시마,필리핀 루손,마카오등지를 역사학자들과 함께 고증하는 모습도 읽으면서 문순득의 표류 생활이 생생하게 머리에 그려지게 되었다.

 조선의 표류 역사는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기록으로 남겨진 것들을 살펴보면 중국과 일본,류큐(오키나와:지형의 모습이 남북으로 가늘고 얇게 꼬아 놓은 새끼줄 같다고 하여 오키나와라고 명명함)등으로 표류한 일이 많고 역으로 제주도로 표류해 온 타국인이 꽤 된다.세종25년 강권두의 중국 표류를 선두로 1900년 허희일씨등이 일본에 표류될때까지의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말과 글이 통하지 않은 이국땅에서 문순득은 불안감과 초조함 속에서 이국인들과의 생활담은 방대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문순득에 대한 대우와 관계등은 예상외로 따뜻한 배려와 인간적인 미로 가득차 있음을 알게 되었다.역시 민간인의 신분이지만 함부로 대하지 않고 마음을 편하게 하고 그가 귀국하는 날까지 안정된 생활을 배려해 준 점에서 훈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가 남긴 구술담은 정약전의 <표해시말>로 완성되어 그의 후손이 간직하고 있는데,조선 후기의 표류와 관련하여 이국의 풍물,언어,생활상,정치적 상황까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아닌가 싶다.또한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는 정약전 사후 흑산도(우이도)로 건너가 문순득을 만나 외국 선박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묻고 대답한 것을 기초로 <운곡선설>을 내놓아 외국 선박 논문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유교사상이 뼈마디까지 깊숙히 침투한 조선 후기,탐관오리들의 학정과 탐욕,아집으로 어수선한 때에 천한 신분의 문순득은 바다위의 떠돌이가 되고 이국 땅에서 말못 할 고생을 하였지만,그가 귀국하여 남긴 구술담은 백면서생의 양반들과 비교해 보면 가히 모험가적인 정신과 용기를 갖은 선각자라고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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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했던 순간들 - 70-80년대의 추억과 낭만 이야기
김호경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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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면서 내가 태어나기 전의 역사를 주로 접했고 으례 역사라고 하면 아주 오래된 연대기,인물 중심이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데,이 도서는 내가 태어나던 60년대 및 학창시절을 활발하게 보내던 70,80년대의 생생했던 현장과 언저리를 다큐멘터리식으로 전해 주니 참으로 고맙고 아련하고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오래된 내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저자와는 거의 동년배에 가까울 정도로 서술하고 있는 사건,사고,인물,사물등이 엊그제 집에서 보고 신문에서 보았으며 내 몸으로 겪었고 부딪히고 눈물을 흘리고 환희의 순간,감격,미래의 이상을 온몸으로 느꼈던 터라 더욱이 값진 도서가 아닐 수가 없다.

 이 도서의 이야기는 1960년대생부터 1969년생이 학창시절 보고 듣고 말했으며 온몸으로 겪었을 그 당시를 함께 공유하고 되돌아 보는 한국전쟁후 1.5세대가 아닌가 싶다.물론 1960년대초와 1960년대 후반에 출생한 분들은 학창 시절 약간의 사회적 제도나 분위기는 차이가 나지만 그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가물가물 희미한 기억과 추억으로 마음 속에 살아 있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나는 그러고 보니 전자에 가까울듯 싶다.

 여기에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기억이 나고 인상에 오래도록 각인이 되고 있는 것들을 말한다면,다음과 같다.

--국민교육헌장 외우기,국기에 대한 경례,가을 대운동회,1971년 대통령 선거,10월 유신,김신조 남파사건,7.4공동성명,육영수여사 피살사건,강재구 소령의 굵고 짧게 살자,베트남 패망,새마을 운동으로 인해 매일 아침 동네 풀뽑기(제일 하기 싫었음),반공방첩 표어,뽀빠이 사먹기,풀베어 퇴비쌓기,혼식 장려운동,8.18도끼 만행사건,웃으면 복이 와요,이소룡 우상,돈 걷어 방과후 선생님 몰래 영화 보기,스마트 교복,고고춤,고교시절 교련 활동,타잔,주말의 명화,전설의 고향,10대 가수상,선데이 서울,축구선수 차범근,박치기 김일,예비고사와 본고사,성문종합영어와 수학정석,삼양라면,농번기 방학,민방공 훈련,난로위에 양은 도시락 올려 놓기,회충약 먹기,수사반장등이다.---

 이것은 70년대의 내가 기억하는 것들이고 80년대에 들어 오면 신군부에 의한 군부독재정치와 삼청 교육대,86아시안 게임,88올림픽 경기등으로 정치와 경제가 격변기에 있었던 때라고 생각이 든다.

 70,80년대에는 학교 및 사회 제도가 경직되고 규제도 많았지만 깨우침이 적었는지 그냥 순순히 따라가는 것이 순리인 줄만 알았다.어른이 되고 되돌아 보면 구질구질하고 숨이 막혔던 시대였을지 몰라도 자애롭고 엄격한 부모님과 스승,멋진 인생의 선배들의 멘토가 있었기에 샛길로 새지 않고 느리지만 바른 길로 걸어 올 수가 있었던거 같다.

 지금은 40~50대의 중.장년층의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1960년대생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돌아보고 민주화를 위해 피를 흘리고 산화한 선배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안정되고 편안한 생활을 즐길 수가 있지 않나 느껴 본다.그 시절은 어둡고 방황했지만 되돌아 보니 행복했고 좋은 추억으로 되살아 나는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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