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역사를 따라걷다
이훈 지음 / 역사공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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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거리상 가장 가까운 일본 영토 쓰시마(對島)는 부산에서 쓰시마 최북단 가미쓰시마초(上對島町)까지는 49km밖에 떨어지지 않았다.맑은 날 가미쓰시마초 전망대에서는 부산과 남해의 산하가 아련하게 보이고 밤에는 부산의 야경이 찬란하게 다가오는 곳이다.거리와 역사적으로 쓰시마는 한국과 오랜 교류와 문물이 왕래했던 곳이고 일본에선 변방에 있는 외딴 섬이라 본토(혼슈,큐슈,홋카이도,시코쿠)의 영향력은 크지 않아 그들이 말하는 내지와는 물질문명이 덜 발달되어 있기도 하다.부산에서 쓰시마에서 가장 큰 도시 이즈하라까지는 페리를 이용한다든지 후쿠오카를 경유하여 이즈하라까지 가는 교통편이 있는데 한국과 역사,문화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고 조선의 문화 자취가 남아 있기에 한 번쯤 가보고 싶기도 하다.

 

 

약 8,000년 전 한반도의 융기문 토기,3~4세기 무늬없는 토기가 전래되면서 쓰시마는 한반도의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815년에는 신라어 통역관 설치,1274년 여.몽 연합군의 쓰시마 습격,1366년 고려국왕이 대마도주에게 왜구 단속을 요청하면서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되었으며 1419년에는 이종무가 아소완 공격으로 대마도 토벌이 이루어지면서 쓰시마는 조선과의 무역과 어업(부산포.염포.제포)에 종사하게 된다.나아가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되고 쓰시마를 거쳐 귀환하게 될 경우에는 쓰시마도주의 도항증명이 문인(文引)발급이 가능해지며 조선의 3포에 사는 일본인이 소요를 일으키며 조선은 쓰시마도와 통교 단절을 선언하게 된다.

 

 

쓰시마는 임진왜란 당시 소요요시토시가 고니시유키나가 군단의 선봉이 되어 조선 침략을 감행했으며 왜란이 끝난 후 1609년부터는 국교회복과 동시에 세견선 및 사자 파견 등 통교가 시작되고 조선에서는 일본과의 회담 겸 쇄환사를 파견하는데 이러한 조선과 쓰시마간의 통교가 이해관계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며,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탄생되면서 쓰시마는 일본 외무성이 담당하게 되고,구한말 러일전쟁을 앞두고 러시아는 쓰시마를 교두보로 삼게 되며 제2차 세계대전시에는 대마도를 요새화되기도 한다.현재 쓰시마는 나가사키현 소속이며 쓰시마 공항 개항과 부산 영도구간 자매섬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엄마 말과 아기 말이 땅에 드러누워 있는 형상을 띤 쓰시마 남쪽섬과 북쪽섬 두 개로 되어 있고 산악이 80퍼센트 이상이며 인구는 5만여명인데 가장 큰 도시 이즈하라에 9,000여명이 살고 나머지는 산촌과 어촌에 촌락을 이루고 있는데 쓰시마는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되고 내지의 지원을 받지 못한 탓인지 많이 낙후되어 있다.

 

 

조선과 쓰시마를 오가는 사스나 포구를 비롯하여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위해 쌓은 나고야죠(名護屋城),에도까지 조선 통신사를 수행한 대마번주의 가신행렬,조선 인삼을 취급한 약국,부산 초량 왜관,덕혜옹주와 소오 타케유키의 쓰시마 방문 모습,구한말 면암 최익현 선생의 비가 있는 슈젠지(修善寺),신라 박제상을 기리는 추모비,아리랑 마쓰리(축제) 행렬 등이 인상적이다.조선과 도쿠가와 막부가 260년간 유지한 선린우호가 메이지 정부에 의해 부산 왜관을 쓰시마번으로 접수하면서 조선 관계에서 손을 떼게 된다.

