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르부크 부인의 초상 샘터 외국소설선 4
제프리 포드 지음, 박슬라 옮김 / 샘터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은 이미 <유리 속의 소녀>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첫 선을 보인 제프리 포드의 작품입니다. <유리 속의 소녀>가 상당히 평이 좋아 책을 구해놨지만 아직 읽지는 못했는데, 어쩌다 보니 나중에 나온 이 작품을 먼저 읽게 되었네요. 순서야 어찌 됐든 제프리 포드의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당장 <유리 속의 소녀>도 읽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책도 찾아놨구요. 그만큼 매력 넘치고 재미있는, 한마디로 글 잘 쓰는 작가라는 결론입니다.


배경은 1800년대 후반의 미국입니다. 한때 빛나는 재능으로 다양한 주제의 실험적인 그림을 그렸던 피암보라는 화가가 주인공이고요. 현재 피암보는 부유한 계층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많은 돈을 벌고 있습니다. 사진이 발명되면서 이제 초상화의 수요가 떨어지리라는 관측도 있었지만 사진은 커다란 비용이 들지 않아 개나 소나(?) 다 찍을 수 있지요. 때문에 자신들의 우월성을 자랑하고 싶은 특권층들은 여전히 사진 대신 초상화를 원합니다. 그러니 피암보의 사업은 계속 번창일로에 놓여 있는 것이죠.


허나 피암보는 늘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지향했던 예술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던 어느 날 피암보는 샤르부크 부인으로부터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습니다. 고객 면담을 위해 부인의 집을 방문하지만 그녀는 병풍 뒤에 모습을 숨기고 목소리만 들려줄 따름입니다. 그리고 샤르부크 부인은 뜻밖의 제안을 해요. 절대로 나를 보지 말고, 내가 들려주는 과거의 이야기만 듣고서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제안이 바로 그것입니다.


초상화라는 그림의 성격 자체가 모델의 특성을 낱낱이 화폭에 재현하는 것인데, 얼굴을 보지 않고 그리라니요. 여기서 피암보가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가보슈. 난 그렇게는 못 그리우." 했다면 이 이야기는 허무하게 끝났겠지요. 하지만 당연히 그렇게 전개되지는 않으니 안심하기 바랍니다. 부인은 본인이 만족할 만한 초상화가 나오면 거액을 주기로 약조했습니다. 피암보는 결심해요. 어려운 도전이지만 이 그림을 잘 끝내 목돈을 바짝 땡겨서 앞으로는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만 그리자고.


피암보는 병풍 뒤의 샤르부크 부인으로부터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이야기에서 떠오르는 부인의 이미지를 온전히 상상력만으로 구체화할 작정인 것입니다. 하지만 부인의 이야기는 피암보가 전혀 생각도 못했던 기상천외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예컨대, 그녀의 아버지는 예언과 점술을 숭배하는 재벌에게 고용되어, 눈(雪)의 결정을 보고서 미래를 점치는 점술가예요. 여담이지만 재벌의 또 다른 고용인은 사람들의 배설물 모양을 보고 앞날을 예측합니다(물론 그분도 책에 등장합니다).


부인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도와 눈을 채취하고 그 표본을 만드는 일을 했는데, 자연계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아연실색하고 맙니다. 이 세상의 모든 눈은 마치 사람의 지문처럼 완벽히 동일한 모양이 나올 수가 없다고 해요. 하지만 부녀가 우연히 채취한 눈 결정 두 개는 형태가 완전히 똑같습니다. 부인의 아버지는 동일한 결정 두 개를 '쌍둥이'라 부르며 딸이 차고 있는 목걸이 안에 넣어줍니다. 신기한 일은 이것만이 아니었으니, 샤르부크 부인이 쌍둥이를 손에 넣은 순간부터 그녀에게 미래를 환시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피암보는 이 여자가 누구 앞에서 약을 팔아, 하며 절대로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아요. 부인이 제대로 미쳤거나, 얼치기 소설 지망생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속속 드러나는 증거들은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뒷받침해줍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피암보 앞에 두 눈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여자들이 자꾸 나타나는 것입니다. 샤르부크 부인을 만나고 나서 피암보의 익숙하고 편안한 세계는 점점 붕괴됩니다. 그는 혼돈에 빠져 허우적대지만 그림쟁이의 숙명에 따라 초상화를 그리는 데 열중합니다. 예술혼만큼은 어떤 경우에도 타올라야 하는 것이니까요.


