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나에게 쉼표 - 정영 여행산문
정영 지음 / 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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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족과의 휴식, 친구와의 추억. 나에게는 여행이 그랬다. 그랬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바뀌었다. 나만의 쉼표로. 가족과 했던 어릴적 무수한 여행, 대학시절 친구와의 잊지못할 여행들에서 이제는 나 혼자 생각하고, 느끼고, 즐기는 여행에 푹 빠져버렸다. 졸업하고 일을 하면서부터였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여행하고픈 마음, 아니 휴일이 돌아올 때마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그렇다. 때로는 나에게 필요한 그 쉼표가 바로 여행이었다. 가슴에 와 닿는 제목이며, 내가 좋아하는 하늘과 바다색의 표지 때문에 책을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어로 '이야기'라는 뜻을 지닌 단어와 스페인어로 '편지'라는 뜻을 지닌 단어로 목차를 표시하고 있는데 색다르면서 표현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여느 여행 서적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진부터 훑어보았는데 선명한 색상과 예쁜 색감으로 인해 책이 더욱 돋보인다. 웃고 있는 사람들, 보는 것만으로도 향기가 느껴지는 꽃송이, 알록달록 예쁜 색의 페인트가 칠해진 골목길,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연두빛 초록빛의 나뭇잎, 보랏빛 벽과 분홍꽃과 어울리는 액자 속의 흑백사진 등 환하고, 따뜻하고, 즐겁고, 신 나는 느낌의 사진들이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온정(溫情)이 느껴지는 사람들 사진이 가장 많다. 작가는 지구 위를 걷다가 만난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빵 만드는 일을 하루도 쉴 수 없다는 이스탄불 거리에서 만난 빵 파는 할아버지, 시계가 없어 매일 시간을 물어보는 쿠바 산티아고의 시계 수리공, 삶 자체를 퍼포먼스로 생각하는 옥스퍼드의 수학도, 매일매일 다른 바람 속을 달려 소식을 전하는 플렌스부르크의 우편배달부, 축축한 저녁거리에서 김광석의 <거리에서>를 틀어준 터키 셀축의 레코드 가게 주인, 이탈리아에 가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기 위해 하루 열두 시간씩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는 아바나의 스물다섯 청년, 물밑에서 따온 해산물을 입에 넣어주시는 하태도 해녀 할머니 등. 여행길에 만난 사람들은 모두 따뜻했다. 여유롭고 행복한 모습이다.

외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려준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젊은이를 걱정하던 인제 감자밭 노인, 자신에겐 모두가 선생이라는 경주 기차역 앞에서 오렌지 파는 여인, 식당 하나 없던 만재도에서 돈도 안 받고 밥상을 차려주던 백발으니 난쟁이, 보말죽을 끓여주시던 비양도 할머니, 구례 산동마을에서 머리를 잘라준 일흔 살 즈음의 미용사, 1940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문을 열었다는 치과의사 한택동 씨. 나이도, 직업도, 사는 곳도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정(情)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따스하다.  

볼 것 다 보고 먹을 것 다 먹는 여행 말고, 나에게 쉼표가 되는 여행을 하고 싶다. 천천히 걸으면서 시야를 넓히고, 그 마을 사람들을 차근차근 살펴보고 싶다. 시골 마을에 홀로 사는 사람들과 대화도 나누고, 그들의 외로움도 달래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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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문법 달인이 되는 법 - 완전개정판
이경수 지음 / 사람in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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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접한 건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였다. 진한 노란색 표지에 써있던 말이 인상깊었다. '한번 읽으면 기초 문법이 척척, 두번 읽으면 문법이 막힘없이 술술, 세번 읽으면 문법의 달인이 됩니다.' 딱 세번 곱씹어 읽으면 저절로 일본어 문법의 달인이 된다고? 한꺼번에 세번을 읽기는 힘들 것 같아서 당시에 한번 읽었고, 그 후로 이 책을 다시 생각하지 못했는데 완전개정판이 나왔다는 말에 반가웠다.   

