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2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한국 역사 관련 도서를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사료를 바탕으로 충실하고도 생생한 현장감을 살려 재미와 교훈을 안겨 주는 점이다.특히 조선시대는 숭유억불 정책과 성리학에 바탕을 둔 왕조의 정체성과 왕권과 사대부들의 낭과 패와 같은 이해관계 속에서 왕위 계승과 훈구파와 사림파,민생을 외면한 당쟁,외국 문물을 실사구시에 맞게 적기에 수용하지 못했던 조선 오백년 역사가 후대들에게 많은 교훈을 안겨 준다.역사는 위정자들의 선각자적인 안목과 통찰력,시대를 앞서 읽고 실천해 나가는 수용력과 진보적인 사고,민생을 최고로 여기고 받느는 '민본위주'가 한 나라의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켜 간다고 생각한다.

 

 

조선 왕조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왕위를 지키고 '탕평책'으로 민본 정책을 펼친 여조에겐 역사의 오점을 남긴 아들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부분이다.이덕일저(著)의 <사도세자의 고백>을 통해서 영조가 사도세자에 대한 기대감과 그가 뒤주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까지 부자 관계가 그리 탐탁치 않은 '견원지간'과 같은 갈등과 고뇌의 연속이었고 사도세자의 죽음은 단지 영조 개인의 선택과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닌 주변 인물들의 고변과 친인척의 관여가 커다란 요인이 아닐 수가 없다.또한 당대 노론과 소론이라는 당파간의 치열한 이전투구가 소론으로 분류된 사도세자에겐 치명상이 되었고 훗날 자신의 아들 정조에 의해 명예가 복원되고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들은 엄중한 처벌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희궁에 의해 태어난 사도세자는 돐을 지나면서 동궁으로 승격되고 차기 왕위를 계승할 인물로 영조는 점찍었다.그래서 일찍부터 세자시강원에 보내 논어,맹자 등 사서를 학습시키고 예의범절,왕으로서의 체모와 자질 등을 관원들로부터 익히게 하는데 사도세자는 공부보다는 체질적으로 밖으로 나가 노는 것을 즐기고 학습엔 그다지 흥미가 없었던 모양이다.이러한 학습 과정이 영조의 귀에 들어가니 때론 부왕에게 타이름을 받고 꾸지람을 들어가면서 사도세자가 철이 들고 자신의 뒤를 이어주기를 바라지만 나아지지를 않게 된다.또한 왕이 되어야만 한다는 심리적 강박증과 일반불안장애,충동조절장애 등으로 헛것을 보기 시작하고 1760년(26세) 자신의 생일날 부왕을 욕하기 시작하고 나경언이 올린 고변서가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세자로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그것은 왕손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빙애) 끌어 들이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북성(北城)으로 유람까지 한 점이 세자의 자질을 훼손시켰고 실망스럽다는 것이었다.

 

 

나경언의 고변에는 배후 인물로 김한구,윤급,홍계희를 꼽으면서 즉각 나경언을 효수했다고 한다.그 배후를 밝히는 것은 권력 중심부에 있었던 인물들이고 깊게 조사가 진행되면 권력 중심부가 피바다가 될게 불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여오는 두려움과 꺼림칙함으로 나경언 한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일단락된듯 하지만 세도세자는 역시 '뜨거운 감자'로 당시 조정의 살벌한 분위기를 몰아가고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이유는 그의 정신 분열증과 당쟁에 희생되었다는 점인데 평소 논리적이었던 영조가 신령의 말을 거론하면서 '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다'라는 점이 직접적 이유이며 이는 <영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폐세자반교>는 <승정원일기>나 <한중록>에서 엿볼 수가 있지만 구체적이지 않고 그 해당부분이 삭제되었다.<대천록>,<현고기>,<모년기사>에 수록된 <폐세자반교>에서 '세자를 폐위하노라'라고 명령을 전국에 반포했으며 선희궁의 말은 폐세자로 삼아야 할 당위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세자가 내관,내인,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 명이오며,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중략)...장번내관을 내쫓고 어린 내관,별감들과 주야로 함께 있으면서 재화를 그들에게 나눠주고 기생,비구니와 음란한 일을 벌였습니다.그리고 제 하인을 불러 가두기까지 했고 잘못이 너무 심하여 한 번 아뢰고자 하나 모자의 은정 때무네 차마 아뢰지 못했습니다. P214에서

 

 

이제 사도세자는 부왕에 의해 자결을 요구받지만 변명과 살고 싶다는 항명을 고하지만 한 번 굳어진 마음을 되돌릴 수 없게 되며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죽이려 발의한 사람은 장인 홍봉한이라고 한유 등 공홍파(功洪派) 혜경궁 친정을 공격하지만 혜경궁은 극구 부인한다.다만 <영조 실록> 및 <임오일기>에는 뒤주가 들어오기 전 장인 홍봉한이 이미 입궁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시간의 선후와 진실성의 의심이라는 점에서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거구의 세도세자는 숨이 막히는 뒤주 안에서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하기에 관원들이 뒤주 밑에 뚫린 구멍으로 음식물을 제공하지만 이를 알아챈 영조는 구멍을 막고 뒤주 윗쪽으로는 풀잎을 얹어 놓아 굶주림과 원한,외로움,분함,자책감으로 뒤주에 들어간지 8일만에 싸늘한 시체로 변하게 된다.

 

 

부왕에 대한 사도세자의 괴씸죄,역모,고변 등이 절대권력의 왕조시대였던 당대에 영조는 왜 자식을 비윤리적으로 죽였는지는 당대의 당쟁과 부왕의 심기를 거스르게 한 사도세자의 행적들이 종합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지 않았는지 모른다.영조는 자식이 죽고 초라한 장례 의식을 치르게 하지만 사도세자의 묘지명에는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죽었다는 비보를 들었노라.라고 후회와 분노의 심정을 드러낸다.이 글은 <승정원 일기>,<영조실록>,<한중록>을 바탕으로 쓴 글이고 저자는 이덕일저자가 쓴 <사도세자의 고백>에 대해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많은 비판을 서슴치 않고 사료에 바탕을 두지 않고 진실성과 어긋난 글이라고 반박한다.

 

 

조선의 사회는 엄격한 절대 왕권과 세습체제하에 있었기에 왕의 심기나 비위를 거스르는 행위나 행적은 커다란 재앙과 화를 자초하게 된다는 교훈을 얻는다.한 편 자신의 뒤를 이어가고 왕조를 더욱 빛내 줄것을 크게 기대한 만큼 아들 사도세자의 행위와 행적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덧붙여 사도세자를 모시고 충언과 간언을 했던 권력 중심부의 관원과 사대부들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사도세자의 죽음을 막았어야 마땅하지 않았는가 한다.그러나 절대권력 앞에서는 부모형제,자식,친인척도 당대 사회는 용서와 화해는 없고 능상에 어긋나면 죽음과 유배,강등과 좌천,노비로 전락되는게 어두웠던 조선의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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