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들의 부부싸움 - 조선의 운명을 결정한
이성주 지음 / 애플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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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운명을 결정한 왕과 왕비의 알력과 암투는 제목 자체만으로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오늘날에도 돈과 권력을 쥔 자들은 아무리 서로가 좋아 혼인을 맺는다 해도 양가의 재산,학벌,좋은 DNA 찾기 등으로 짝을 이루어 두 개의 성이 결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조선 시대와 같이 봉건적이고 보수적인 시대에서는 왕비를 선택하는 데에는 몇 명의 왕비 후보군을 결집시켜 그 가운데 가장 무난하고 국정의 파트너로 적합한 인물을 간택하기까지는 여러 가지 환경적 요소,물리적 요소 등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왕비는 국모(國母)인 만큼 국정의 대소사를 직간접적인 입김이 작용했을 테고 때로는 수렴청정을 하기도 하고 실세로서 막강한 권력행사를 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왕과 왕비 그 자리가 아니라면 그들 역시 일반 자연인과 다를 것이 없는 남과 여가 만나 결합한 부부의 관계이고 삶의 동반자에 지나지 않겠지만 왕과 왕비는 극도로 봉건적이고 엄격한 왕조 체제하에서 알콩달콩한 관계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군주,왕에 의해 정사가 결정되고(지금도 그러하지만) 은밀한 방사(房事)도 대를 잇기 위한 방편이었을지 모른다.오늘날 흔히 말하는 꽃피는 봄날 부부가 손을 잡고 소풍을 가는 정겨운 모습이 과연 조선시대에 있었을지는 미지수이다.

 

이 글은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사료에 바탕을 두고 왕과 왕비의 관계를 고증하고 있다.주로 역사적 사건,정치적 쟁점과 연계된 부부생활이 주가 되고 있으며 왕비의 입김과 군주의 흐린 판단에 의해 정비(正妃)보다는 후궁을 더 귀여워 하기도 한다.후궁에게 싫증이 나면 또 다시 정비에게 다가 오는 등 군주의 지조없는 행동은 정치적인 쟁점과도 깊게 맞물리기도 한다.정비를 내치고 다시 맞아 들인 후궁이 인척들을 동원하여 한 자리 해먹을려다 척살되는 경우도 있다.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극심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의연하고 근엄한 군주의 모습은 사라지고 체통마저 잃는 경우도 있다.

 

조선시대는 왕이 정비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후궁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다산을 통해 국통을 잇고 왕권의 체통과 전통을 잇는 것이 다반사였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된다.특히 왕권을 누가 이어가느냐에 첨예한 의견 대립과 불상사가 다발하고 있는 점이 그 시대의 특징이라고 보여진다.당연히 정비의 맏이인 적장자(嫡長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맏이의 행실이 좋지 않다는 분분한 여론은 둘째나 셋째 또는 후궁에서 난 자식이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도 있다.(조선왕조 27명 중에서 적장자 승계 원칙을 지킨 경우는 문종,단종,연산군,인종,현종,숙종뿐이다)

 

왕비는 왕의 그림자와 같은 존재이기에 왕이 하라는 대로 따라 가는 것이 순리이고 분위기였지만 태종의 부인 원경왕후의 경우에는 자신의 친정 식구들이 왕권에 깊게 간여하다 보니 태종은 이를 외척발호로 여기고 권력누수를 염려한 나머지 원경왕후의 인척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 넣고 왕권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나아가 조선은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로 왕의 권력이 절대적으로 약했는데 성종은 그 군약신강의 대표적인 왕이었다.이러한 모습을 보고 자란 연산군은 치세 내내 대간 세력들과의 싸움이 끊일 날이 없었던 것이다.

