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너머의 역사담론 1
오항녕 지음 / 너머북스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조선조 15대 군주였던 광해군에 대한 인식은 그리 넓지가 않다.선조의 뒤를 이은 군주로서 당시 명나라와 후금과의 등거리 외교 정책를 통해 실리를 추구하고 조선 국내 사정은 사색 당파의 횡행과 관료들의 부패상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데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면서 정책 실천적인 면에서 판단이 흐렸던 인물로 각인되고 있다.또한 선조의 적자가 아닌 서자로 등극하는 과정에 많은 잡음과 암투가 존재했을 가능성도 감지가 된다.

 

조선왕조실록의 하나인 <광해군 일기>는 그가 폐위된 군주 시대의 실록이기에 실록이 아닌 광해군 일기로 명명하고 있으며,이 글은 <광해군 일기>에 기초하여 원문을 국문으로 번역하면서 광해군 시대의 전.후기의 시대상황을 저자의 해설과 함께 들려 주고 있다.그가 즉위하고 폐위되기까지(1608~1623)의 과정을 3기로 나뉘고 있다.1기는 즉위부터 1613년 계축옥사까지이고 2기는 1613~1618년 무렵까지이고 3기는 1618년부터 인종반정까지이다.

 

반정(反正)의 의미는 바른 길로 다시 돌아가 생활하자라는 의미로서 광해군이 군주로서 어떻게 치적을 하고 평가를 받았길래 중도하차하는 꼴불견의 폐위를 당해야 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1기는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북인 중심으로 정치 세력이 형성되고 대동법을 통해 재정 및 세금 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했는데,즉위초부터 임해군(광해군의 형) 옥사 문제가 커다란 흉사가 되었다.

 

2기는 대북 정권이 독주하면서 민생(대동법)을 외면한 채 백성들의 혈세로 궁궐을 짓고 경연보다는 친국에 맛을 들이며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사건이 2기에 발생했다.3기는 불안안 정정이 극대화되면서 윤선도,이이첨,허균 등의 사대부들이 반목질시하면서 악화일로의 상황을 수습할 능력도 없었을 뿐아니라 명의 뒤를 이은 후금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도 수습하려는 의지와 노력도 보여 주지 않았기에 그는 인조에 의해 폐위되고 말았던 것이다.

 

인종 반정이 이루어지면서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세금,부역,신분제의 개혁이 개량적 조치로 폄하되고 탈주자학,반주자학의 논리가 풍미했는데 근대주의자들의 사이비 보편사관과 조급증 탓에 300년 동안 조선은 상황의 타개 능력,시스템의 혁신 능력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의 문제가 아닌 20세기 근대주의자들이 아닌가라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그리고 광해군은 일제 식민사관에서 조선 후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출발 시점에서 운 좋게 부각되는 존재가 된다.

 

광해군 대 굵직한 현안에는 정인홍이 관여하고 광해군의 실정(失政)을 부각하면서 결정적인 인조 반정의 구실을 사게 되었다.대표적인 것은 의병을 핑계로 지방에서 세력을 부리고 괴이한 학문을 주창했고, 이언적과 이황 배척(회퇴변척),사친을 종묘에 들이는 데 앞장서고,경연에서 풍수설을 하는 시문용을 추천 토목의 역사를 일으키고,계축옥사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악언을 퍼붇고,인목대비 폐모론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외적 외교는 기회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매관매직,여알 정치는 알파로 따라 왔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궁궐 토목 공사의 진행과 더불어 파주 교하로 수도를 옮기는 논의가 광해군 4년(1611년)에 있었다는 점이다.한양의 기운이 쇠진되었으니 술관 이의신(李懿信)의 말에 따른 것이었는데 중론이 한꺼번에 일어나 성사가 되지 못했다.교하의 지세는 풍수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평사낙안(平砂落雁)의 형국이라고 한다.현재는 교하신도시로 지정되어 토목 공사가 한창이다.

