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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 -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개정증보판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역사의 기록은 대개가 국가의 지도자 및 굵직굵직한 사건 및 왕조를 중심으로 흘러가기에 왕의 주변에 살던 사람들의 기록은 자칫 야사로 흐르기 쉬우며 객관적으로 신뢰성이 떨어지기 쉽다.특히 애매모호하게 알고 있는 환관과 궁녀들의 사생활은 베일에 가려지고 도외시(度外視)되는 경향이 있다.왕과 왕비,세자,대비 등의 수발을 들고 궂은 일을 감내하는 직업으로 궁녀의 일상은 보이지 않게 억압과 복종의 시간이었으리라.
궁녀들의 가문,태생,입궐동기,삶 등이 사료와 구전에 의해 잘 정리한 이 도서는 읽는 내내 왕실의 음과 양을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가 있어 다행이었다.왕과 왕비,세자 등을 수발하면서 왕족들의 비리 및 음행 등이 바깥으로 세면 왕권의 체면이 실추되고 명예가 훼손되기에 궁녀에 대한 기록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구한말 고종과 순종의 수발을 들었던 궁녀들의 구전도 구체적이고 신뢰성이 있는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연성만은 확실하다고 느껴진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사사건건 간섭하고 시비를 걸었던 관료들도 궁녀 문제만은 언급을 회피했을 터이기에 2,000년 역사 기록 중에 궁녀에 관한 것은 가물에 콩나듯 할 것이다.이규태 학자와 김용숙에 의해 각각 <개화백경>과 <조선조 궁중 풍속 연구>가 궁녀에 관한 객관적 사료가 될 것이고 계축일기,인현왕후전,한중록,법정 기록인 추안급국안이 그나마 궁녀의 일생을 가늠해 볼 자료임에 틀림없다.
대개 생활이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궁녀들은 공노비 내지 사노비의 태생으로 아름아름 추천을 받는다든지 왕족의 눈에 띄여 입궐한 경우가 있다.이들이 왕과 필이 꽂혀 지밀상궁까지 오르게 되면 일국의 비(妃)가 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영조의 생모 최숙빈과 이은의 생모 엄상궁이다.그들이 왕비의 자리에 오르더라도 생이 마냥 녹녹치 않았고 비참한 삶을 마감해야 했던 것을 보면 왕족끼리의 암쟁과 질투,비하 등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비대해지는 궁녀의 수를 대폭 구조 조정했던게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인사개편이 있었으며 특이한 것은 주간 근무와 야간 근무가 있었다는 점이다.근무 조건과 급여 조건이 어느 정도 선진화 되었기에 괄목할 만하지만 궁녀들의 삶은 홀로 서기이다.이성과의 교제는 철저히 금지되었기에 억눌린 성을 분출하는 방법은 동성애와 같은 대식(對食)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세종대왕의 둘째 며느리 봉씨가 궁녀 소쌍(召雙)과의 대식 행위를 하다 세종의 귀에 들려오고 결국 궁궐에서 쫓겨나게 된다.
대전(大殿) 소속의 각 방 궁녀들을 보면 지밀,침방,수방,색장,보기,안소주방,밧소주방,생것방,세수간,세답방 등이 있으며 같은 상궁이라도 급에 따라 받아가는 월급(쌀,북어포 등)에도 차이가 나기도 하며 궁궐에 머무는 궁녀가 있는가 하면 정해진 하루 일과가 끝나면 바로 퇴근하는 궁녀도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삼국 시대 이래로 조선시대까지 중국에 공녀(貢女)로 보냈는데 고려 시대엔 170명,조선 시대엔 146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에 보내진 공녀들이 잘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궁녀들이 많은데 중국의 풍습에 따라 왕이 죽으면 순장(殉葬)을 당하는 경우(청주 한씨)가 있었다.원나라로 간 기왕후가 대표적이고,임진왜란 와중에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가게 된 오따 줄리에는 도쿠가와이에야스의 절친 시녀였는데 천주교인으로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은 여인으로 남게 되며,거꾸로 중국 출신 궁녀도 눈에 띄는데 굴씨와 최회저이다.
궁녀들은 네 살부터 일고 여덟살 사이에 입궁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잔심부름부터 갖가지 궂은 일을 담당할 것이고 선발 기준은 대부분 나인(內人)의 친족 중에서 선정하고 지밀만 상궁의 친족 중에서 선정한다고 한다.(순종의 지밀 나인이었던 유녕헌 상궁과 고봉운 상궁의 증언) 입궁한 궁녀들은 솔거 노비 신세가 되어 왕과 왕족이 마음대로 부리지만 왕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엄밀히 구별했고,살아가기가 힘들어 지인 궁녀들에게 간곡히 부탁해 궁녀로 들어온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예나 지금이나 뒷배경이 중요하다는 것은 새삼 말할 나위도 없을거 같다.그중에 유모와 보모 상궁이 있는데 유모 상궁의 자격은 까다롭기 짝이 없다.왜냐하면 일국을 이끌어 갈 왕이 될 그릇을 유모가 만들어야 하는 기본이기 때문이다.
궁녀와 내시들의 삶은 혼인이 철저히 차단되었기에 죽으면 곧바로 화장을 하게 되고 출궁을 하게 되면 친인척에 의탁하는 경우도 있는데 출궁한 궁녀들끼리 모여 사는 경우도 있고(서울 갈현동의 궁말),내시들이 모여살던 곳이 서울 효자동이라고 한다.(당시엔 화자동)
돈과 물질이 풍요로워진 요즘엔 어느 정도 먹고 산다 싶으면 집안에 보모를 쓴다.보모는 그 집안의 모든 일과 아이들의 교육도 어느 정도 신경을 써야 하는 처지인데,돈많은 부유층이 들여오는 보모들은 대부분 교포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저렴한 임금에다 마음대로 부려 먹는 현대판 솔거 노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궁녀는 왕족의 그늘 속에서 녹록치 않은 비련한 삶을 살아 갔고 그들이 남긴 자료들이 적다면 적지만 다행히도 문학작품과 증언,사료들에 의해 어두운 땅 속을 뚫고 세상에 나오게 되어 다행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