 

나쁜 남자 태종,파파보이 세종,여자를 멀리한 문종,폭군 아들을 낳은 성종,속을 알 수 없는 중종,아들을 질투한 선조,권력 앞에 냉정한 숙종이 이 글의 주인공들이다.그들은 부부라는 겉궁합과 속궁합으로 살아 가던 모습이 아니었다.일종의 규방암투(閨房暗鬪)의 수준을 넘어 피비린 내 나는 척살과 독살,정치적인 모략과 부적,방화의 횡행 등이 조선의 궁궐 안에서 벌어졌던 것이다.'권력은 자식하고도 나누지 않는다'는 말이 이 글을 통해 얻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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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하루 - 실록과 사관이 미처 쓰지 못한 비밀의 역사 하루 시리즈
이한우 지음 / 김영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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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태조에서부터 순종에 이르기까지의 군주가 되는 과정을 비롯하여 치세,사회상,그 영향력 등을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다.조선은 뭐라고 해도 성리학을 기반으로 유교를 국체로 삼고 왕권과 신권이 날카롭게 대립하기도 하며,사색당파로 인해 군주의 생각과 이념이 이리 저리 흔들리기도 했다.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권문세가에 의해 정사가 좌지우지 되기도 했으며 구한말엔 외세의 침략과 개방압력으로 군주의 역량은 시험대에 오르기도 했다.실록과 사관이 알려주지 않은 비밀스러운 역사의 틈새가 저자에 의해 밝혀지는 것 같았다.

 

 

이한우저자는 통각(統覺 : 역사,시간 자체의 통일적인 감각)에 의해 이 글을 구상하고 집필했던 것으로 보여진다.연대기나 인물 위주의 나열식 서술보다는 군주와 신료를 둘러싼 첨예한 심리대립과 결단력,고민과 갈등,오류와 대실수 등이 오늘을 사는 후세들에게 역사,권력은 과연 무엇인가도 새삼 느끼게 한다.특히 사농공상순으로 된 사회적 계층,이념이 조선시대 전반에 퍼져 있었기에 기술,실용과 같은 삶의 발전과 질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도 조선시대를 전반적으로 아우르는 사회적 기반이고 이념이었다고 본다.

 

 

'왕의 하'루는 대표적인 왕들의 취임식을 추체험하면서 왕의 심정과 그 날의 발생했던 일들을 살펴보고 있고,신하들과 맞서 정치력을 발휘해야 했던 왕들의 결단의 순간들을 '하루'하는 시간 속으로 복원하고,즉위식,제왕학 수련,묘호 제정,효와 불효,국혼 등을 통시적인 관점에서 왕실의 부침을 보여 주고 있다.

 

 

역사를 바꾼 운명의 하루에서는 이성계,연산군,광해군,소현세자,정조 임금의 하루를 보여 주고 있다.국왕으로 즉위하게 되면 파루에서 시작해 인정에서 끝나는 것이 일샹생황의 규칙이다.아침에 신료들과의 조강과 일과가 끝나는 석강이 있으며,은밀한 공간이자 유일한 '사적 영역'인 침전은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개국되면서 중국 역시 명이 탄생되었다.명은 조선에 사대교린과 조공외교를 펼치면서 일년삼사(一年三使)라는 외교 관계와 비정기 사행(使行)이 있었다.중종에 들어오면서 한명회 등의 신권이 강화되고 왕권과 신권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엿볼 수가 있다.또한 비운에 간 국왕들은 독살을 당했거나 독살당했을 가능성(예종,인종,선조,효종,현종,경종,정조,고종)과 권력투쟁의 희생자(소현세자,사도세자)가 그것을 대변하고 있다.국왕의 즉위식은 대부분 선왕이 서거하는 날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당파가 다시 남인,북인 그리고 노론과 소론,더 갈라져 나가 벽파와 시파로 나뉘어지는 조선의 사색 당파는 영,정조에 그 극치를 보여 준다.다시 서인은 공자의 문묘를 중요시하면서 종묘와 거리를 두게 되고 선조에 들어와 종묘의 기능을 끝났다고 생각하게 된다.어찌되었든 국왕의 권력에 누수현상이 생겼다는 것은 분명하다.