예전의 책과 달라진 점이라면 책이 더 두꺼워졌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크기도 커진 것 같다. 전에는 동사, 형용사, 조동사, 경어, 조사의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개정판은 목차가 조금 바뀌었다. 명사, 형용사, 동사, 조동사, 경어, 조사 그리고 틀리기 쉬운 일본어 유사 표현 비교까지 설명한다. 음성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했고, 활용노트가 포함되어 있어서 문법 활용을 반복적으로 써보며 또 한번 복습할 수 있다. 책의 구성이나 출판사 홈페이지 자료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만족스럽다.

학창시절에 공부 잘하는 친구의 잘 정리된 노트를 보는 느낌이다. 일본어 수업을 들을 때 선생님들께서 중요하다고 표시해주신 내용이나 여러 장씩 복사해주신 내용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틀리기 쉬운 부분은 색깔을 넣거나 팁으로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책에 있는 팁만 모아서 책으로 엮어도 훌륭한 부록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각 품사별로 제시한 단어들을 사용한 예문이다. 어느 외국어나 그러하겠지만 방대한 동사를 무작정 외우려면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일본어의 동사는 세 가지로 분류하고 그 활용이 매우 복잡하다. 그에 따른 동사를 여러 가지 제시하고 활용 표현까지 하나하나 보여준다. 그 외에 자동사와 타동사, 가능동사, 보조동사, 복합동사 등 자칫 어렵게 배울 수 있는 내용을 간단하면서도 짜임새있게 정리했다. 

일본어 공부하면서 제일 헷갈렸던 부분이 수동, 사역, 경어였다. 다시 한번 정확히 짚고 넘어갈 수 있어서 좋았다. 나의 실력을 테스트 해보는 페이지가 '경어'에서 한 장 뿐이었는데 다른 품사편에서도 여러 장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마지막 장 일본어 표현의 달인이 되는 법에는 '틀리기 쉬운 일본어 유사 표현'이 정리되어 있다. 각종 일본어 시험에 나오는 내용이어서 많은 도움이 되겠다. 일본어능력시험 2급까지는 혼자서 공부해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1급 시험을 준비하는 기간이 짧았지만 내가 느낀 바로는 2급과 1급의 차이는 엄청났다. 이 책을 정말 꼼꼼이 살펴보고 내 것으로 소화시킨다면 일본어 공부를 손에서 놓은 지 오래되었지만 1급도 문제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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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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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자의 책을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름이 귀에 익다. 어디에서 들었는지 한참을 생각하다 올해 5월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저자의 <도착하지 않은 삶> 사인회 장면이 떠올랐다. 아, 그분이었구나. 지나가다 사진을 한 장 찍었었다. 

제목이 맘에 들어 읽게 된 책이다. 어릴 적에 가족 여행을 많이 한 덕에 성인이 되고서도 여행의 짜릿함을 좋아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어디든 떠나고 싶어하는 중이다.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길을 잃어본 적이 있던가. 길을 잃는 것과 헤매는 것이 동일하다면 그런 경우가 몇 번 있다. 아테네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한 캄캄한 새벽에, 담양 금성산성 오르는 중에, 그리고 도쿄 여행 중 하루에 한번씩은 길을 헤매었다. 어쩌면 그렇게 고생한 덕분에 여행에 대한 기억이 더욱 뚜렷한지도 모른다. 

