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제1공화국 - 해방에서 4월 혁명까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1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현대 사회의 흐름과 구조를 파악할 수가 있다.나아가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고 대처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갖을 수가 있을 것이다.길게는 조선시대의 유교체제와 봉건적인 사회상 그리고 무능력하고 앞을 내다볼 줄 몰랐던 구한말 위정자들의 안이한 자세와 태도가 국권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던 아픈 역사가 있었다.나라의 독립을 위해 의연히 일어선 의용군,독립운동가,뜻있는 인사들이 자주적인 독립을 원했건만 약한 국력 앞에 강대국들은 또 한 번 이나라를 어두컴컴한 터널로 몰고 가고 말았던 것이다.

 

독립의 기쁨도 잠시였을 뿐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면서 미국과 소련의 이념과 사상의 종속국가로 몰락하면서 뜻있는 인사들은 신탁통치를 분연히 반대하면서 자주독립국가의 실현을 위해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이승만정권과 김구는 한 판 승부를 벌이지만 이승만정권의 비호하에 김구는 불행하게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아울러 이승만은 5.10선거를 앞두고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을 내세우지만 그것은 술수에 불과했다.나아가 1948년 제주도에선 군.경에 의한 남로당 계열과 무고한 주민들이 대량 학살되고 여.순반란 사건까지 번져 나간다.이를 기화로 정권유지용으로 국가보안법의 서막이 이루어지면서 국가체제에 반하는 자들은 무조건 잡아 들여 무참히 인권탄압을 자행한다.

 

이 글이 1945년 해방무렵부터 1960년 4.19에 이르기까지의 불행하고 굴곡진 이승만 정권의 실상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서중석저자는 해방 50주년을 맞이하여 갑자기 정부에서 '이승만 살리기'를 접하면서 극우반공세력,극좌혁명세력,중도합작세력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3년 동안 어떻게 활동했는가를 연구한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를 출판한 이후 조봉암과 4월혁명에 관한 자료를 모은던 중 이승만 정권에 초점을 맞춰 논문과 저서를 준비하여 이 도서의 집필에 착수했다고 한다.1980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승만 정권을 매도하던 언론세력들이 이제는 이승만,박정희 신드롬을 추켜 세우고 있다고 하니 과연 이 나라에 정치민주화란 무엇인가가 허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국을 등에 업고 탄생한 이승만정권은 부정부패로 얼룩진 추한 한시대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권에 방해되는 세력은 가차없이 학살을 저지른 짐승만도 못한 추악한 인물이다.제주 4.3사건,여수반란사건,지리산 빨치산 사건,보도연맹사건 모두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저지른 야만적인 행위였다.그런데 이러한 인물을 미화하고 추켜 세우려고 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가 없다.나아가 1956년 5.15정부통령 선거에서 장면부통령 죽이기,진보당 조봉암 죽이기,정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획책한 3.15 부정선거가 1960년 마산에서 김주열의 죽음으로 4.19의 도화선이 된다.파죽지세로 몰려 오는 학생과 군중의 위세에 눌린 이승만은 불안한 상황에서 깃발을 내려야만 했다.

 

한국현대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권력욕이 강했던 이승만,박정희 정권 모두 장기 독재정권을 탐하려다 끝내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던 인물들이다.그들을 미화해서는 절대 안될 일이다.인권을 유린하고 자주독립,민주화의 요구를 묵살하고 권력에만 혈안이 되었던 그들의 종말은 예견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역사 바로 세우기는 끝난 것이 아닌 진행형이기에 국가와 민족,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설익은 상태로 끝내서는 안될 것이다.확고한 의지와 실행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궁녀의 하루 - 여인들이 쓴 숨겨진 실록
박상진 지음 / 김영사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왕과 왕비 등 왕실 가족들을 보살피고 보호하던 임무를 맡았던 왕녀에 대한 삶은 다양하기만 하다.팔자가 센 여식,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궁궐로 보내던 시절이 있었다.나이 네, 다섯 살부터 열 살 남짓한 어린 소녀를 궁궐에 보내 가장 밑바닥 생활부터 노비 등을 거느릴 수 있는 제조상궁에 이르기까지 직급과 임무는 천차만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설겆이,빨래하는 일부터 임금과 가장 지천에서 왕과 왕비를 보호하는 지밀상궁 그리고 그 윗선인 부제조상궁,제조상궁이 수직으로 일종의 궁녀의 서열이 매겨졌던 것이다.