 

 

국왕의 즉위시기은 추대형과 승계형이 있다.정상적인 승계와 비정상적인 승계가 있으며,눈물의 즉위식은 정상적인 승계에서 볼 수가 있다.또한 부자 승계와 조손 승계(순조에서 헌종)가 있으며,국왕은 정실,계비 등을 통해 많은 자손을 낳지만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으로 인하여 안타깝게도 수명이 길지 않다는 점이다.

 

 

특이하게 다가오는 점은 국왕이 승하하면서 대행대왕의 시호와 묘호를 지어올렸는데 시호는 헌문정무인명(憲文定武仁明)이라 했다.헌은 선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사람을 치는 것이며,문은 자애로운 은혜로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며,정은 백성을 편안하게 한 큰 계책을 세운 거서이며,무는 대위(大位)를 지켜 공을 이룬 것이며,인은 어짐을 베풀고 의를 행한 것이며,명은 사방을 두루 밝게 다스린 것이라고 한다.묘호는 '덕을 지키고 업을 높였다(秉德尊業)'해서 열조(烈祖)라 했다.

 

 

 

파루와 시작해서 인정으로 끝나는 국왕의 하루는 독불장군이듯 혼자서는 난국을 헤쳐 나갈 수가 없었기에 신료와 학문이 두터운 사대부들의 의견을 깊게 청취하는 덕장이 있는가 하면,국왕의 기질,원한,자질 등의 문제로 당대를 풍파로 몰아 넣은 왕도 있다.조선이 이씨 왕조라는 혈통에 의해 국왕이 만들어지고 성리학,유교,중국의 공맹사상 등에 몰입했던 점이 결국 나라의 발전을 더디게 만들었던 요인이 아닌가 싶다.이한우저자의 꼼꼼한 통각적인 역사인식도 깊은 인상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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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 어둠의 시대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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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이 정약용이 정조와 인연을 맺으면서 관료로서 신하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던 시대를 그린 글이지만,2권은 정조 사후 정순왕후에 의한 천주교인들의 대대적인 탄압이 이어지면서 정약용 일가는 피의 숙청이 시작된다.정약용은 비의 숙청에서 가까스로 벗어나지만 가시밭길과 같은 유배의 형극을 맞게 되고 유배지에서 남긴 수많은 경세치용과 백성들을 위한 저작물들을 남겨 후대에 높은 명성을 떨치게 된다.

 

 

 

정조가 붕어하면서 정약용은 순망치한의 시대를 겪게 되는데,정조 없는 세상에 대한 그의 두려움을 여유당(與猶堂) 현판을 내걸게 된다.그 의미는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주저하면서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는 뜻이다.당시 정순왕후에 의한 순조의 수렴청정과 가혹한 천주인 탄압,세도정치의 회오리 바람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고 몸을 낮췄던 것으로 생각된다.

 

 

 

 

노론 벽파에 의한 천주교 탄압은 정약용의 형 정약종과 그의 매형 이승훈,소론의 좌장격인 이가환 등의 엄중한 추국과 숙청을 당했던 것이다.천주교 탄압은 당시 국체인 유교를 배반하고 조상을 섬기지 않은 대역죄로 몰렸던 것으로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황사영을 비롯하여 중국인 신부 주문모,천주 여성인 강완숙씨 등이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정약용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장기에서 다시 강진으로 유배를 가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그는 바로 위 형인 정약전과 강진에서 헤어지면서 언제 풀릴 지 모르는 유배의 형극을 참고 기다려야 했다.정약용은 강진 유배 생활 속에서도 수많은 저서를 남기게 되고,정약전은 흑산에서 어부들과 어울리면서 민중들의 삶을 깊이 체험하면서 자산어보를 남기게 되며,정약용은 유배의 몸이지만 자식에 대한 바른 교육법을 편지로 또는 구두로 자상하게 알리기도 한다.특히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남긴 수많은 저서들은 후세에 길이 남을 저작물이고 현실 정치,경제,의학,주역 등의 다방면에서 유익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정약용과 정약전 두 형제는 강진과 흑산을 오갈 수는 없어도 편지를 통해 그 마음을 전하기도 하는 등 돈독한 우의를 다지기도 한다.형이 동생에게 보내고,동생이 형에게 보내는 서찰들은 사랑과 슬픔을 상징하며 결국 형인 정약전이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정약용은 형이 있는 흑산을 향해 그 그리움과 슬픔의 한을 달래기도 하는데 우이(牛耳)라는 형제봉을 지었다고도 한다.애틋함이 쏴하게 밀려온다.