이상이 앞부분의 줄거리인데, 신비스럽고 불가해한 일들이 연속되어 읽는 이를 아주 홀려버립니다. 진부한 말이지만 한 번 잡으면 절대로 놓을 수 없는 책이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이예요. 무엇보다 다채로운 소설들의 맛을 한껏 즐길 수 있지요. 눈의 결정을 보고 미래를 점친다거나 하는 초현실적인 설정들과 고대의 유물 등이 나오는 장면들에서는 빼어난 판타지 소설의 환상성을 흠뻑 즐길 수 있습니다. 실감나게 재현한 1800년대 후반의 미국 풍경이나 당시 예술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영락없는 역사소설이구요. 예술가로서 피암보의 방황과 고뇌, 그리고 진정한 자신의 예술을 찾아가는 과정은 일종의 예술소설로 봐도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샤르부크 부인의 정체나 눈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여인들의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은 그대로 한 편의 추리소설입니다. 모든 의문은 남김없이 풀리고, 그 의문에 대한 설명들은 추리소설의 논리에 확실하게 부합합니다(일부 초현실적인 설정들은 예외입니다). 다만 추리소설로서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최후에 밝혀지는 몇몇 비밀이 어느 정도 진부한 감은 있죠. 하지만 이 작품은 오직 추리소설로만 한정되는 작품은 아니기에 큰 결점은 되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서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왜 같은 얘기를 해도 더 재미있고 실감나게 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아무리 들어도 뻥인 것 같지만 그래도 한 번 믿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사람도 있고요.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천생 이야기꾼이 아닐까 합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능력은 아마 타고나는 것이겠지요. 제가 본 제프리 포드도 타고난 이야기꾼입니다. 기품 있는 문장력은 물론이고, 질릴 만하면 적당히 큰 사건을 펼쳐 독자의 시선을 붙잡아두는 감각, 성실한 자료조사와 발군의 아이디어까지 모든 면이 탁월합니다. 이런 작가가 하는 이야기는 아무리 뻔해 보여도 외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막상 한 번 들어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죠.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에도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보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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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하게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 국내에 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다 읽었습니다. 
   
  
 
5위. 성녀의 구제

 



 

 

 

 

 

 

'갈릴레오' 유가와 교수 시리즈 제4작. 다른 추리소설가들과 달리 히가시노 게이고는 유독 시리즈 캐릭터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3편 이상의 작품에서 활약한 캐릭터가 작가의 페르소나 가가 형사, 그리고 유가와 교수가 유일하다. 이중 가가는 직업 자체가 실제 사회에서 진짜 범죄를 수사하는 형사다 보니 사건의 배경이나 동기가 좀더 현실적이고, 수사관, 용의자, 사건 관계자의 심리도 공감이 가는 구석이 많다. 또한 간간히 사회 문제도 건드리고. 반면 유가와 교수는 추리소설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만들어보고 싶은 고전적인 명탐정 캐릭터에 가깝다. 다소 괴팍하고 까다로운 성품을 지녔지만 추리력만큼은 초인적인. 그래서 유가와가 다루는 사건도 다소 현실감을 희생하더라도 추리소설 세계에서는 흔히 통용되는 트릭과 논리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 <성녀의 구제> 역시 다른 건 다 제쳐놓고 트릭이 가장 빼어나다. 전작 <용의자 X의 헌신>의 핵심 트릭이 살인이 일어난 시각을 조작하는 알리바이 공방이었다면, <성녀의 구제>도 마찬가지. 다만 비슷한 알리바이 조작을 전작과 정반대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무릎을 쳤다. 트릭이 하도 기발해 자려고 누웠는데도 푸슬푸슬 웃음이 새어 나오더라. 어떻게 이런 역발상을! 게이고의 특징 중 하나가 <변신> <분신> 등 제목에 많은 내용을 담아내는 것인데, <성녀의 구제>도 과연 그렇다. 책을 다 읽고 '구제'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면 오슬오슬 소름이 돋을 것이다. 누군가 우스개로 한 '석녀의 구제'라는 말도 틀리진 않다^^ 