 

허약한 왕으로 인식되는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피폐해진 민생과 재정,사회적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어야 했는데 결과적으론 모든 것이 정지 내지 후퇴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민생 회복,사회 통합,재정 확보,군비 확충,문화 발전 등 내치에 더욱 힘을 썼어야 성군으로 숭앙을 받으며 여세를 몰아 동아시아 외교에서 역량과 운신의 폭이 넓었으리라 생각된다.광해군 재위 15년이 남긴 실기(失機)의 업보는 현대 한국 사회의 대통령을 맡고 이는 이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안겨 주기에 충분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을 바꾼 반전의 역사 - 단 하나의 사건이 역사를 바꿨다
김종성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어떠한 일이 발생할 때에는 분명히 원인과 결과가 있다고 생각한다.일의 과정과 속성,환경에 따라 잘 될 수도 있고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특히 사회를 이끌어 가는 위정자들은 겉으로는 나라와 대의,국민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고 일종의 립서비스를 부르짖어도 결과는 그 자신과 친인척,주변 세력들의 배만 잔뜩 불리게 하고 결과는 수미일관(首尾一貫)하지 못하고 다음 정권에 부담을 주기도 하고 국민들의 원망을 증폭시키기도 한다.위정자들의 말과 글은 증거물과 사료가 될 수도 있기에 그들이 어떻게 치세를 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역사의 장은 음양이 확연하게 갈리리라 생각된다.

 

 흔히 조선 500년 역사를 배운 대로 느낀 대로 말하라고 하면 주자학에 바탕을 둔 유교국가,숭유억불정책,사색당파와 관료주의의 횡행(사농공상)과 세도정치로 인한 민심의 폭발,뒤처진 근대화와 개방 및 허약한 왕권으로 인해 나라를 잃는 수모까지 조선이라는 시대는 실리보다는 이념과 사상의 탁상공론으로 왕권과 신권,민심이 분열되어 어지러운 시절이었다는 것이 나의 지배적인 생각이다.그러한 어두운 시대 속에서 선각자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갖춘 신하가 있었지만 조정은 늘 수구적인 견해와 아집 등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된다.나라는 흥망성쇄가 시대와 상황,힘의 역학 관계에 따라 존재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판단미스와 사고의 오류로 인해 역사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 부지기수이다.

 

 개인,사회,국가,지구촌이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갔으면 결과는 좋았을 것이지만 뒤늦은 후회 뿐이다.후회라도 한다면 다행이지만 전혀 발전하려는 기미도 없이 이념과 정책,음모와 배신,이합집산 등으로 사회와 나라가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고 그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힘과 권력,밥그릇 챙기기,세 불리기 등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아무튼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단순하게 하나의 결과만 갖고는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고 규명할 수가 없다.그 이면에는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위화도 회군부터 칭따오 맥주가 조선의 멸망을 앞당겼다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지난 조선의 30여 가지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모두가 인과관계가 있고 상호작용을 통해 일이 잘 되기도 하고 수습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던 경우도 있다.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도 없지만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고 한반도의 미래 역사를 읽어 내는 힘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조선을 바꾼 반전의 순간,죽음,여인,남자가 조선 국내 상황이었다면 조선을 바꾼 반전의 세계사는 분명 이웃 나라와의 힘의 역학관계와 상호작용에 있었다고 생각한다.이 글은 쓴 저자는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료에 근거를 두되 당시의 왕권,신료,주변국과의 역학관계,사회상,민심,세도가들이 어떻게 이합집산했는지를 평가를 하고 추리를 더해 가고 있다.일종의 만일(또는 가령) ~했다고 한다면 (결과는)이러 이러하게 흘러갔을 것이다라는 점이다.그러나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조선의 위계질서는 대부분 왕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결정하는 방식으로 흘러갔고 이씨 조선이라는 말에도 풍겨 나오듯 이씨 가문이라는 혈족에 의한 527년간의 주자학에 바탕을 둔 이론적인 성리학이 사회를 지배적으로 이끌어 나갔고,서양의 신진 문물을 수용하려는 자세가 소극적이었다고 생각된다.아울러 몇 몇 왕의 죽음이 안개 속으로 파묻히면서 조선의 개혁과 개방이 더디게 되고 약체인 왕권을 틈타 경주 김씨,안동 김씨,풍양 조씨들이 드세게 세도를 부림으로써 조선의 멸망으로 연결되었다는 점도 추측해 볼 수가 있다.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점은 조선 527년 역사를 단순히 조선 국내상황으로만 판단할 사안이 아니다.콜럼버스와 마젤란의 모험이 임진왜란을 불러 일으켰고,임진왜란은 여진족의 중국 제패를 도왔다는 점도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또한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승리하면서 차후 시대에 전화위복이 된다.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러시아혁명을 일으키고 아관파천은 조선의 멸망을 유예시켰으며,독일이 청도에 칭따오 맥주 공장을 설립하면서 러시아는 남진정책에 유리한 국면을 마련하기 위해 요동반도를 점령하면서 일본이 조선에 제국화의 길을 가속화하면서 조선의 멸망이 앞당겨졌다고 생각이 든다.

