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서중석 지음,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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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 역사를 바르고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것은 일국의 일원으로서 주체의식의 소산이고 과거와 현재의 인과관계를 자연스레 인지하며 나아갈 향방을 예측하는데도 뜻있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제의 쇠사슬로부터 해방이 되면서부터 최근의 한국사에 대해 연대기적이며 지엽적인 사건,사고의 얄팍한 우리역사 알기에 그친것 같아 아쉬었는데, 객관적이며 이념에 가려졌던 세밀한 부분까지 뚫고 속살을 내민 내용을 이 도서에서 읽어 내려 가게 되어 속 시원한 느낌마저 들었다.또한 사건일지,삽화,사건에 대한 주를 튼실하게 달아 놓아 이해를 한층더 돋구었다.

 

우리는 해방을 맞이하면서 본의 아니게 강대국(미국과 소련)의 지배하에 이념의 종속국인냥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모든 분야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못해 왔던게 사실이다.이승만의 독재정권 연장을 위해 그에 반하는 세력들이 무참히(4.3항쟁,빨치산 사건등) 살해 되고 부정선거,사사오입사건등으로 이미 이승만의 새빨간 독재,부패가 천하에 드러나고 1960년대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으로 떳떳하게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었고,이후 박정희의 군부정권이 탄생되면서 경제 개발등으로 국민 소득등 삶의 질이 향상되었지만,그의 반공이데올로기에 반하는 민주세력등에게는 가차없이 짓밟고 수많은 인사들이 투옥되고 처형되는 반민주적인 작태가 자행되었던 것이다.특히 유신독재에 항거하다 희생된 인혁당 사건은 반민주적인 사례로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박정희의 18년간의 치적도 많았지만 그의 독재욕은 왼팔에 의해 운명을 달리하고 또 한 번의 신군부 독재정권이 막을 올리며 1980년대엔 사회정화운동 명목으로 눈에 가시가 될만한 사람들은(삼청교육대를 위시해서) 서슬퍼런 칼날 앞에 많은 인사가 희생이 되었고 전두환은 자신의 권력욕을 앞세워 1980년 서울의 새 봄을 맞이 적대세력인 민주화 쿠데타세력을 제거하겠다는 구실하에 5월18일 광주 시민들이 무참히 희생되고,대학생,진보세력,일반시민들까지 합심으로 결국 군부정권은 1987년 국민 앞에 무릎을 꿇면서 국민의 손에 의한 직선제가 부활하면서 우리는 새역사의 지평을 이어가게 된 것이다.


아시안게임,올림픽 게임을 거쳐 외견상 국민 소득은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정경유착으로 인한 탈세,돈세탁,IMF의 사태로 다시 한 번 우리는 총체적으로 원인을 제대로 찾아내고 바로잡아 양심적으로 사는 대부분의 서민들에게 허탈감을 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또한 국가의 안위와 후대를 생각해서라도 위정자들이 제대로 된 국가관과 가치관을 진정으로 국민들의 심복이 되어 멋지고 살맛 나는 한국의 모습을 실천해 주었으면 하며 반공이데올로기에 가려져 알 수 없었던 사료들을 더욱 낱낱이 파헤쳐 국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 주고 투명한 정치행태의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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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 - 프랑스 선교사 리델의 19세기 조선 체험기 그들이 본 우리 6
펠릭스 클레르 리델 지음, 유소연 옮김 / 살림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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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 말엽의 신해박해(진산사건)을 비롯하여 순조대에 신유박해(주문모 등 처형),기해박해(풍양조씨 권력 탈취 목적)을 거쳐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유교를 절대시했던 당대의 사회이념과 정체성을 말살하는 행위였기에 신자를 비롯한 선교사 등 다수가 참수,교살,추방 등을 당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 글은 프랑스 선교사로서 사제 서품을 받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후 조선 선교지로 배속되어 조선에 들어왔다가 1866년 병인박해가 터지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고 중국에서 조선교구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1877년 조선 선교자로 들어와 포교하던 중에 잠입 사실이 발각되어 투옥되고 그 감옥생활과 천주교 신자 및 조선에 대한 애정을 각별하게 기록하고 있다.