여행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미술과 신화, 영화, 문학, 음악 이야기가 고루 섞여 있다. 글이 쉽게 읽히지 않아 지루했던 부분도 있다. 1부 아름다움에의 망명은 '여행'이라는 요소가 2부보다는 많이 포함되어 있고, 2부 예술가의 초상은 말그대로 예술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파리 드골 공항에서 마주친 여인들의 뛰어난 미적 감각에 감탄하고, 바르셀로나를 혼자 자유로이 돌아다닌다. 이른 아침부터 관광지를 돌아다니다 해질녘이면 광장에 앉아 현지인들에 섞여 차를 마신다. 미술관에서 작품들을 감상하고,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기차 안에서 일기를 쓰던 날 독일 여배우를 만나고, 파리의 카페에서 야채  타르트와 홍차로 식사를 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언덕을 올라가고, 부에나비스타 카페에서 오믈렛을 먹는다. 그 모든 것이 느긋하고 한가롭게 느껴져서 좋다. 

여행뿐 아니라 시와 영화, 그림과 음악까지도 접했지만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여 머리가 뒤죽박죽이다. 마치 학창시절 다음날 치를 여러 과목의 시험 공부를 한 과목이라도 제대로 해놓은 게 아니라 이것저것 조금씩 손만 댄 것처럼 말이다. 산문집이라서 그럴 지도 모르지만 읽는 게 조금은 불편했다. 그래도 여행 전 준비하는 대목에서는 내가 다 설레었고, 처음 방문한 도쿄가 낯설지 않았다는 그녀의 말에 나도 공감했다. 이제는 볼거리가 많아 잘 짜여진 일정에 맞춰 움직일 수 밖에 없는 여행 말고, 그저 풍경만 좋은 곳으로 휴식하러 가고 싶다. 공기 맑은 곳에서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는 소리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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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여행을 떠나다
신예희 글.그림.사진 / 시그마북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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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표지에서부터 여행 느낌이 물씬 난다.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는 궁금한 것은 무조건 입에 넣고 보는 광대역 입맛의 소유자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사람냄새, 땀내음, 시끌시끌한 목소리가 좋아 여행지의 복작거리는 시장통, 이왕이면 재래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따르는 여행이야말로 의미있고 행복한 여행이 아닐까.

그녀는 홍콩&마카오, 스페인, 터키, 태국, 일본을 여행하며 맛보았던 맛있는 먹거리들을 이야기한다. 여행을 시작하며 비행기 안에서 먹는 기내식에 대한 기대도 크다.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에 그리스에 다녀오는 동안 기내에서 먹었던 음식들이 생각난다. 먹기 전과 먹은 후의 사진까지 찍어가며 맛있든 입맛에 맞지 않든 깨끗하게 비웠던 기억이 난다. 싫어하는 음식이 뭔지 모른다는 저자 만큼은 아니지만 사실은 나도 싫어하는 음식이 거의 없다. 아니, 못 먹는 음식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하나. 그리스 여행하면서도 찌는 듯한 무더운 날씨 탓에 아이스크림이나 음료를 많이 먹긴 했지만, 새로운 동네에 들를 때마다 적어도 한 번씩은 저녁 만찬을 즐겼다. 그리스 고유의 음식들을 주문했는데 맛이 무척 좋았다. 짐을 맡기고 노숙하는 한밤중이나 긴 시간 배를 타고 새벽에 도착했을 때, 그리고 딸기셰이크가 정말 먹고 싶은데 노천카페의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쌌을 때 딱 그 때에만 패스트푸드점에 갔었다. 잠깐 한인식당의 유혹도 있었지만 아직 오픈 전이라는 이유로 쉽게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배낭여행을 할 때에는 되도록이면 그 나라의 음식을 먹어 보는 것이 멋진 여행을 완성하는 한 부분인 것 같다.