 

 

4위. 붉은 손가락

 



 

 

 

 

 

 

미소녀 게임이나 피규어에 미쳐 7살 소녀를 유괴하고 살인한 중학생 소년이 있다. 소년의 아버지는 참담한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아들의 장래를 위해 치매로 이성을 잃은 자신의 노모(소년의 할머니)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계획을 세운다. 어차피 노모는 심신미약 상태이므로 범인으로 몰려도 감옥에 갈 일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필 가가 형사가 사건을 수사하게 된 게 문제다. 범죄와는 인연이 없던 평범한 중년 남자가 형사들 사이에서도 수사가 뛰어나기로 정평 난 가가를 어찌 상대할 수 있겠는가. 기본적으로 범인의 시점과 형사의 시점이 교차하며 서술되는 일종의 도서 추리소설이라 볼 수 있겠다. 이 사건에서 가장 미약해 보이는 인물이 뜻밖에 놀라운 판단력의 소유자였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작위성이 엿보이지만, 가가와 범인 사이의 숨막히는 공방전은 물론 가가가 진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는 단서들이 균형 있게 배분되어 읽는 동안은 그런 약점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가가 형사 시리즈를 읽으면 보통 힘을 빼고 가볍게 쓰는 게이고의 필치와 달리 메시지나 트릭, 완성도 면에서 남다르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아마 작가도 자신을 대표하는 시리즈라고 생각하는 듯.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다른 작가들의 시리즈와 달리 가가 형사 시리즈는 각 권이 철저하게 독립적이라는 데 있다. 다른 작가들의 시리즈는 전작에 나왔던 조연들을 다음 편에도 등장시켜 자연스럽게 전작과의 연결고리를 만든다거나, 마치 드라마나 영화의 속편을 보는 것 같은 익숙함을 내세운다. 하지만 가가 형사 시리즈에서는 그런 게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잠자는 숲>에서 가슴이 터질 듯한 로맨스를 선보였음에도 다음 편에는 그 일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는 것이다. 그냥 가가는 여전히 독신이다, 한마디 설명으로 땡. 전작의 설정들에 이어서 쉽고 편하게 갈 수 있는 유혹을 무시하고 매번 새로운 인물과 사건을 등장시켜 시리즈 중 어느 작품을 읽어도 참신하니 참말로 대단한 수완가가 아닐 수 없다.

 

 

3위. 용의자 X의 헌신

 



 

 

 

 

 

 

나오키상 수상작. 다섯 번이나 물을 먹고 이 작품으로 겨우 수상했다. 또한 후쿠야마 마사히루, 시바사키 코우 등의 올스타 라인업으로 영화화되기도 하는 등 2000년대 게이고의 최대 히트작으로 봐도 틀림이 없을 것 같다.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 교수와 대학 시절부터 그가 유일하게 손꼽던 적수, 즉 수학의 달인 이시가미의 대결 구도로 진행된다. 필자는 바둑을 두는 법을 모르지만 바둑의 고수들은 상대의 앞수를 예측하고 그에 맞게 수를 두면, 상대는 그다음 수를 예상하고 , 그걸 또 앞서 계산하는 등 나중에는 한 판 전체가 머릿속에서 돌아간다고 한다. 두 사람의 대결 또한 그렇다. 라이벌보다 한 수를 더 생각하고, 한 발짝 더 나아가 상대가 마침내 돌을 던지게 만들기 위한 두 사람의 팽팽한 지략 대결이 최대의 재미 포인트. 개인적으로는 게이고의 단골 남자 주인공인 사랑에 목 매어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하는 신파형 캐릭터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등 당대의 순애 코드와 맞아떨어져 이토록 대성공을 하지 않았나 싶다. 묘사가 별로 없고, 설명보다는 대화가 많은 게이고의 스타일에 따라 걸리는 부분도 없이 술술 잘 읽힌다. 하긴 워낙에 미친 속도감을 자랑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읽다보면 어느새 끝이라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지나치는 장점들이 많은데, <용의자 X의 헌신>도 재독할수록 참 짜임새가 있고, 곳곳에 복선이나 단서를 교묘하게 잘도 깔아놓았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무엇보다 최고의 장점은 아무래도 범인의 성격에 걸맞는 트릭에 있지 않을까 싶다. 어떤 추리소설을 보면 얘가 범인인 건 알겠는데, 그간 묘사한 범인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범죄의 양상에 흥이 떨어지는 경우도 왕왕 있다. 하지만 <용의자 X의 헌신>의 범인 이시가미가 공들여 짠 트릭의 목적이나 방법 등은 앞서 묘사된 그의 성격과도 정확하게 일치해 독자로 하여금 이 이야기에 한결 더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2위. 백야행