 

 

이들이 궁녀가 되고 싶다고 해서 모두가 궁녀로 발탁되는 것이 아니었다.그 선발기준은 선조 중에 강도나 역적 등 죄 지은 자가 없어야 하고,선조나 가까운 친척 가운데 중병을 앓은 자가 없어야 하는 등 신원조회를 거쳐야 했다.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유부녀는 아예 궁녀로 발을 들일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처녀 감별법'이라는 것을 이용했는데 의녀가 앵무새의 생피를 처녀의 팔뚝에 떨어뜨려 피가 묻으면 처녀이고,안묻고 흘러내리면 처녀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궁녀의 유래는 삼국시대 이후부터 비롯되고 고려 말의 이곡 선생이 지은 주행기(舟行記)에 부여성 낙화암에서 삼천 궁녀가 금강으로 떨어져 내렸다는 기록이 있었고, 중국에서는 하,은,주대부터 있었다고 하니 그 역사가 유장하다는 생각이 든다.왕실,황실을 보필하고 시중을 들 만한 대상이 어린 소녀들이 대상이 아니었을까 한다.궁녀들은 입궁 시기와 소속 부서에 따라 지위의 고하가 정해지고 위계질서가 확연했다.가장 높은 상궁부터 그 밑에 나인이 있었다.출신 계급은 중인,상민 출신으로 충원되었으며 필요하지 않을 때에는 선발을 하지 않는다든지 있는 궁녀를 감원차원에서 퇴출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일단 궁녀로 들어 오면 죽는 순간까지 궁녀로 남아야 하기에 언감생심 혼인은 생각하지도 못했다.그렇기에 과년에 이른다든지 방자(房子)와 같이 애송이 궁녀의 경우에는 외로움과 유혹을 이겨 내지 못하고 별감이나 왕자들과 잠자리를 하다 덜컥 아이를 갖게 되고 이것이 궁궐 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나게 되면 궁녀는 왕의 명령에 따라 극형을 면치 못하기도 했다.그 가운데 세종의 며느리 봉빈과 소쌍이 나눈 동성애사건은 '채홍'에서도 잘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 봉건적이고 윤리적인 사회에서 그러한 행동은 용서를 받지 못한 행위였다는 생각이 든다.그런데 궁녀들은 먹고 자고 입는 문제가 궁궐에서 해결되기에 경제적인 수입은 직급에 따라 차이는 나지만 오랜 세월 궁녀로 재직하다 보면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글에 실린 대표적인 궁녀들의 삶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사람들이 많다.죽음까지 함께 한 기옥과 서향,연산군의 희생양이 된 상궁 조두대를 비롯하여 조선 최고 갑부 궁녀가 된 박상궁,신경숙작가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리진(李眞),영조의 어머니 숙빈최씨(침방나인 출신임),명나라 출신 궁녀 굴씨,조선의 성녀 오타 주리아를 소개하고 있다.

 

 

궁녀들이 왕과 왕비,왕자 등을 지근에서 수발을 들고 보살피면서도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었기에 이번 글을 읽으면서 궁녀의 역사,선발과정,직급,하는 일,에피소드 등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 다행이다.역사의 뒤안길로 묻힐 뻔했던 궁녀들의 삶은 비록 빛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왕조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고 이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반추하는 것도 역사 학습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 노비들, 천하지만 특별한
김종성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관가 및 일반 부유층 집에서 일해 주고 생계를 이어가던 노비들의 삶의 애환을 그린 이 글은 말그대로 천하지만 특별한 존재였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고대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노비의 변천사 및 노비의 다양한 노비제도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흥미롭기도 하지만 노비들만이 안고 있는 삶의 애환은 기구하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노비의 종류가 공노비부터 사노비를 크게 대별하고 공노비는 다시 선상노비와 납공노비로 구분하여 사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구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노비의 역사는 고대로부터 시작하는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농경시대를 이루며 살아갔던 시절에는 일손을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타국을 침략하여 젊은 사람들을 인질로 끌어 오기도 하여 노비로 삼았다.특히 서양에서의 농노제도하에서 노비에 대한 제도를 알 수가 있으며,일본에서는 히닌(非人)이라고 해서 사람 차별을 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알게 되는데 이것은 엄밀한 의미의 노비와는 다른 양상이지만 신분차별을 놓고 볼 때에는 농노,히닌,노비 모두가 사회제도의 혜택을 못받은 부류.계층이라고 여겨진다.