 

 

역사적 기록물인 <한단고기(桓檀古記)> 태백일사에는, "400년 당시 쓰시마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분국이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어떤 이는 이를 바탕으로 신라가 8세기까지 쓰시마를 지배하였으며...와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왕조와 타이슈헨넨랴쿠(對州編年略) 범례 '산가요약기'에 쓰시마가 신라 및 고려국의 목이었다는 것이 지배적이다.다만,이것은 정치적 관계를 나타내고 있기에 액면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며,해좌전도(1857년 이후),조선전도(18세기 말),대한전도(1899년)에는 쓰시마가 부산의 아랫부분에 그려져 있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국제사법재판소에 독도 문제 판결을 의뢰하려는 작금,쓰시마 역시 역사적,문화적인 관계를 놓고 볼 때 쓰시마 역시 과거 고대사 부분에서 한반도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잃어 버린 고토에 대해 한국 정부는 어떠한 생각과 방침을 내세우고 관련국에 대응을 하고 이를 외교문제로 어떻게 전개하려고 하는지 궁금하기만 하다.쓰시마의 역사와 문화는 한반도에서 흘러간 다양한 문화,생필품,언어,풍습 등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알게 되며 가깝지만 멀게만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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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이 품은 한국사 다섯 번째 이야기 : 지명 유래 충청북도편 지명이 품은 한국사 5
이은식 지음 / 타오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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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네 본관이 어디니?"라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그런게 뭐예요?" "저는 무슨 성의 한자를 씁니다." " 본관이 무슨 뜻이예요?"라는 식으로 대답을 한다.이것은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 부모가 자식들에게 자신의 조상에 대한 뿌리를 제대로 가르쳐 주신 못한 탓이라고 생각된다.특히 서구화가 진전이 되고 개인주의 및 핵가족,가족의 의미가 붕괴되면서 족보,본관,조상에 대한 생각이 희미해져 가면서 자신의 뿌리는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된다.

 

나아가 자신이 살고 있다든지 살고 있지는 않더라도 대한의 국토에 산재되어 있는 마을과 면과 읍,군 등의 행정명칭에 대한 유래 및 고사,전설,설화 등을 배우고 이해하며 인식의 폭을 넓혀 간다면 지난 한국의 역사 및 뿌리를 자연스레 학습할 수가 있으며 자신의 고유 정체성 및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부심마저 든다고 생각한다.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명을 제대로 앎으로써 지명 변천과 역사 속의 사건과 인물들을 이해하고 나아가 인간의 역사는 땅의 역사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우치게 된다.

<지명이 품은 한국사>시리즈 충청북도편은 3개시,9개군에 걸쳐 이은식 사학자께서 14개의 참고문헌을 바탕으로 이야기식으로 편하게 들려주고 있다.남한에서 유일하게 내륙에 속해 있는 충청북도는 험악한 산세가 이어지는가 싶으면 넓게 펼쳐지는 곡창지대도 나타나고 시원하게 장관을 연출하는 호수도 독자들의 시선을 끈다.

 