 




 

 

 

 

 

 

믿을 건 서로밖에 없었던 두 남녀의 사랑과 범죄의 연대기.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일본 사회의 변화상이나 기술 산업의 발전 양상 등이 비교적 세밀하게 그려져 작가의 대표작 중에서는 조금 다른 지점에 위치하는 걸작이다. 직접적인 심리 묘사는 배제하고 대부분 두 남녀 주인공의 행동만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런 표현상의 난제에도 불구하고 두 남녀의 성공에 대한 욕망이나 서로에 대한 질긴 사랑을 미묘하게 독자에게 전달해내는 작가의 테크닉이 발군이다. 내가 이만큼 널 사랑해, 하고 목놓아 외치는 것보다 때로는 말없이 상대의 옷깃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는 장면이 더 깊은 사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백야행>이야말로 바로 그런 작품이 아닐런지. 유년 시절부터 성인이 되서까지 끊임없이 범죄에 몸을 담구는 두 주인공의 인생 항로와 작품의 배경이 되는 일본의 천변만화하는 시대상이 절묘하게 맞물려 한 번 잡으면 절대로 놓을 수 없는 책이다. 더구나 이 작품 역시 사랑 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는 한 여인과 그녀를 위해 평생을 음지에 숨은 채 그녀의 비밀스런 욕망을 돕기 위해 애쓰는 신파남이 등장한다. 이쯤되면 뇌를 해부해서 작가의 여성관을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 이런 사회파 추리소설에 가까운 얘기 속에서도 게이고의 본격 트릭에 대한 본능이 여전한 것도 이채롭다.

 

 

1위. 악의

        



 

 

 

 

 

 

아직까지는 게이고 최고의 작품으로 꼽고 싶다.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집에서 목이 졸려 살해당한다. 시체를 발견한 사람은 그의 친구이자 인기 없는 아동문학가. 발견자는 작가답게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한 이번 사건을 충실히 기록하는데, 마침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가 예전 고교 교사 시절의 동료였던 가가인지라 그에게 수기를 전달하며 사건에 참고하라고 한다(가가 형사가 교사를 그만둔 이유가 이 작품에서 설명된다). 수기를 꼼꼼이 읽은 가가는 몇 가지 수상한 점을 발견하는데...진범이 밝혀지는 건 책의 초반부. 진정한 문제는 범인이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가, 누군가가 타인의 목숨을 뺏고 그의 모든 성취를 망가뜨리려 획책하는 비열한 악의가 어떻게 태어나는가에 있었다. 단순한 추리 게임 같았던 초기 작풍에서 벗어나, 인간이라는 불가해한 존재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범죄 심리에도 눈을 돌린 현재의 게이고 스타일이 완성된 걸작. 수기와 실제 현장 상황을 비교해가며 진실에 이르는 물리적인 단서들과 수기에서 피어나는 정체 모를 위화감을 차근차근 분석해 범인의 진짜 목적까지 추출해내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 균형 있게 조화를 이뤄 일급의 재미를 선사한다. 우리 게이고가 변했어요, 하는 최초의 작품을 보통 <숙명>이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약간은 어설픈 면이 보였던 <숙명>보다는 <악의>가 진정한 게이고 문학의 신호탄이라 생각한다.