내가 가장 가고 싶은 나라 터키와 다음달에 여행 예정인 일본의 음식도 소개하고 있어서 이 책을 꼭 읽고 싶었다. 터키에 가고 싶은 이유 중 하나는 프랑스, 중국과 함께 터키 음식이 3대 음식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터키에서는 어딜 가든 비슷비슷한 스타일의 아침식사를 먹을 수 있는데 간소한 듯하면서도 영양 균형이 잘 잡혀 있는 웰빙 식단이라고 한다. 겉껍질은 바삭하고 속살은 부드러운 터키 빵 에크멕에 꿀이나 체리 잼을 발라, 터키인들은 하루에 20~30잔 마신다는 뜨거운 차이 한 잔을 곁들이면 하루를 가볍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쫀득쫀득 터키 아이스크림 돈두르마는 체인점 '마도'에서 맛보라고 한다. 터키의 디저트는 끈적끈적하고 무거운 맛이다. 아주 얇은 페이스트리 사이사이에 잘게 다진 피스타치오를 듬뿍 넣어 만든 파이 바끌라바와 공포스러운 단맛의 헬바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무엇보다도 터키하면 생각나는 케밥은 불에 구운 고기 요리를 뜻하는 말이다. 터키를 여행하며 지역마다 있다는 명물 케밥을 모두 맛보는 건 어떨까. 새콤한 요구르트에 잘게 채 썬 오이를 듬뿍 넣은 차가운 수프 자즈크와 터키인의 국민 간식, 참깨빵 시미트도 함께.

일본 간사이 지방 중에서도 교토, '교토의 부엌'이라 불리는 500년 전통의 니시키 시장은 아침 8~9시 사이에 가는 게 좋다고 한다. 없는 것이 없는 그곳에서 수많은 먹거리들을 눈요기도 하고 시식도 하면 신 나겠다. 아름다운 항구 도시 고베, 고베 시내 중심인 모토마치 상점가는 일본 전통 과자 전문점과 프랑스풍의 화려한 케이크 전문점이 공존한다. 고베의 차이나타운 난킨마치 거리도 맛난 음식을 파는 가게와 노점이 꽉 차 있다. 대나무 잎으로 싼 쫀득한 찹쌀밥과 얼큰한 중국식 라멘이 입맛을 당긴다. 오꼬노미야끼에 맥주 한잔을 곁들이거나 진한 국물의 돈고츠 라멘, 덮밥도 꼭 맛보아야 할 음식이다. 

홍콩에서는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일품인 진한 밀크티 한잔에 여러 종류의 딤섬, 홍콩식 돌솥밥 뽀우차이판을 맛보고, 마카오에서는 따끈 달콤 고소한 에그타르트와 고소하고 퍽퍽한 아몬드 과자에 생과일주스 한잔이면 입이 즐겁겠다. 마카오는 맛난 명물 간식거리가 유난히 많다고 한다. 담백한 국물이 우리 입에도 잘 맞다는 완탕면을 먹은 뒤, 차가운 우유 푸딩은 후식으로.

스페인의 전통 아침식사는 바삭하게 튀겨낸 기다란 추로스를 뜨겁고 진한 초콜라떼에 찍어 먹는 것이다. 바르셀로나에는 맛난 것 찾아 움직이는 고메이 투어가 있다고 한다. 오랜 전통의 식재료상들과 유서 깊은 카페, 대형 재래시장 등 열 군데 정도의 장소를 돈다고 하니 여행자들은 한번쯤 참가해보는 것도 좋겠다. 태국 사람들은 아침에 빠떵코라는 빵과 콩국물 '남 떠후'를 먹는다고 한다. 태국식 족발 덮밥 '카우 카 무'나 생김새와 냄새가 마치 호떡 같은 바나나 로띠도 맛있겠다. 

각 나라의 활기찬 시장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활기차게 변한다. 책의 글, 그림, 사진 모두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의 작품이다. 혼자서 책 한 권을 완성했다는 것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림도 재미있고, 먹거리 위주의 사진이라서 그런지 사진을 보는 즐거움도 크다. 많은 여행을 해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여행 전 계획했던 일정대로 움직이는 스타일이었다. 이제 발길 닿는대로 떠나는 여행을 해보려고 한다. 내가 정한 여행 원칙인 '여행지의 대학, 미술관, 시장은 꼭 들러보기'를 실행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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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펄프픽션
이강훈 지음 / 웅진윙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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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공부를 하면서부터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일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3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일본에 다녀오자는 결심이 섰다. 두 달 후 가을에 도쿄 여행을 계획하고 있던 차에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단지 제목에 '도쿄'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는 이유로 읽고 싶었다. 제목도 특이하고 표지 디자인도 색다르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이야기 보따리가 숨어 있는 것 같다. 