 

 역사는 선택의 여지보다는 힘의 역학 관계에서 비롯되고 만들어져 간다고 생각한다.경기가 장기간 침체되고 일자리,경제 민주화에 목마른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대권주자들은 겉으로는 민심을 사기 위해 선약(善約)을 무수히 남발할 것이다.후보자의 능력을 벗어난 지킬 수 없는 공약(空約)은 의식 수준이 높아진 유권자에게 먹히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그들은(대권 후보자) 어떻게 해야 역사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가 있을지를 고민하고 소통하면서 공감을 얻어내야 할 것이다.지난 527년 간의 조선의 역사에서 체득한 교훈은 개인과 사회,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간접적으로 이끌어 주었기에 매우 유익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고대사, 바꿔 써야 할 세 가지 문제
이도상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한국고대사에 대한 내 지식은 그리 깊지가 않지만 근래 중국이 고구려 역사 및 발해사와 관련하여 고대사 부분을 크게 왜곡하고 그들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고도의 학술전개가 일어나고 있기에 역사학자를 비롯하여 연구원,교과부 관계자,관심있는 분들이 고대사에 대해 깊게 주목하고 중국의 역사로 탈바꿈하는 현상이 없도록 만반의 대응책을 정부 차원에서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대사는 흔히 고대조선으로 불리는 단군왕검 즉 단군은 제사장이고 왕검은 정치 지도자로 불리면서 한국의 신화로 각인되고 있으며 서기전 2333년을 고조선이 탄생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도상저자는 한국 고대사 부분에서 수정해야 할 대목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첫째 고대조선사에 대한 해석상의 갈등이고 둘째는 청동기시대로 진입한 연대에 대한 해석상의 문제이며 세째는 기자국과 위만국,한사군에 관한 상이한 시각이다.

 

 

고대조선사는 한국 민족의 기원에 관한 문제이고 청소년들의 자아 형성과 민족의 정체성 확립 차원에서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역사적 기록물과 관련하여 고대조선 역사에 대해 신화에 불과하고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국민들의 접근을 가로막고 있다.<삼국유사>에는 단군왕검이 처음 나라를 세우고 조선이라 하였다는 점에서 고조선이 아닌 고대조선으로 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점이고,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중국인들이며 그들이 세운 정권들의 위치가 고대조선 지역 안에 있었다는 이유로 '조선'이라고 불렀다는 점에서 명칭은 기자국,위만국으로 바꿔야 한다는 점이다.

 

 