삼국시대 충북은 신라에 편입되어 있으며 백제의 침입을 막기 위해 산성을 쌓고, 명나라 이여송은 충북의 산세가 명당 중의 명당이어서 그 혈맥을 끊으려 했던 고사도 나오고 있다.조륵의 자린고비에 대한 고사도 볼만하고 속리산의 속리에 대한 유래,단종폐위와 관련하여 세조가 지나간 상판리 칠복송 이야기,충주의 달래강 이야기,거렁뱅이가 추위를 녹이기 위해 잠들었던 볏짚단 아래가 수암보 온천이 된 유래 등이 매우 흥미진진하고 유익하고 이렇게 좋은 땅에 무궁무진한 고사와 유래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특히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삼고 있었는데 위기 및 난관이 닥칠 때에는 으례 불교 사찰에 들러 자신의 한계상황을 부처님께 의지하고 밝은 내세를 빌었던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 특징 중의 특징이다.중생을 구제하고 윤회사상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민족의 혈맥인 아름다운 금강(錦江)을 휘감고 살아가는 산맥들로 둘러싸여 있는 충청북도는 산자수명 그대로이다.또한 저자가 사료에 입각하여 꼼꼼하고도 재미있게 글을 전개하고 관련된 지역의 현재 모습을 그림으로 보여주기에 이해력과 학습력이 배가 된다.한국의 내륙지방 충북의 뿌리를 이 기회에 알리고 지명에 얽힌 유래와 고사,설화를 학습하는 문화학습의 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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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인의 책 -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
윤무한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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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한국사는 군사독재 정권의 장기화에 따른 인권침해와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핵심이슈이고 정의와 상식이 무너져 내린 암울한 시기가 군부에 의한 5.16쿠테타와 장기집권을 위한 유신헌법,민주화 세력의 무잡이 연행,탄압,사형 등이 이어지고 끌려간 민주 인사들은 온갖 죄목을 뒤짚어 씌고 억울한 옥살이와 인명경시에 가까운 고문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다 유명을 달리한 분들이 많다.

 

 

정권을 쥐고 있는 현정부를 비롯해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에 이르는 국가 최고 통치자들이 거개가 미국 자본주의의 종속이 되고 한국 고유의 정체성과 문화 등은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그들의 입김에 따라 한국의 통치자들은 우왕좌왕하기도 했다.남과 북이 분단되고 대치된 상황에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또는 선거때만 되면 '표'를 너무도 의식해서인지 진보적인 인사들의 언행이나 북한의 돌출성 발언 등을 대대적으로 언론에 유포하고 여론을 민주와 공산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몰아가는 괴이한 형태가 진행되고 아직도 대표적인 수구 언론계에서는 좌빨이니 용공세력이니 주사파라고 줄기차게 재탕 삼탕하고 있다.이젠 이러한 용어에 대해서는 '개 짖는 소리'로 알아듣고 한귀로 흘릴 뿐이다.이러한 이분법적 사고 행위를 강요하는 나라는 천지개벽 대한민국 밖에 없을거 같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말은 한국 사회에선 있으나 마나 하다.있는 사람은 돈으로 보석 신청하여 풀려나면 그만이고 경제 위기론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불구속 입건하고,전직 대통령의 사법적으로 풀어야 할 죄를 정치적으로 해결되었다고 그 마음 속에 일말의 양심도 없는지 육군사관학교에 등장하고 VIP골프 회동으로 물의를 빚는 자연인이 아직도 특권을 누려야 할 명분이 있다면 이는 여당이나 야당,지성인 모두가 나라와 국민 앞에 죄를 짓는 꼴이다.그래서 눈과 귀를 모두 닫고 살고 싶어도 눈 앞에 벌어지는 사회적 지도자들이 이 모양 이 꼴이니 아래에서는 무엇을 보고 배울 것인가(上濁下不淨)?

 

 

나는 이 시대를 살다 가고 살아 가고 있는 14인의 면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앎은 부족하다.그저 책이나 매체에 떠도는 얘기를 듣고 인식하고 판단할 뿐이지만 공통점이라면 자신을 버리고 대의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멸사봉공의 정신이 담겨져 있다.종교가,작가,언론인,지식인,시인,노동자 등 이들은 분명 지금보다는 나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노동의 진화를 갈구하고 소수가 배불리 먹는 세상이 아닌 대다수가 신명나게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헌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전통 회색빛 한복에 흰 수염을 휘날리며 씨알의 정신을 발양하려 했던 함석헌옹부터 노동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전태일 노동자까지 우리 사회에는 그래도 실천하는 양심과 지성인이 있었기에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품과 지성,색깔과 스타일은 십인십색이지만 지성과 양심을 내걸고 한국 정치,경제,사회,문화,노동의 앞날을 걱정하고 투신했던 인물들이 하나 둘씩 세상과 작별하고 있다.남아 있는 인물들 중에 살아있는 지성인들이 오래도록 한국 사회의 찬란한 빛이 되고 후학들이 이들의 뜻을 본받아 좌.우,진.보라는 이념 대립이 물러나고 부자는 소외계층을 위해 세금을 더내고 소외계층도 더욱 힘을 내어 살아가는 맛이 생기고 희망이 넘치는 사회구현을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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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 -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개정증보판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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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기록은 대개가 국가의 지도자 및 굵직굵직한 사건 및 왕조를 중심으로 흘러가기에 왕의 주변에 살던 사람들의 기록은 자칫 야사로 흐르기 쉬우며 객관적으로 신뢰성이 떨어지기 쉽다.특히 애매모호하게 알고 있는 환관과 궁녀들의 사생활은 베일에 가려지고 도외시(度外視)되는 경향이 있다.왕과 왕비,세자,대비 등의 수발을 들고 궂은 일을 감내하는 직업으로 궁녀의 일상은 보이지 않게 억압과 복종의 시간이었으리라.