 

 

 

이상으로 내가 뽑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베스트 10을 마친다. 일본도 그렇지만 국내에서 또한 추리소설을 잘 모르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폭넓은 사랑을 받는 작가라 사실 굳이 또 한 번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잘하는 거 다 아는데 듣기 좋은 노래도 한두번이지 잘한다, 잘한다 자꾸 해봐야 역효과만 나는걸. 하지만 모든 작품이 순차적으로 나와 조금씩 성장해가는 작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초기작과 최신작, 대표작과 범작이 무차별로 쏟아져 나와 조금 저평가되는 면에서는 아쉬움이 있다. 이 작가는 처음부터 완성됐다기보다 꾸준히 쓰면서 탄탄해진 사람이라 확실히 떨어지는 초기작만 보고 이제 더 볼 필요가 없겠구나, 하고 오해하는 독자들도 있다는 게 안타깝다는 말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거장의 필수 조건 중 한 가지를 다작으로 꼽는다. 초기에 반짝하다 아이디어가 고갈되어 작가 생활 후반기에는 집필보다 온갖 가십면에 더 많이 나오는 그런 사람보다는 무조건 쓰면서 느릿느릿이라도 끊임없이 전진하는 작가야말로 나의 우상이라는 얘기다. 언젠가 먼 훗날, 게이고는 에도가와 란포-요코미조 세이시- 마쓰모토 세이초 계보를 잇는 일본 추리소설의 새로운 거장으로 평가받으리라 확신한다. 어쩌면 8부 능선쯤은 이미 넘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보너스. 국내에 나온 그의 작품들을 그 수준에 따라 상중하로 나눠 한 줄로 소개한다. 상품은 취향 때문에 아쉽게 베스트10에 들지는 못했지만 절대 떨어지지 않는 작품, 중품은 재미만큼은 보장하는 작품, 하품은 시간이 남아돌면 읽으시길.

 
<상품>

 
<편지> - 아아, 너무 감동적이야...
<내가 그를 죽였다> -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에 이은 범인찾기 놀이. 용의자가 셋이라 난이도도 세 배.
<방황하는 칼날> - 소년범 문제를 다룬 서스펜스. 게이고 풍미가 남김없이 녹아 있는 수준작.  
<옛날 내가 죽은 집> - 딱 하룻밤 새 벌어지는 그날 밤의 비밀찾기. 오싹한 분위기가 그만이라 게이고의 호러도 보고 싶다. 
<잠자는 숲> - 모든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중 최고의 마무리! Sooooooo Romantic!!!
<호숫가 살인사건> - 비뚤어진 부모들의 교육열을 다룬 사회파 터치의 작품. 이런 책을 보면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다른 게 별로 없다.
<도키오> - 게이고판 <백 투 더 퓨처>. 과거에서 만난 미래의 아들. 시간여행의 잔재미와 부자가 힘을 합쳐 모험에 나서는 줄거리가 훈훈한 성장소설. 

 

 
<중품>

 
<탐정 갈릴레오> - 과학 모르면 추리소설도 보지 말라는 소리요!
<예지몽> - 유가와 교수 대단하네, 이런 것도 알고, 하고 박수치는 것 말고 독자가 추리할 여지가 별로 없다.
<방과후> - 데뷔작. 고무줄로 장난치는 전형적인 밀실 트릭.
<유성의 인연> - 하야시라이스만 기억난다. 
<동급생> - 억지스런 기계 트릭이지만 청춘의 분위기만큼은 정말 사랑스럽다. 수준을 떠나 무척 좋아하는 작품.  
<레몬(분신)> - 인간복제를 소재로 다룬 과학 서스펜스. 여운 있는 결말이 좋다.  
<변신> - 뇌과학을 소재로 다룬 과학 서스펜스. 영화판에서 내 사랑, 너의 사랑 아오이 유우가 나왔다.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 게이고는 단편은 그저 그렇다. 심지어 가가 형사가 나온다 해도.
<교통경찰의 밤> - 그래도 주제가 통일되는 연작 단편집은 좀 나은 편.  
<환야> - 흥미롭지만 <백야행>을 똑같이 한 번 더 쓸 필요는 없었잖아. 
<괴소소설> - 츠츠이 야스타카풍 풍자, 독설 소설집. 게이고는 은근히 이런 장르도 잘 소화한다.
<독소소설> - <괴소소설>과 동문.
<흑소소설> - <독소소설>과 동문.
<아내를 사랑한 여자> - 게이고도 여자를 모른다. 남성적인 작가 게이고가 오묘한 여자의 심리를 그려내기란 좀 어렵지.  
<숙명> -  오래전에 봐서 기억이 잘...석궁 갖고 위험하게 노는 것 같던데.
 