청동기시대로 진입한 연대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고대조선이 서기전 2333년에 건국됐다면 만주와 남북한 지역 중 어느 한 지역은 최소한 서기전 24세기경 청동기시대로 진입했어야 옳다는 지적이다.그러나 국사 교과서 내용은 서기전 10세기경이라고 하는데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이며 청동기시대 진입 연대는 고대조선의 건국과 관련하여 역사적 진실을 복원하는 중요한 단서이기에 실증적인 근거 규명이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기자국과 위만국,한사군에 관한 상이한 시각을 짚어 볼 수가 있는데 기자국,위만국이 고대조선 변방에서 정권이 이루어졌다면 조선사편수회가 의도했던 시각과 일치하게 된다.즉 고구려 등 중국 동북지역은 중국의 식민지였고 남쪽은 일본 식민지로부터 시작된 역사라는 점인데 기자국,위만국이 활동했던 지역과 한국 고대사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 중.고교 국사 교과서에 실려 있는 고대사 부분이 상당수 왜곡되어 있고 관련자간의 시각과 견해가 불일치하기에 조속한 수정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사료의 부족과 잘못된 정보로 해석상의 오류로 역사적 진실에서 이탈하고,이념이나 이해관게로 사료와 정보를 악영한 자의적 해석,자의적인 해석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료와 정보를 조작하는 경우로 인해 고대사 부분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 역사를 바르게 정리하기 위해 역사학자들은 나름대로 노력과 열정을 쏟고 있지만 현재적 시각에서 고대사에 대한 해석의 분분은 식민주의 사학이나 사대주의적 관점이라는 시비로 특정 연구 결과에 대한 논쟁이 시대적 연구 환경을 배려하지 못한 소이(所以)라는 차원에서 왜곡된 고대사 부분을 바르게 정립시켜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적도에 묻히다 - 독립영웅, 혹은 전범이 된 조선인들 이야기
우쓰미 아이코.무라이 요시노리 지음, 김종익 옮김 / 역사비평사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는 대외적으로 정국이 어수선하고 무기력했던 시절이었다.국권을 통치하던 왕조부터 부패한 관료에 피폐한 민심까지 나라의 앞날은 말그대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고 생각한다.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 일본에 빌붙어 살아 가려던 친일세력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싸웠던 항일운동가 및 민족주의자들이 분열이 되고 일제에 의한 창씨개명과 더불어 일본이 진주만 기습 공격에 의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군수물자와 군 인력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조선의 젊은이들을 강제징용하면서 전장의 총받이로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했던 막막하고 암울하기만 했던 시절을 이 글은 생생한 증언과 기록으로 전해 주고 있으며 역사의 교훈을 되새김질 해보는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고 일본은 조선에 내선일체,대동아공영권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의 젊은이들을 인도네시아 암본섬과 타이-버마간 철도 건설 등에 내몰리게 한다.조선의 젊은 노무자들은 당연히 일본인 이름으로 징병생활을 하면서 당시 남양만과 동남아는 영국,네덜란드 등이 제국주의에 혈안이 되어 식민통치를 공고히 하려고 했기에 일본과 잦은 국지전과 마찰이 일어나곤 했는데 조선,일본,대만의 젊은이들이 연합군의 포로가 되면서 조그마한 실수를 저질러도 억류소 생활을 거친 다음 극형에 처해지는 일도 부지기수였으며 극형에 처해지는 것이 두려워 제3국인 인도네시아 독립에 지원하려던 젊은이들도 있었다.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다 보니 풍토병(말라리아)에 걸리다 약 한 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생을 이국에서 마감해야 해야만 했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에 의해 승리를 하고 조선은 해방을 맞이하지만 일본은 조선의 노무자,군무원 등의 귀국이 미루어지는 가운데 생의 위협을 받는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이 이어지면서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간에 영토 분쟁이 일어나고 인도네시아는 자국의 독립을 위해 그곳에 와있던 조선,일본,대만의 젊은이들에게 독립운동에 동참해 줄것을 요구한다.그 대표적인 예가 조선의 양칠성,일본인 아오키,하세가와였다.네덜란드 군당국은 이들을 대동아전쟁의 전범으로 간주하면서 처형에 내린다.계약직(2년) 군무원으로 일본군 소속으로 몰리게 된 것도 억울한데 대동아전쟁의 전범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는 참 나라 잃은 설움에 무법천지라는 생각마저 들게 되었다.

 

우쓰이,무라이 등 일본인 공저자가 인도네시아에서 유학을 하면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상황과 희생자들의 문서,증언 등이 이 글의 토대가 되었는데 조선인 군무원으로 활동했던 분들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고 유일하게 이상문옹(翁)만 생존해 있다고 한다.당시 그곳에선 징용으로 끌려가고 일본에 조력하기도 했지만 뜻있는 조선의 젊은이들은 '고려독립청년당'을 결성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투쟁을 했지만 그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안타깝게도 대표적인 인물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마는 사연도 전해 들을 수가 있었다.