 

 

 

 

제6대 조선교구장으로 부임한 리델은 어린 시절 추진력과 품성을 주위로부터 높이 사게 되고,1860년 고국 프랑스를 떠나 1년 만에 홍콩에 도착한 다음,중국 산동성 푸쳬를 거쳐 조선에 들어왔지만 병인박해가 시작되면서 선교사 및 신자에 대한 가혹한 형벌이 내려지게 된다.이에 리델은 조선에서의 포교 생활을 보류하고 교구장으로 임명될 때까지 중국에 머문다.천주교 신자에 대한 탄압은 이를 잡듯 샅샅이 탐문하고 천주교와 관련한 책과 의복들을 땅에 묻는 등 천주교의 뿌리를 뽑으려 했던 것이다.

 

 

 

 

로즈제독에 의한 프랑스군의 강화읍 점령은 프랑스 선교사 9명에 대한 사죄요구였는데,조선 조정은 묵묵부답이었기에 한바탕 조선군과 난리를 치렀으나 별효과를 보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리델이 조선에서의 포교생활 6년을 마치고 추방형식으로 쫓겨나게 되지만,그가 후일 남긴 조선어 사전과 조선 지도,지명 사전은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그가 조선 백성들에게 복음화하려 열정적인 노력과 의지는 커다란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조선의 백성과 자연,풍물을 사랑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그가 체포되고 수감 생활을 하면서 옥졸들로부터의 문초와 심문,추방으로 쫓겨나는 과정까지 세세하게 일지형식으로 잘 그리고 있다.또한 당시의 조선 국내의 상황과 제도 등도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다행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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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 시대가 만든 운명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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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유학자이면서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인 정약용의 탄신 250주년(1762년생)을 맞이하여 그와 관련한 역사 문화행사가 다채롭게 행해지고 있는거 같다.정약용이 태어난 해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부친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던 해와 일치하고,그가 벼슬길에 오르기 전까지 벼슬을 하던 아버지 정재원의 학문적,관료적인 후광을 받지 않았나 싶다.

 

정약용의 시대는 정조와 함께 호흡을 맞춰 정사를 이끌어 갔기에 정조의 오른팔 격이었다고 생각된다.그만큼 정조 아래에서 정약용은 엄한 관료교육을 받았으며 정조의 신임을 얻기 위해 나름대로의 포부와 의지를 불살랐다고 생각한다.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과 『영남 만인소』로 이어지는 사도세자의 원한 풀기가 정조에게 큰 힘을 실어 주고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와 처가쪽,영조를 지지했던 노론 세력들을 척결하기도 했다.

 

이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장지를 수원 화성으로 옮기고(존호 장헌세자,묘호 영우원,사당 경모궁) 농경을 위한 저수지 만석보를 설치하고 기중기,배다리 등을 정약용에 맡겼다.

 

당시 조선에는 천주교 즉 서학이 들어오면서 노론세력에게 빌미를 안겨 주었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의 위폐 폐기사건이다.또한 정약용의 집안은 맏형 정약종을 비롯하여 매형 이승훈,중국에서 들어온 주문보 등이 천주교와 연루되어 감시와 탄압,극형에 이르는 멸문지화를 입게 된다.다행히 정약용과 형 정약전은 극형만은 면하고 각각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되는 신세가 된다.

 

정조를 비롯한 정약용 등의 남인 세력과 심환지 등의 노론 세력이 당대의 양대세력이었는데 정조가 집권시에는 노론 세력이 잠잠해지기도 했지만 천주교 문제만큼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는데,그것은 조선의 정체성과 조상에 대한 음덕을 깡그리 무시하는 처사이기에 좌시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글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조선의 대학자에게는 스승이 없다는 점이다.이황.조식,이이.유형원.이익.윤휴.정제두가 그러한데,이것은 현재의 교육 시스템과도 관련하여 생각해보아야 할 대목이다.다만,정약용은 부친 외에는 스승으로 삼은 사람은 없지만 서적 등을 통해 성호 이익을 사숙(私塾)했다.