 
 
<하품>
 

<회랑정 살인사건> - 굳이 우리나라에 소개할 필요가 있었을까.
<브루투스의 심장> - 로봇을 등장시켜 우수한 추리소설을 쓰는 사람은 정녕 아이작 아시모프밖에 없단 말인가. 
<백마산장 살인사건> - 신사숙녀 여러분. 히가시노 게이고 골든 래즈버리 상 위너는 바로 이 작품입니다!
<범인 없는 살인의 밤> - 게이고는 단편은 그저 그렇다. 심지어 가가 형사도 안 나오면 더 그렇겠지. 
<11문자 살인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의 실패작(11문자임).
<아름다운 흉기> - 살인병기로 재탄생한 철인3종 경기 여성 선수. 철인3종 하지말고 그냥 시집이나 가지 그랬어. 
<수상한 사람들> - 수상하게 시시한 단편집.
<사명과 영혼의 경계> - 2000년대 작품 중에서는 드문 졸작. 메디컬 서스펜스와는 맞지 않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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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10-07-31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유성의 인연> 하야시라이스 ㅋㅋㅋㅋㅋ
개인적으로 저도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best 1은 <악의>를 꼽고 싶네요 :)
그러고보니 저도 궁시렁거리면서도 엄청나게 읽어댔군요 ㅎㅎ

하이드 2010-08-01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장의 필수조건이 다작이라니 독특하시네요


jedai2000 2010-08-0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하야시라이스가 어떤 맛인지 넘 궁금하더군요^^ 저도 <악의>야말로 걸작이라고 생각해요. 글구 워낙 많은 작품이 쏟아져 나오니 안 볼 수가 없잖아요ㅎㅎ

하이드님...제 생각은 그래요. 반드시 충족해야 할 필수조건이죠. 5권 써서 3권이 좋은 작가보다, 50권 써서 10권이 좋은 작가가 거장이 아닐까 싶은데요^^ 크리스티, 카, 퀸, 세이시, 란포, 세이초, 맥베인, 딕 프랜시스, 웨스트레이크 같이 40권 이상 어느 수준 이상의 저서를 남긴 작가들이 제가 생각하는 거장들이예요. 일반문학 쪽에서 예를 들어 샐린저나 하퍼 리 같은 경우 분명 엄청난 작품을 남겼지만 단 한 권 뿐이라, 한 편의 임팩트는 그만 못해도 좋은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한 다른 작가들이 문학계에 기여한 바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요절이나 불의의 사고, 질병 등으로 쓰고 싶어도 못 쓴 작가는 예외입니다만...그런데 그런 작가분들은 불행한 천재 타이틀을 받는 게 맞겠죠. 거장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pjy 2010-08-02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위를 제외하고 일단 다 읽은 거군요~상중하중에서도 이것저것 아는척 할 수 있는데요~
그러고보면 게이노를 나름 꽤 읽었나봐요~

감동적인데 10권밖으로 밀리는 편지~나름 고민되셨던 순위인가봅니다ㅋㅋ

jedai2000 2010-08-03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jy님...제일 고민했던 건 <방황했던 칼날>이었습니다ㅎㅎ <성녀의 구제>와 <방황했던 칼날> 사이에서 장고했죠^^ 근데 제 취향이 트릭을 더 중시하는 파라 <성녀의 구제>를 뽑았단ㄴ^^;;

쥬베이 2011-05-08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제다이님^^ 이런건 제다이님 아니시면 못하는 거죠
[[<11문자 살인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의 실패작(11문자임).]] 여기서 빵터짐ㅋㅋㅋ
모조리 다 제다이님 의견에 공감합니다^^
(근데,사명과 영혼의 경계는 중간정도는 가지 않을까요
저는 중간으로 할께요 ㅋ)