 

 궁녀들의 가문,태생,입궐동기,삶 등이 사료와 구전에 의해 잘 정리한 이 도서는 읽는 내내 왕실의 음과 양을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가 있어 다행이었다.왕과 왕비,세자 등을 수발하면서 왕족들의 비리 및 음행 등이 바깥으로 세면 왕권의 체면이 실추되고 명예가 훼손되기에 궁녀에 대한 기록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구한말 고종과 순종의 수발을 들었던 궁녀들의 구전도 구체적이고 신뢰성이 있는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연성만은 확실하다고 느껴진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사사건건 간섭하고 시비를 걸었던 관료들도 궁녀 문제만은 언급을 회피했을 터이기에 2,000년 역사 기록 중에 궁녀에 관한 것은 가물에 콩나듯 할 것이다.이규태 학자와 김용숙에 의해 각각 <개화백경>과 <조선조 궁중 풍속 연구>가 궁녀에 관한 객관적 사료가 될 것이고 계축일기,인현왕후전,한중록,법정 기록인 추안급국안이 그나마 궁녀의 일생을 가늠해 볼 자료임에 틀림없다.

 

 대개 생활이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궁녀들은 공노비 내지 사노비의 태생으로 아름아름 추천을 받는다든지 왕족의 눈에 띄여 입궐한 경우가 있다.이들이 왕과 필이 꽂혀 지밀상궁까지 오르게 되면 일국의 비(妃)가 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영조의 생모 최숙빈과 이은의 생모 엄상궁이다.그들이 왕비의 자리에 오르더라도 생이 마냥 녹녹치 않았고 비참한 삶을 마감해야 했던 것을 보면 왕족끼리의 암쟁과 질투,비하 등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비대해지는 궁녀의 수를 대폭 구조 조정했던게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인사개편이 있었으며 특이한 것은 주간 근무와 야간 근무가 있었다는 점이다.근무 조건과 급여 조건이 어느 정도 선진화 되었기에 괄목할 만하지만 궁녀들의 삶은 홀로 서기이다.이성과의 교제는 철저히 금지되었기에 억눌린 성을 분출하는 방법은 동성애와 같은 대식(對食)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세종대왕의 둘째 며느리 봉씨가 궁녀 소쌍(召雙)과의 대식 행위를 하다 세종의 귀에 들려오고 결국 궁궐에서 쫓겨나게 된다.

 

 대전(大殿) 소속의 각 방 궁녀들을 보면 지밀,침방,수방,색장,보기,안소주방,밧소주방,생것방,세수간,세답방 등이 있으며 같은 상궁이라도 급에 따라 받아가는 월급(쌀,북어포 등)에도 차이가 나기도 하며 궁궐에 머무는 궁녀가 있는가 하면 정해진 하루 일과가 끝나면 바로 퇴근하는 궁녀도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삼국 시대 이래로 조선시대까지 중국에 공녀(貢女)로 보냈는데 고려 시대엔 170명,조선 시대엔 146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에 보내진 공녀들이 잘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궁녀들이 많은데 중국의 풍습에 따라 왕이 죽으면 순장(殉葬)을 당하는 경우(청주 한씨)가 있었다.원나라로 간 기왕후가 대표적이고,임진왜란 와중에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가게 된 오따 줄리에는 도쿠가와이에야스의 절친 시녀였는데 천주교인으로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은 여인으로 남게 되며,거꾸로 중국 출신 궁녀도 눈에 띄는데 굴씨와 최회저이다.