 

일본제국에 의해 조선의 젊은이(노무자,군무원,위안부 등)들이 젊음을 누리지도 못하고 머나먼 적도 남양만에서 인간 이하의 처우와 영양 실조,포로,억류소,형장의 이슬 등으로 사라져 갔던 비극적인 역사는 다시는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특히 살인 및 집단 살인,조직적 폭력 및 학대 행위,인질의 살해,시민의 고문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전쟁범죄로 몰려 희생이 되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깝고 비극이다.제국주의 일본이 과거 심대한 고통을 안겨 주었던 식민 통치에 대해 쿨한 사과(전후 보상,야스쿠니신사 합사,위안부 불인정,지문 날인,조선학교 문제,교과서 왜곡 등)도 없고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질질 끌고 있는 일본의 속셈은 무엇일까? 국가간의 관계는 힘의 논리이고 역학관계에서 오는 것은 아닌지 새삼 깨닫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국세시기
홍석모 지음, 정승모 옮김 / 풀빛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생활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동국세시기는 설과 대보름 등을 포함하여 사계 속의 24절기를 통해 생활의 리듬과 농경에 따라 적시에 대처할 수 있는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져 있기에 생활 문화적인 측면에서 어린이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두루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조선 후기 홍석모(洪錫模)가 지은 이 글을 저자인 정승모가 편역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동국세시기가 탄생되기 전 조선에는 설과 보름에 관한 풍속을 간략하게 시로 엮은 것밖에 없었기에 홍석모저자는 초나라 풍속 36종을 지은 종름(宗檩)의 형초세시기의 영향을 받아 절기별로 풍속을 구체화하고 정리한 것으로 보여진다.계절에 따른 사물이나 행사 등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서경에 나오는 "요 임금이 말하기를,하늘의 역수(歷數:제왕의 대통을 이어감이 천체의 운행과 기후의 변화가 철을 따라서 돌아가는 순서와 같다)는 너의 몸에 있다"라는 문구에서 찾을 수가 있다.

 

 

요근래 초등학교에서 우리문화에 대해 소개하고 관심이 높아져 가기에 조상들의 삶과 지혜,풍속 등을 관심을 갖고 학습해 나간다면 우리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생활의 지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된다.아울러 어렵게고 재미가 없는 사회과목 안에 우리문화는 천대받고 사라져 가는 세시풍속을 관심과 애정으로 우리의 역사,문화,조상의 숨결 등을 살피고 확인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정월부터 섣달까지 제목이 23항목이며 해당월에 행해지지만 구체적으로 날짜를 잡을 수 없는 행사는 월내(月內)로 구별하고 맨 나중에는 윤달 행사를 붙인 것이 특징이다.또한 특기할 사항은 풍속 밑에 전설이나 기록물 가운데 부합되는 것을 채집하여 유래와 출처를 증명한 것도 특징이며 내용상 부족한 부분은 경도잡지(京都雜誌)와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로 보완되었다.

 

 

한 해를 준비하는 정월은 원일로 표기하며 입춘을 지나 농사가 시작된다.삼짇날,청명,한식,초파일,단오,유두,칠석,백중,추석,중양절은 파종하여 벼를 거두는 수확기까지 이어지게 되고,겨울나기 안에는 상달,동짓달,섣달 그리고 맨 나중에 윤달이 소개되어 있다.태양의 움직임과 세시에 따른 농경 문화,백성들의 생활상과 풍습이 세시기에 잘 나타나 있고,사람이 태어나서 죽을때까지의 관혼상제 등의 세습도 이해할 수가 있었다.

 

 

 

특히 동국세시기에 언급된 풍속 중에는 음식에 관한 부분이 많다는 점인데 이는 양반 사족(士族)들의 보양(補養)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풀이되며 기일,패일,새 쫓기,가지 많은 나무 외양간 뒤 세우기,신일(愼日),일월신 등의 99가지 항목을 보면 농경 문화에서 보여지는 주술과 부적 신앙의 영향이 크다는 점도 특징이라고 할 수가 있다.또한 조상을 섬기는 유교국가이다 보니 조상 숭배 사상이 짙다는 것도 간과할 수가 없다.

 

 

조상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내 몸이 어찌 태어났겠는가?라는 한문이 있듯 자신이 낳아준 부모님과 자신이 속해 있는 전통사회의 생활상과 풍습,인습 등을 제대로 이해하고 현대 생활에 접목시킨다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우리문화가 다시 복원되고 세시풍속을 통해 조상들의 지혜를 대대로 이어나가지 않을까 한다.나는 동국세시기를 통해 알고 있었던 풍속과 새로 접한 부분에 대해 지적호기심과 조상들의 지혜,전통문화의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이해하게 되어 다행스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