 

예나 지금이나 신앙은 인간의 정신을 교화하고 세뇌시킨다.유교와 성리학이 국체였던 조선시대에 천주학은 당연히 국체를 말살하는 이교이었기에 천주교인들을 잡아다 문책하고 탄압하며 멸문으로 만들었던 것은 시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다만,유교와 성리학을 이끌고 나라를 이끌어 갔던 세력들이 정조 사후 몰아 닥친 천주교 탄압의 회오리를 비롯하여 안동김씨,풍양조씨 등의 세도정치,해방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수구세력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조의 인사정책은 큰 인물이 될 사람은 커다란 시련을 감내하게 하게 하고,노론들을 절대 등용하지 않는 점이다.척신정치의 음습한 유산을 발본하려 했던 그의 의지가 강력했다고 보여진다.나경언의 고변과 장인 홍봉한 등이 음모를 하여 사도세자를 어처구니 없는 죽음에 이르게 하고(사도세자는 온양온천 행차시 성군과 같은 자질을 지녔다고 증언하고 있다),천주학이라는 거센 물결 속에서 노론의 등용을 차단하려 했던 인물이다.

 

정약용은 큰 형의 멸문의 아픔을 뒤로 하고 암행어사와 곡산부사를 거치면서 관료로서의 탄탄한 경력을 쌓아가는 모습을 알게 되었다.'군자의 도는 자라고 소인의 도는 소멸하는'성인의 시대였던 정조의 시대는 그의 의혹에 쌓인 죽음과 함께 정순왕후를 비롯한 노론세력이 다시 불붙기 시작하고,정약용은 정조와 주거니 받거니 하던 시절은 가고 파란만장한 유배의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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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 - 개항부터 해방 후까지 역사를 응시한 결정적 그림으로, 마침내 우리 근대를 만나다!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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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하기만 했던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해방후 미.소에 의해 작위적으로 갈라진 남북 분단 그리고 폐허가 된 국토의 부흥기에 놓여 있었던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사람과 풍경(86점)을 외국인 및 내국인 화가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서 삶의 고단함과 애잔함,한국전쟁의 상흔과 강한 생존력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그림을 통해 느끼는 점은 당대의 사회상과 화가 개인의 내면세계,한 인물이 살아온 온갖 상념 등이 배여져 나온다.특히 이 도서는 벽안의 화가가 당시의 인물과 풍경,일상의 모습을 객관적인 시야로 그려 냈기에 구한말 조선의 사회,풍습,인물이 갖고 있는 정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 의미가 있고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고 보여진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조선 국내의 모습을 살펴 보면 주인 없는 경복궁의 쓸쓸한 모습,한일합방 후의 백성들의 모습,한강과 대동강을 수놓던 황포돛배의 정겨운 모습,칼 차고 조회하던 국민학교의 을씨년스러운 모습,서당의 모습 등이 스러져 가던 구한말의 풍경과 일제 강점기가 교차적으로 다가온다.

 

나라 잃은 설움과 독립을 위해 해외에서 활약하던 지사들의 모습도 의연하면서도 안타깝다는 마음이 일어난다.파리 만국박람회와 황제의 밀사(민영찬),안중근 의거를 보도한 근대 신문 등이 대표적이다.강제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던 고종의 참담한 심경과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의 기개있는 의연한 모습에서 국가의 중요성을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남북은 미.소의 이해관계에 의해 분단이 된다.우익과 좌익으로 갈라진 한반도의 또 다른 상처는 급기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수많은 인명살상과 장기간의 이념논쟁이 한국사회에는 병마처럼 찾아든다.피난시절의 천막학교는 배우려는 학생과 가르치려는 선생님이 일심동체가 된듯하고 휴전협정과 함께 포로 송환의 모습은 이념의 갈림길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짙게 다가온다.

 