쯔센 2011-09-19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개인적으로 악의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호숫가의살인사건도 꽤나 재미나게 봤죠 뭔가 납득이 잘가서 정말 오싹했습니다. 사실 별거 아닌 내용인데도. 내 가족이 그것도 자식이 살인을 저지른다면 나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엄청 오싹하게 봤던. 근데 히가시노 게이코 작품은 거의 드라마로 봤네요;; 책은 별로 안본;;;;

쥬베이 2011-09-24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의>를 아직 못읽었어요...
지금 히가시노 게이고 읽은 책들 따로 정리했는데, 반도 못읽었네요 휴
언제 출간작 다 읽을라나...또 신작 나왔더라고요ㅋㅋㅋ

저는 <동급생>이 무척이나 좋았어요
학원물을 좋아하는지라, 더 애정이 팍팍ㅋㅋ

쥬베이 2011-09-27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오늘 <악의> 읽었습니다^^
역시 1위답더라고요
[우리 게이고가 변했어요, 하는 최초의 작품]이라고 하신 이유를 이해했습니다.
근데, 이상하게 가가형사한테는 정이 안가요ㅋㅋㅋ

쥬베이 2012-04-15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저는 3,4,5위가 약간 뒤로 밀려가고,
<동급생>, <도키오>, <새벽 거리에서>가 상위권으로요ㅋㅋ
<사명과 영혼의 경계>에 대한 코멘트 공감100%요!! 얼마전에 다시 읽었는데.
진짜 오글거려서ㅋㅋㅋ
그리고, <프래티나 데이터>인가, 이것도 최악이더라고요
고스트라이터가 쓴 것같은 느낌까지 들었어요

쥬베이 2012-04-15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얼른 컴백하셔서...업데이트 해주세요^^
<다잉아이>, <새벽거리에서>, <백은의 잭>, <신참자> 같은 것들요,
제다이님 평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 평가는 보고 싶지 않네요ㅋㅋㅋ

Wondercho 2018-01-10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백야행 보고 감동 받아서 다른 책 빌렸다가 실망하고 다시는 안 읽었는데...! 이렇게 딱딱 상품/중품/하품 나눠서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jedai2000 2018-01-12 01:07   좋아요 0 | URL
이야, 이 글이 언제적 썼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아직도 읽어주시는 분이 계시다니 정말 반갑네요.

제가 한 2년간 인터넷에 염증을 느꼈던 시절이 있어서 쥬베이님의 덧글도 지금 처음 보네요. 늦었지만 쥬베이님의 덧글에도 감사드립니다.

한 7년 정도 전에 쓴 글이라 그 뒤에도 게이고 책이 아마 20권은 더 나왔을 거예요. 워낙 많이 나오기도 했고, 스타 작가라 책값도 비싸서ㅠ.ㅠ 다 읽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여기 언급한 작품들 말고 게이고의 새로운 작품들로만 평가를 꼭 업데이트하겠습니다^^
 



일본의 추리소설 열풍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미 1984년에 350종 출간을 돌파하여 1일 1권 시대를 열었고, 2000년대는 대략 연평균 450종 정도의 추리소설이 나온다고 하니, 가히 추리소설의 '왕국'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렇다면 현재 이 추리소설 왕국을 지배하는 왕은 누구일까? 인기와 실력을 두루 갖춘 후보가 여럿이겠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야말로 최강자가 아닐까 싶다. 1985년 <방과후>로 신인상에 해당하는 에도가와 란포상을 받고 데뷔한 그는 25년 가까운 작가 생활 동안 70편에 달하는 많은 작품을 써냈으며, 1999년 <비밀>로 추리작가협회상, 2006년 <용의자 X의 헌신>으로 나오키상을 수상하며 평단에서도 인정을 받았고, <변신> <게임의 이름은 유괴> <호숫가 살인사건> 등 영화화된 작품이 11편, <유성의 인연> <백야행> 등 드라마로 만들어진 작품이 무려 20편일 정도로 베스트셀러 제조기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대 장점은 뭐니뭐니 해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토리텔러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의 머리를 꾹 누르면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툭 튀어나오지 싶은데, 말이 70편이지 아무리 소설가라도 그 정도 양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게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더군다나 그가 창조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대충 막 지어낸 것도 아니다. 일단 집필의 기본이 되는 발상이나 소재를 뽑아내는 능력부터가 탁월하다. 빙의나 시간여행 같은 초현실적인 것에서 노인문제나 청소년범죄 등 당대 일본 사회의 첨예한 이슈까지 한마디로 자유자재. 이렇게 독자의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할 만한 소재를 고른 다음, 특유의 현란한 전개와 견고한 구조, 공들인 트릭과 반전으로 책을 다 읽은 독자의 입에서 '졌다' 소리가 절로 나오게 만든다. 신본격 작가들의 '언플'로 인해 어느새 트릭의 대명사가 신본격이 됐지만 개인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트릭이 그들에 비해 빠지는 구석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무엇보다 대다수의 신본격 작가들이 아이디어와 창작력이 절정에 달하는 젊은 시절 잠깐 반짝이고 마는 경우가 많았다면, 게이고는 장년에 이른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완성도 높은 플롯과 트릭을 쏟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넘사벽'이라는 것이다.