 

 

 

 

그는 18년 간의 유배생활에서 해배가 되면서 고향에 돌아와 <자찬묘지명>을 작성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경진년(1820년,59세) 봄에 배를 타고 산수(汕水)를 거슬러 올라가 춘천과 청평산 등지를 유람했다.가을에는 다시 용문산에 가사 유람하는 등 산과 시냇가를 산보하면서 인생을 마치기로 했다.

 

 

 

현세에서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체념하면서 인생을 정리했다.태어난 1762년부터 1822년까지의 삶의 가정을 되돌아 보면서 정밀하게 수신을 실천하고 하늘이 준 밝은 명을 살펴서 여생을 끝마치려 한다는 내용이다.

 

 

 

 

그가 태어나던 해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게 된 해이기도 하며,정조로부터 엄혹한 관료훈련을 받으며 정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기도 했던 정약용은 천주교의 대대적인 탄압과 정순왕후의 세도정치에 휘몰려 두 차례에 걸친 유배의 몸이 되었지만,국체와 사회를 원망하기보다는 자신의 몸을 낮추어 몸소 수신제가의 정신을 보여 주었던 인물이다.그는 관료,학자로서 '경세치용'의 정신을 백퍼센트 보여 주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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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사진에 박히다 - 사진으로 읽는 한국 근대 문화사
이경민 지음 / 산책자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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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사진기가 귀하던 시절이어서인지 유년시절의 사진은 거의 없다.돌이 조금 넘어 외가에서 찍은 흑백사진과 일곱살 때 이웃집에서 전통 혼례시에 무심코 찍은 사진 한 장이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의 사진이다.가끔 불필요한 잡동사니를 정리하다 앨범을 꺼내 그 사진을 바라보면 입가에 미소가 고이게 된다.

 

 

 

 

지금이야 사진기술이 발달하여 개인의 취미 및 작품사진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사진으로 바라본 한국 근대 사진사는 19세기말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와 공간적 배경을 음미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한국에 사진기가 처음 들어오면서 일반인의 눈에는 사진기가 혼을 빼앗아 가는 기계로 인식되기도 하고,신분 증명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나아가 당시 경성(서울)에 일본인 및 조선인에 의에 사진관이 생기면서 사진은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된다.

 

 

 

 

오늘날 디카,스마트 폰등이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사진의 개념과 인식이 예전과는 천양지차가 나지만 당시에는 일제에 의한 권력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고,군 작전상 지형지물을 이용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일제는 군사상 기밀을 요하는 경우에는 촬영거리,촬영 고도 등을 엄격히 제한하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인물과 배경 사진 등도 매우 이채롭다.최초의 조선인 이홍경 부부에 의한 사진관을 통해 사진으로 신분을 과시하기도 한다.사진은 사건 사고의 중심에 서기도 하며,신문화의 풍경들의 정점이 되기도 한다.사진촬영과 관련된 사기.위조.착취 사건 및 사진사가 살해되거나 자살한 사건,사진을 남기고 실종되거나 유괴.익사.괴사한 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각종 범죄와 사건 사고가 줄을 잇고 있다.

 

 

 

 

또한 구한말 하와이 이민을 간 남자와 조선에 있는 여자가 결혼을 하려면 하와이에 나가 있는 사람 사진 한 장만 보고 억지로 결혼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사진에 나와 있는 인상으로는 그 사람의 성격과 결혼관,장래성을 알 수가 없기에 살다가 파경을 맞기도 하는 경우도 있다.이렇게 사진 한 장으로 결혼을 하는 여자를 '사진 신부'라고 한다.