 

이 글은 천하지만 특별한 존재로 취급되는 18개의 키워드로 읽는 조선의 노비제도를 보여 주고 있다.즉 그것은 노비의 개념,기원,결혼,직업,사회적 지위,종류,몸값,의무,법률관계,재산,자녀,노비의 면천,저항,제도의 추이 등으로 기술하고 있다.노비제도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고려부터 시작하는데 고려의 형법지,조선의 경국대전의 형전,대명률 직해에서 노비의 제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가 있다.

 

사회적으로 크게 대우를 받지 못했던 노비들은 국가부터 지주층에 이르기까지 인력관리 차원에서 꼭 필요한 존재였건만 그들의 신분은 대부분 세습적이어서 면천되기란 하늘에 별따기였다.노비라는 신분이 싫어 도망이라도 치려다 발각되고 붙잡히면 극형을 면치 못했던 것도 고려,조선의 엄격한 신분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특히 사노비의 경우 솔거노비는 주인이 함부로 대할 수가 있었으며 외거노비는 대하는 정도가 솔거노비와는 판이하게 달랐고 중세유럽에서 노예인지 농노인지에 따라 대우가 달랐다는 점이다.즉 대우가 다르다 보니 삶의 질도 달랐으리라.

 

노비는 열여섯 살 이상 예순 살 이하 주가 되는데 관청에서 일하는 공노비는 한성에선 2교대로 지방에선 7교대로 교대 근무를 하고,관기(館妓)의 경우에는 관청의 부름에 따라 성적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그중에 관비(館婢)가 있었는데 성균관 여자 노비를 이르며 얼마 전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서도 관비,꼬마 노비 즉 직동이 등장하여 노비에 대한 개념을 살짝 맛볼 수가 있었다.나아가 납공노비는 면포,저화를 납부해야 했다.특이한 점은 아버지가 성균관 노비일지라도 어머니가 다른 관청의 노비이면 자식은 어머니를 따라가야 하고 "다른 비한테서 태어나면 이원으로 충원된다"는 점이다.즉 이원은 말단직 관리로서 관원 밑에서 서리나 아전 혹은 아역(衙役)을 맡고 그들은 무료봉사여서 비천하기 이를 데가 없다.

 

조선 후기로 넘어 갈수록 노비들의 저항이 갈수록 확산되고 도망간 노비를 찾고 노비의 저항을 먹는데 관리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게 되면서 사노비의 주인 및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커다란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던 것이다.그래서 노비들을 정해진 기간 즉 일종의 계약직으로 부리게 되니 노비들은 비인간적인 처우를 어느 정도 감내할 수가 있고 임금노동자로 될 수가 있었다.도망간 노비(추노)를 포기한 점도 이 노비계약직이 한 몫을 하기도 했다.이러면서 시대의 변화,흐름에 따라 노비제도는 갑오개혁이 시작되면서 제도적으론 노비제도가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실제로는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노비는 존재했다.

 