1898년부터 1958년까지의 한국 근대의 풍경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충분한 그림들이다.왕조의 몰락상과 더불어 경성의 모습도 휑뎅그렁하기만 하다.왕족,지사,백성들 모두가 비분강개의 정신으로 똘똘 뭉쳐있는 느낌이다.1930년대에는 모던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복장과 관념에도 변화가 일어나고,한국전쟁의 와중에는 부모형제가 이산이 되지만 살아가기 위한 힘겨운 생존력이 강렬하기만 하다.특히 시장통의 아줌마들의 악착같은 장사와 구두닦이 소년의 모습은 절박한 삶을 상징해 주고 있다.비록 어둡고 참담했던 시대의 모습이지만 역사적 교훈으로 삼기에 충분한 그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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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조선에 살다 - 구한말 미국 선교사의 시골 체험기
제이콥 로버트 무스 지음, 문무홍 옮김 / 푸른역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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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조선은 허약한 조선왕조의 모습과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려 치밀한 계획이 진행되고 있던 시절이라 언제 어떻게 조선이 흘러 갈지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1900년은 국내에선 경인철도가 완성되었던 해이고,독립협회가 자주국권,자유민권,자강개혁의 사상을 가지고 추진했던 민권운동이 국민들의 시민의식을 성장시키는 촉매제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조선 국내외적으로 민권운동,일본의 팽창이 이루어진 때에, 한 미국 선교사 부부의 조선 시골 체험기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선조들의 생활상과 선교사 부부가 사랑과 애정으로 다가 서려 했던 조선의 자연,제도,습속,비인간성과 부정의,무위도식하던 양반 계급,학대받는 여성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전해져 오는거 같다.

 

무스 선교사의 눈에 비친 조선의 대지는 아름답고 풍요한 어머니상이며,조선의 백성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희망의 아들과 딸들로 여겨지지만,조선을 삼키려는 일본의 야욕에 가증스러움을 느끼고 있다.반면 무스 선교사는 조선의 시골 마을을 기적의 요람으로 삼고 그들에게 따뜻한 복음을 전파한다.무스 부인 역시 남편이 선교활동을 하면 뒤에서 조선의 지역민들의 성직자로 봉사하기도 했다.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도록 조선의 백성들은 남녀노소 할거 없이 흰 광목으로 된 치마,저고리,바지를 입고,상투와 망건,머리 따기를 하던 모습은 영락없는 조상들의 모습이었다.한강,낙동강,대동강의 수로는 조선의 교역에 중심역할을 하고,1904년 제물포항의 모습은 인파로 북적이는데,물자교역이 주로 일본에 의한 것이다.

 

1만개의 섬,인구는 1,200만(남북한 모두 합쳐),극동 최고의 기후를 예찬하고 있는 벽안의 무스 선교사에게는 평화롭고 순박한 조선 사람들이 일본에게 겪을 갖은 수탈과 탄압 등을 생각하니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조선 왕조가 왕과 신료들간의 심한 알력과 국권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소이도 컸고,유교주의에 오래도록 천착되다 보니 백성들의 무지몽매,구태적인 인습 등도 삶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았나 싶다.

 

산을 넘어 장에 갔다 돌아가는 길에 잠시 담배를 피우며 휴식을 취하는 남정네들,모래를 씻어 육안으로 사금을 찾아 내는 사람들,원산지역의 추수하는 모습,다듬이질을 하고 있는 고부간의 모습,초라한 입성으로 절구질을 하고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왁자지껄하면서도 풍성함이 가득찬 시골 장터의 모습,여행객들의 쉼터였던 주막의 풍경,겨울이 오기 직전 김장을 담그는 아낙들의 정겨운 모습 등이 인상적으로 다가왓다.

 

생계를 꾸려 가기 위해 짚신과 땔감을 팔아야 했고,조혼 풍습이 있어 부모가 짝지어 준 사람과 무조건 혼인식을 올리며,나이가 비록 위라도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결혼을 하여 나이가 어린 사람일지라도 반말을 해서는 안되던 인습,특별한 교통 수단이 없었기에 몇 십리 길을 짚신을 신고 걷고 뛰던 1900년대의 조선의 모습은 곧 닥칠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전조이기라도 하듯 백성들의 빈한하고 활기없는 모습이 안타깝고 안스럽기만 하다.

 

선교사로 조선을 택한 저자 무스 선교사 부부의 조선 시골 체험기는 후대를 사는 내게 당대를 이해하고 역사적 교훈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엇다.무스 선교사 부부가 만나고 성경을 공부하던 시골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찼던 순수한 모습도 인상에 남는다.흑백으로 된 사진이지만 이것을 컬러로 바꾼다 해도 색상은 흰색,흙색,파란색,녹색 정도일 정도로 단순함과 소박함으로 가득차 있지만 그 속에는 아름다움과 풍요로운 어머니의 넓은 마음이 전해져 오는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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