 

 

 

 

 

 궁녀들은 네 살부터 일고 여덟살 사이에 입궁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잔심부름부터 갖가지 궂은 일을 담당할 것이고 선발 기준은 대부분 나인(內人)의 친족 중에서 선정하고 지밀만 상궁의 친족 중에서 선정한다고 한다.(순종의 지밀 나인이었던 유녕헌 상궁과 고봉운 상궁의 증언) 입궁한 궁녀들은 솔거 노비 신세가 되어 왕과 왕족이 마음대로 부리지만 왕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엄밀히 구별했고,살아가기가 힘들어 지인 궁녀들에게 간곡히 부탁해 궁녀로 들어온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예나 지금이나 뒷배경이 중요하다는 것은 새삼 말할 나위도 없을거 같다.그중에 유모와 보모 상궁이 있는데 유모 상궁의 자격은 까다롭기 짝이 없다.왜냐하면 일국을 이끌어 갈 왕이 될 그릇을 유모가 만들어야 하는 기본이기 때문이다.

 

  궁녀와 내시들의 삶은 혼인이 철저히 차단되었기에 죽으면 곧바로 화장을 하게 되고 출궁을 하게 되면 친인척에 의탁하는 경우도 있는데 출궁한 궁녀들끼리 모여 사는 경우도 있고(서울 갈현동의 궁말),내시들이 모여살던 곳이 서울 효자동이라고 한다.(당시엔 화자동)

 

 돈과 물질이 풍요로워진 요즘엔 어느 정도 먹고 산다 싶으면 집안에 보모를 쓴다.보모는 그 집안의 모든 일과 아이들의 교육도 어느 정도 신경을 써야 하는 처지인데,돈많은 부유층이 들여오는 보모들은 대부분 교포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저렴한 임금에다 마음대로 부려 먹는 현대판 솔거 노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궁녀는 왕족의 그늘 속에서 녹록치 않은 비련한 삶을 살아 갔고 그들이 남긴 자료들이 적다면 적지만 다행히도 문학작품과 증언,사료들에 의해 어두운 땅 속을 뚫고 세상에 나오게 되어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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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서울을 걷다 - 버튼 홈스의 사진에 담긴 옛 서울, 서울 사람들
엘리어스 버튼 홈스 지음, 이진석 옮김 / 푸른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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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간 시절과 역사는 후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많은 영감과 교훈을 안겨 준다.참담한 역사의 뒤안길도 있을테고 찬란한 영화가 그림처럼 아롱질 것이며 개인부터 위정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사를 안겨줄 것이다.조선 후기 구한말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려 있던 시기였고 성리학에 바탕을 둔 유교의 국가,은둔의 조선은 남존여비와 관료들의 부패와 무능이 더해져 한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던 가련하고 암담한 시절이었기에 이 도서를 읽어 가면서 많은 것을 생각케 했다.

 

 

 

 

 여행가 및 사진 작가로 19세기말 각국을 유람하던 저자 버튼 홈스의 서울의 모습은 이색적이고 순박하며 위정자와 백성들의 대조적인 삶과 당시의 거리,풍습,정치상황 등을 보여 주고 있는데 청.일전쟁이 막을 내리고 일본의 세력이 차츰 조선에 발을 내딛으면서 그 세력의 기운이 여기 저기 나타나 있음을 실감케 했으며 이 사진은 저자의 통역사 박기호씨의 가족 사진이다.망건을 두른 남자가 박건호씨이고 그의 개방적이고 솔직하며 자연스러운 모습이 인상적이다.사진 찍는 것을 혼이 날아간다고 하여 대개는 사진찍기를 꺼려 했던 순진무구한 당시의 백성들의 생각과 관념과는 대조적이다.