이 두툼한 책 한 권을 너무도 재미나게 읽었다. '익숙하고도 낯선 도시, 도쿄에서 만난 공상의 시간들', 말 그대로이다. 저자가 지난 10년간 품고 있던 언젠가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주리라는 소박한 꿈의 즐거운 첫 단추가 바로 이 책이란다. 지난 4년간 몇 차례 방문한 도쿄에서 시간을 보내며 만난 삶과 사연에 대한 이야기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것이 소설인지 실재(實在)인지 헷갈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물론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지만 도쿄의 실제 장소를 배경으로 했고, 직접 그려 넣은 일러스트의 바탕이 된 사진들이 책의 내용과 맞물리는 것 또한 이야기가 허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한다.

아홉 가지 이야기를 읽으며 배경이 되었거나 언급되어진 장소를 차례 페이지에 적어 두었다. 이를테면 '살찐 고양이의 푸념' 옆에는 나카메구로(다이칸야마, 에비스), '상상도둑' 옆에는 야네센(야나카, 네즈, 센다기), 이런 식이다. 도쿄 여행을 계획하며 가보자고 생각한 지유가오카나 이케부쿠로 외에 도쿄에서 전철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 미타카에 들러 이노카시라 공원을 산책하거나 메구로 거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클라스카 호텔 505호 또는 506호에 머물러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room 506'에 등장하는 클라스카 호텔을 검색해보니 실재한다.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마다 나오는 스물 한 가지의 tokyo scene, 사진은 물론이고 함께 있는 짤막한 이야기들도 맘에 든다. 기치조지의 한적한 공원 산책로를 걷고, 야나카의 커피숍에서 연주곡을 들으며 커피 한 잔, 따사로운 햇볕을 쬐며 하라주쿠의 뒷골목을 거닐고, 시모키타자와의 고서점에 들러 책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어보고 싶다.  

이야기는 엉뚱하면서도 재미있다. 불가능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내심 사실이길 바라 보기도 한다. 나카메구로의 한 카페에서는 말하는 고양이를 만났다. 야나카레이엔이 끝나는 삼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카페 란포는 온갖 고양이들의 잡동사니로 가득한 작은 박물관 같다. 그곳에 또 말하는 고양이 료스케가 있다. 어쩌면 나는 도쿄 여행 중 그곳에 들러 좋아하지도 않는 고양이 얼굴에 대고 작은 소리로, 사바, 사바 속삭여 볼지도 모르겠다. 닛포리 역에서 약 20분 거리의 외진 주택가, 야나카 1번지에 위치한 야나카 고양이 탐정단 사무소 문 밖에서 안을 기웃거릴지도 모른다. 

소박하지만 역사가 긴 재래시장 거리, 야나카긴자도 구경하고, 도쿄의 어느 곳과도 비슷하지 않은 독특한 공기가 흐르는 동네, 시모키타자와에 들러 '오래된 책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작고 아름다운 카페' 기류사에서 아나키스트들의 모임을 몰래 훔쳐보는 것도 신나겠다. 이름도 근사한 이케부쿠로 웨스트게이트파크에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겠다. 도쿄를 여행하는 작은 즐거움 중 하나라는 한낮의 인적 없는 주택가 걷기도 해보고 싶다.

책을 읽고 나니 여행지를 도쿄로 정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도쿄 여행자들이 찾는 주요 여행지 말고, 이 책에 등장하는 곳처럼 소박한 곳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곳도 찾아다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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