대부분 기본적으로는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노비로 사는 것이 속이 편했을지 모르지만 이 도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주인과 국가로부터 받는 가렴주구와 같은 행정과 인격모독,비인간적인 처우 등은 당대 사회를 이끌어 가는 기반일 수도 있지만 노비 개인에게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가 없었던 개인과 가족의 비극이었다고 생각한다.모양과 무늬만 다를 뿐 현대에도 노예,노비와 같이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들이 얼마나 많을까를 생각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서울을 걷다
권기봉 지음 / 알마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끔 네이버 사이트에 들어와 연대별 변천사가 담긴 서울의 모습을 들여다 보면 하루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 가고 있다는 실감을 하게 된다.구한말 앙상하게 여기 저기 난맥상으로 얽혀 있는 초가와 광목옷,족두리,곰방대,망건,상투를 튼 백성들의 모습이 일제 강제기에 들어와서는(특히 1920,30년대) 도시계획과 도로확장,신식건물 등이 들어서면서 모더니즘 서울을 발견하게 된다.나아가 해방후 한국전쟁 와중에 폐허가 된 서울의 모습은 온통 휘어지고 뭉개지고 헐린 모습이 위주가 되며 1960년대 들어서면서 경제개발 계획,도시화 계획에 따라 농촌의 이농현상이 급격해지면서 증가일로의 서울 인구를 분산시키고 좁은 면적에서 용적률을 높이기 위해 서울 강남개발,아파트 건설이 현재까지도 진행이 되고 있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한 조선은 현재까지도 그 명맥이 이어지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중심지로 확고하게 자리매김되고 아시안 게임,서울 올림픽을 치루고 괄목할 경제성장을 보이면서 전세계인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다.서울 중심부가 명동에서 이제는 강남역 부근으로 옮겨 가면서 세월의 격세지감,시대의 흐름,변화까지도 읽을 수가 있는데 도시계획에 따라 바둑판과 같은 사통팔달의 도로망,서민들의 교통망인 전철,쭉쭉 뻗어 있는 초고층 건물들의 위용이 서울의 모습을 상징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이렇게 서울의 모습이 세계 어느 나라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생각을 하지만 속내먁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이러니한 면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명품도시,드림 허브에 맞춰 서울시민,내방객들이 숨쉬는 공간이 획일적이고 삭막하고 상업적인 색채로 치장되어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싶다.그것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한국 본래의 전통 건축물,오래도록 기억해야만 할 건물,거리가 정권의 입맛에 맞추다 보니 있어야 할 것들은 온데 간데 없다.또한 그린벨트 해제에 따라 무차별적으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기존 주민들은 정처없이 또 다른 주거지를 찾아 떠나고 투기를 노린 일부 자본가들로 서울의 지가,부동산가는 천정부지로 오르기도 했다.지금이야 경제버블이 꺼지면서 아파트 가격이 주춤거리고 있다고 하지만 한국인의 정서상 아파트에 대한 미련은 절대 놓지를 못한다.

 

기자 출신인 권기봉저자는 서울을 네 가지 요소로 나뉘어 직접 탐방하여 관찰하고 기록하고 인터뷰하고 자료를 조사하는 등 세심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음이 잘 나타나고 있다.일상을 걷고,장소를 걷고,의미를 걷고,문화를 걷는다는 서울의 커다른 줄기는 읽는 내내 불편함이 저절로 배여져 나왔다.그것은 주지하다시피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한 획일적인 도시개발과 부실공사,전시효과를 노린 행정건설 등으로 인해 개성없는 도시,국적없는 도시가 되어버린 지가 오래이다.성수대교 붕괴,삼풍백화점 붕괴가 대표적인 부실공사의 상징이다.또한 비록 일제 강점기 일본에 의해 지어진 건물이지만 후손들에게 역사적 교훈과 진보적인 미래창출을 위해서라면 일부분이라도 그 잔재를 남겨 놓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고 처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모두에서 말했지만 구한말,일제 강점기시 지어진 건축물들이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고 미래를 밝혀주는 등대불이 아닐런지 묻고 싶다.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민주화 인사들이 수없이 희생되고 탄압을 받았다.민주화 인사들의 전향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실천적인 사고에 의해 정치민주화가 이루어졌건만 민주인사에 대한 존경과 배려는 없고 지난 군사독재정권이 이룩해 놓은 것들을 찬양하는데 서울시가 앞장서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예를 들어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신당동의 박정희대통령 사저를 등록문화재로 등재했다는 것과 전쟁기념관이 전쟁 선행학습 등으로 변질되고 피맛골과 같은 서민들의 향취,한국만이 갖고 있는 전통거리를 불도저로 무참히 헐어 버리고 현대식 건물로 탈바꿈시켰다는 점이다.무조건 현대식 건물로만 지어 놓아야 서울이 품격있고 명품에 버금가는 도시인가?

