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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1972년 10월 17일 저녁 7시 대통령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이른바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민족사의 진운(進運)을 영예롭게 개척해나가기 위한 중대한 결심"을 담았다는 이 선언을 통해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하고 현행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새로운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겠다고 밝혔다. -p29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출신으로 5.16 군사 혁명에 의해 대통령에 오르고 장장 18년 간을 독재정치를 원없이 펼치려다 부하의 손에 의해 운명을 달리한 인물이다.그가 대한민국을 통치하던 시절의 치적은 명과 암이 극단적으로 엇갈린다.그를 기리고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한국의 경제 개발에 주력하면서 대한민국의 산업화,도시화를 이끈 장본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반면 민주화,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탄압과 유린을 일삼았던 인물로 각인된다.경제 개발에 따라 삶이 풍요로워진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수용 가능하지만 정권 유지 차원에서 자행된 민주인사 및 노동계 등의 인물들에 대한 무차별 인권 유린 사태는 아직도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1972년 10월 17일에 시작된 유신(維新)은 1979년 10월 26일에 이르러 종식(終熄) 되었던 것이다.유신헌법이 발표되던 무렵 한반도 내외부 정세는 과연 비상조치가 불가피하고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일대 유신적 개혁'이 필요했던 것일까.그런데 박정희가 5.16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때부터 유신적 개혁이 발효되던 시점까지의 정치 행위는 과연 민주주의를 착실하게 이행했던 것일까.반란,개헌,친위 쿠데타 등으로 볼 때 박정희의 정치적 행로는 종신집권을 위한 혼자만의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닐까.그의 수족이었던 중정부장의 손에 의해 불여귀가 되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른다.특히 정치 권력은 부자 간에도 나누지 않는다고 했듯,남이야 오죽 하겠는가.
나는 유신시대를 거치긴 했어도 현실 정치의 속성을 깨닫기 전이어서 실상을 피부로 느끼지는 못했다.국민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고교시절이 막 들어서는 순간까지가 유신의 시대였다.1971년 대통령 선거,1972년 7.4 공동성명,새마을 운동,통일.유신벼,1974년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1975년 4월 30일 베트남 멸망,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등이 기억에 남는다.1975년까지는 라디오 및 도덕 교과서를 통해 유신의 표피를 알게 되었고,그 이후는 라디오 및 TV를 통해 알게 되었다.주로 반공교육,새마을 운동 등이 주가 되었고,민주화 및 인권문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관심의 대상이 공부 잘해서 좋은 성적,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최고의 이상으로 여겼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다만 관공서,학교 교무실 등에 걸린 박정희 초상화는 매우 근엄하고 인자한 모습이어 그의 말과 지시는 모두가 따르고 이행해야 하는 줄로 알았던 시절이었다.
나는 한홍구 저자의 글을 많이 접하지는 못했지만,숨은 한국 현대사의 면면을 적확하고 상세하게 들려 주고 신뢰가 간다.특히 유신 정권하에서 벌어졌던 정치적 과오 등에 대해 강연과 대담 등을 시청하면서 '나는 과연 한국 현대사를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라고 자문자답하곤 한다.그러면서 유신 시대 벌어졌던 각종 인권 유린 사태(김대중 납치 사건,인혁당 사건,장준하 의문사 등)를 간접 체험하면서 저절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정치 권력이란 '권불십년'이라고 했는데,박정희는 살아있는 한 영구집권을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그에겐 정치 후계자도 없었다.자연사하기 전까지 그는 살아있는 절대권력의 소유자로 남으려 했다.누군가 그의 정책,정권에 대해 가타부타 간언도 할 수 없는 독재자의 전형이었다.특히 김대중 납치 사건의 전말과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8인의 기구한 운명 등을 접하면서 정치 권력의 잔인함을 새삼 뼈저리게 느꼈다.사실 유신 시대 독재,정권 유지라는 명목으로 당하고 희생되었던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다.정치계,언론계,노동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유신의 칼에 의해 고초와 희생을 당해야만 했다.
박정희는 유신 개혁의 모델을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서 찾고 있다.《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박정희는 "명치(메이지)유신이란 혁명과정을 겪고 난 지 10년 내외에는,일약 극동의 강국으로 등장하지 않았던가.실로 아시아의 경이요,기적이 아닐 수 없다"며 "금후 우리의 혁명 수행에 많은 참고가 될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본인은 이 방면에 앞으로도 관심을 계속하여 나갈 것이다"라고 천명했다.결국 메이지유신은 한국이 계속 따라가야 할 모델로 여겼던 것이다.박정희가 메이지유신의 지사(志士)로 여겼던 인물 가운데는 신화화된 인물도 있지만,정한론(征韓論)을 펼친 인물도 있다.(사이고 다카모리,이토 히로부미,이노우에 가오루,야마가타 아리토모 등)헌법 위에 군림했던 유신의 심장 박정희는 3권을 장악함은 물론 국회의원 1/3 임명하고 전국구의원 제도는 없애 버리기도 했다.
1972년 10월 박정희의 헌정유린 친위 쿠데타 이후 잠잠하던 학생운동은 김대중 납치 사건을 거치면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학생운동은 10.26 박정희 암살 사건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데 구속,무기정학,자퇴를 당하고 자유언론수호선언을 했던 언론사 기자들은 경영진들에 의해 쫓겨 났다.유신체제는 한국 사회 깊숙이 파고 들었다.가요계,노동계 특히 YH사건은 부마 항쟁,박정희의 암살로 이어졌다.유신시대의 '용사참사'격인 '무등산 타잔' 박흥숙이 보여 주었던 강제철거의 잔혹함은 국가의 폭력이 아닐 수가 없다.또한 유신악법으로 불리는 '군사기밀보호법'은 군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기밀 범부에 묶어 놓았는데,죄를 범한 자는 형의 1/2까지 가중할 수 있도록 언론의 입을 틀어막았다.당연 군대 내에서의 군인들의 사망자 수는 그 어느 때보다 많았던 것이다.세계가 주목하고 경악했던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8인은 사형 선고와 함께 익일 연쇄살인 되고 말았다.민주주의를 표방하던 나라에서 전례 없는 사법 유린사태가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말았다.
박정희가 종신 집권을 눈앞에 두고 부하의 손에 의해 암살되어 어언 36년이 흘렀다.일제강점기와 맞먹는 세월이다.그런데 한국 사회의 정치 민주화의 체감 온도는 영하권이다.근자 '테러 방지법'을 국회의장이 단독상정하여 야당에선 이에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연일 이어가고 있다.테러 방지법이란 과연 무엇인가? 국민과 국가의 인적.물적 안전을 위해 보호를 받기 위한 법적 장치로 이해한다.다만 테러 방지법 내용 속에는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다분하기에 소수당인 야당측에선 필사적으로 필리버스터로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박근혜 정권이 채 2년도 남지 않은 시기에 '테러 방지법'을 내세워 정권 유지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의 사생활(국가정보원)을 깊숙이 캐내려고 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과연 현 정권은 국민들의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마저 원천 봉쇄하려는 것은 아닌지.박정희 시절 헌법 위에 군림했던 유신 악법을 상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 대목이다.유신시절의 전철(前轍)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