 

1901년 무렵은 작고한 할아버지가 두 살이고 이모 할머니가 태어나던 해이며 할머니의 오빠가 세 살이었던 시절이다.당시 조선은 고종이 주체적인 임금으로 거듭나기 위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내세우고 황제로 자칭했던 시절이지만 일본이 경부철도와 경인선을 세워 물자수송과 침략의 발판을 발호하려 했던 시절이었던 것도 눈에 띈다.

 

 

 

 당시 서울역이 현재 이화여고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서울역 주변의 모습이 아스라하게 다가오며 허허벌판과 같이 황량하며 차츰 외세가 물밀듯이 들여올거 같은 암운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느낌을 받게 되며 중국 연태(당시는 츠푸)에서 제물포에 당도하고 서울까지 오는 길에 마주친 조선인들의 모습은 하얀 광목에 망건과 상투,지게꾼(지지보이)들과 쓰게치마를 두른 여인네들의 모습 등도 1세기전의 모습이었기에 선조들의 한숨과 숨결이 투박하게 전해져 오는거 같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영정사진이다.사진 속의 모습은 갖은 풍상을 겪은 탓인지 세상을 체념과 관조로 바라보는 듯하다.1898년 서거하기 전에 찍은 사진인거 같다.암묵적으로 며느리 명성왕후 시해를 묵인한 그였기에 권력의 무상함과 비열함을 동시에 느낀다.

 

 

 

서울 남대문 앞 시민들이 저자 거리에 나와 물건을 흥정하고 주막을 드나들며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세상살아가는 얘기가 전해져 오는거같다.

 

 

 

 

 다양함을 자랑하는 당시의 조선의 모자로 흑립,정자관,남바위,길모,초립이 곰방대를 물고 뻐끔뻐끔 궐련을 피우고 있을 당시의 어른들의 모습이 삼삼하다.

 

 

 

한강 철교가 막 부설되었지만 한강변에서 여의도쪽으로 가는 길은 나룻배 등이 유일한 교통 수단이고 사진은 마포나루 쯤일거 같다.언덕배기에 가뭇하게 서있는 민가와 나룻터에 부산나게 움직이는 백성들의 일상이 정중동 그대로이다.

 

 

 

다닥다닥 처마가 빼곡이 연결되어 있는 흙담집과 초가,동구밖과 우물가의 아낙네들이 담소하는 모습이 정겹게만 다가온다.

 

 

 

 일본 군인들이 도열하여 행진하는 모습이 다가올 을사늑약과 한일합방이라는 비운의 조선을 암시하고 있다.

 

 

 

 

당시 서너살이었던 황태자비 이은(垠)과 고종황제,아들 순종이 나란히 서있다.고종과 순종은 기울어 가는 조선을 어떠한 구상과 목표로 되살리려 했을지 잔뜩 굳어 있는 표정에서 고뇌와 회한이 서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서울 명동성당에서 바라본 서울 중심부의 거리와 기와집들의 한산한 모습이다.

 

 

 '은둔의 나라'로 알려진 구한말 서울의 모습을 사진이라는 기록을 통해 부분적이나마 당대의 시간과 공간 속을 탐방하게 되었다.갓,쓰개치마,흰 광목,상투,지게,민초들의 고단한 삶과 외세 앞에 위정자들의 고뇌와 한 숨섞인 회한은 뒤쳐진 문명 개화와 관료들의 부패와 무능,국력의 쇠잔함 등이 결국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기고 나라 잃은 설움과 이념과 사상으로 강국들에 휩싸인 채 앞을 예측할 수 없는 한반도의 분열이 현재까지 진행형으로 남아 있어,국가의 의미와 운명을 깊게 생각하고 지난 시절을 통해 역사가 주는 교훈을 새삼 가슴 아프게 음미하는 뜻깊은 시간을 갖게 되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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