 

서울의 과거,현재를 조망하면서 느끼는 점은 한국인의 기질상 '콩 볶아 먹듯' 짓고 다시 헐고 또 짓고를 반복해 나가고 있다.정부,시청,건설업체 등이 어떻게 짜고 치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울시민,타지에서 올라 온 사람,외국인들이 서울을 바라보는 첫인상이 아늑하고 깨끗한 공기와 시민정신,한국고유의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는 진짜배기 서울의 모습을 재현해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운의 조선 프린스 - 조선왕실 적장자 수난기
이준호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권력은 부자(父子)간에도 주고 받지 않을 만큼 냉혹한 세계이다.또한 권력을 일단 잡게 되면 세상을 다 거머쥔 듯 선량(善良)했던 지난 날의 포부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체제유지를 위해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국정을 혼란케 하고 민심의 이반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 정치권력의 속성이라고 생각한다.그러한 관점에서 조선시대의 왕권 계승은 『훈요십조』에 의거하여 적장자(嫡長子)가 뒤를 이어야만 마땅한데 조선 왕조 27대 적장자가 왕위 계승을 한 것은 7명의 왕 밖에 없고(문종,단종,연산군,인종,현종,숙종,순종) 나머지는 상왕으로부터 이쁨을 받은 자가 왕의 바톤을 이어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조선은 명,청 관계에서 힘의 논리,문명의 발달 정도,외교관계에서나 늘 조공을 하고 사대(事大)의 예를 갖추어야 했고,신권(臣權)이 강하다 보니 왕 혼자서 다음 왕을 전적으로 결정할 수가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또한 왕자들 가운데에서는 왕이 되고자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들,이를테면 공신들,친인척들을 매몰차게 숙청 내지 유배를 보내야만 속이 시원했을 정도이다.게다가 왕으로서 자질이 뛰어나다 해도 왕의 귀에 들려오는 소문이나 평가가 좋지 않다면 후대를 위해 일도양단의 과단성을 보여야 할 때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거하고 조선사의 전문가들의 관심과 격려에 의해 세상에 나온 이 글은 조선왕조 가운데 적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상황,개인의 자질,왕과 왕비,친척간의 이권 다툼,부왕의 그릇된 판단 등에 의해 적장자로서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한 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자업자득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이 군주세습의 방편으로 적장자 계승 원칙은 고려,조선에서 만들어졌는데 중국에서는 아들들이 황권을 노리고 싸우는 꼴이 싫어 '밀건법'을 사용하여 황제가 죽은 뒤 황세자 및 신하들이 황제가 점지한 봉투를 열어 황제를 선정했다는 것이다.조선에서도 밀건법이 있었다면 왕권 다툼으로 왕실 주위가 시끌시끌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명,청과의 왕의 책봉문제,왕과 왕비(정비,후궁)와의 관계,신료 및 주변 인물들의 입김 등으로 밀검법은 취지는 좋지만 조선 당대 상황으로는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불노,난언죄로 생을 마친 지운을 비롯하여 여색에 빠지고 세자로서 자질이 좋지 않았던 양녕대군,인수대비의 과한 교육열과 철저한 계산하에 잘산대군(성종)이 왕으로 임명되고 실제 적장자였던 제안대군과 정치적 자질이 부족했던 월산대군,계비에 의해 적장자로 태어났지만 모함에 의해 생을 마감했던 영창대군,볼모로 청국으로 끌려 갔던 소현세자가 귀국 후 급작스런 죽음(부왕의 암묵적인 지시에 의한 독살설) 등으로 왕이 되는 것이 당시의 관례이고 정석이었지만 부왕의 오판,왕와 왕비 간의 알력 및 세력 다툼 등으로 적장자로서 제 역할과 기능을 못하고 초야에 묻혀 버렸던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조선시대의 정치 상황과 현대 정치상황과 제도,시스템 면에서 판이하지만 '국리민복'을 제1의 과제로 삼아 차기 지도자를 선택하고 선진문물을 일찍이 수용해 나갔더라면 사색당파,천주교 탄압,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과거는 없었으리라 생각을 해본다.권력은 달콤하지만 누구를 위하여 쓰여지느냐에 따라 사회의 명암이 판가름 난다는 것을 소중한 교훈으로 삼아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