 

 

 

 

이 글에 실린 조선의 산하는 매우 한산하고 쓸쓸하기만 하다.1930년 무렵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가지,1930년 함남 장진의 한 국경경비대 초소,1904년 사진관 외관,1908년 보통학교 여학교 모습,경성 유람버스 코스,1927년 삼방폭포의 모습들이 실려 있다.근대 사진사를 통해 다양한 사진들과 사진들의 쓰임새 등을 관조해 보는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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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재기이 - 18세기 조선의 기인 열전
조수삼 지음, 허경진 옮김 / 서해문집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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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는 신분이 사농공상순으로 되어 있어 기술직이나 역관직은 그다지 대우를 받지 못했다.또한 양반일지라도 첩으로부터 낳은 서얼(庶孼) 역시 과거시험 등을 볼 수 있는 자격마저 제한된 시대였다.양반과 양인 사이의 계층을 중인이라고 하는데 기술직,역관,의관,서얼 등을 가리키고 있다.그들이 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계기는 정조시대 검서관 제도가 생기면서 박제가,이덕무,유득공 등이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다만 중인계층이 다소는 사회진출을 할 수가 있었지만 폐습이 완전히 뿌리 뽑히지는 못했다.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러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차별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18세기 후반 과시(科詩)를 잘 지었던 저자 조수삼은 중인이하의 어려운 삶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 뒷골목 사람들 71명의 이야기를 71편의 한시로 응축해 놓았다.일종의 위항(委巷)인문학이라고 생각이 든다.

 

 

 

 

가을날 서재에서 기이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는 추재기이는 중인이하의 계층들이 자신의 삶을 한탄하기보다는 힘든 삶 속에서도 수분지족하면서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경이롭게 다가온다.몸이 불편한 안경알 가는 절름발이는 온종일 앉아 하는 일을 배우다 보니 안경알 가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되고,안경사는 18세기 전문직업인이라고 할 만하다.

 

 

 

또한 어느 50대 기생은 알고 지내던 판서가 세상을 뜨면서 세상 물정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한다.그것은 부귀를 얻는 것보다는 즐거운 만남이 가장 얻기 힘들었다고 한다.세상을 살면서 나를 가장 알아주고 어려울 때 의지가 되어줄 사람이라는 의미로 들린다.그래서 사람은 혼자서는 살기가 힘들고 의지가 되는 말벗이 오래도록 곁에 있는 것이 참된 인생이 아닐까 한다.

 

 

 

 

안경알을 가는 절름발이,원숭이를 구경시켜 빌어먹는 거지,고소설 낭독꾼 전기수,성대모사에 뛰어난 박 뱁새 등이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자신의 신분을 원망하고 세상을 한탄하는 내용보다는 주어진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검박한 모습이 눈에 선하게 다가온다.

 

 

 

 

그 중의 의협심 많은 도적의 상징 일지매(一枝梅)는 탐관오리의 재물을 털어,처자를 봉양하지 못하거나 어버이의 장사를 지내지 못하는 자들에게 흩어 주었는데,도적질을 할 때마다 붉은색으로 일지매를 새겨,자신이 훔쳐 갔다는 것을 표시했는데,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말하는 뜻으로 이해가 된다.

 

 

 

 

붉은 매화 한 가지를 표시하면서(血標長記一枝梅)

 

탐관오리의 재물 털어 여럿에게 나눠 주네.(施恤多輸汚吏財)

 

천고에 불우한 영웅 많았으니(不遇英雄千古事)

 

옛날 오강에도 비단 돛배가 왔다네.(吳江昔認錦帆來)

 

 

 

 

조선에 관련한 도서는 주로 왕조와 인물에 관한 역사서가 위주였는데,밖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뒷골목 계층들의 인생사들이 가슴 뭉클하기도 하고,닫혔던 가슴이 확 뚫리기도 하며,연민의 정을 자아내기도 했다.화려한 삶을 살았던 양반들과는 대조적인 삶을 살았던 평범한 백성들의 삶을 통해 조선의 시대상과 평민들의 숨겨진 삶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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