 

물론 게이고의 단점도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문장이 평이하고 묘사가 없다. 이는 타고난 글솜씨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가 한 문장, 한 문장 힘을 줘서 썼다면 지금처럼 많은 작품을 내지는 못했을 듯하다. 예를 들어 그가 묘사하는 파티 장면이 있다고 하자. 다른 작가들 같으면 파티장 내부나 집기의 배치, 참석자들이 입은 옷과 나온 음식을 꼼꼼히 그릴 터. 하지만 게이고는 이런 식이다. "야마다 나오코는 호화찬란한 파티장에 들어섰다. 다른 참석자들이 입은 화려한 드레스와 자신의 초라한 옷이 비교되는 것 같아 괜시리 얼굴이 붉어졌다." 요즘 유행하는 드레스의 경향이나 디자인의 전반적인 흐름 등을 취재하는 데는 시간이 든다. 게이고는 플롯의 핵심도 아닌 걸 취재할 바에야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이야기를 쓰자는 주의인 것이다. 이건 아마도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펑펑 샘솟는 사람만의 어쩔 수 없는 고충(?)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게이고가 1년을 넘게 투자하여 에도시대 배경의 추리소설을 쓴다거나 하는 건 기대하지 말도록 하자. 이공계 출신인 자기가 잘 아는 과학이나 취미인 스포츠 등의 소재만으로도 그럴싸한 이야기를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데 굳이 우리도 하기 싫은 공부를 작가한테까지 강요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작가도 자기의 단점을 모르지는 않는다는 거다. <명탐정의 규칙> 같은 책을 보면 자기도 문장력 없고 깊이 있는 성격 묘사 안 된다는 걸 자조적으로 고백하곤 한다. 나는 게이고의 이런 면모가 좋다. '나 글 못 쓰고 깊이 없어. 하지만 잘하는 분야에서는 그야말로 끝내주지. 굳이 단점이 아니라 장점을 봐주면 안 될까?' 아아, 호쾌하도다! 국내 출간된 작품 중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베스트를 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잘하는 분야에서 그가 얼마나 '끝내주는지' 알리고 싶어서다.

 

 

            

* 완벽하게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 국내에 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다 읽었습니다.
 
 
10위. 게임의 이름은 유괴 
  



   

 

 

 

 

 

부자 아버지를 골탕먹이려는 철없는 아가씨와 주어진 모든 일을 게임처럼 처리하는 쿨한 남자 주인공이 손을 잡고 가짜 유괴극을 벌인다. 그러나 한탕에 완전히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찰나 뜻밖의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는데...휴대폰, 이메일, 디지털 카메라 같은 현대적인 문명의 이기를 총동원하고, 혼잡스러운 도심지의 특성을 교묘히 이용해 범죄를 성공시키는 등 세련되고 감각적인 느낌의 도시 추리소설이다. 특히 후반부에 연달아 터지는 반전의 반전의 반전은 읽는이를 혼절 직전까지 몰아갈 테니 안전벨트를 꼭 하시길. 빠른 템포에 엎치락뒤치락하는 전개가 전형적인 히가시노 게이고표라 그를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이야기 자체도 깔끔한데다 내용이 그리 어렵지 않으니 입문용으로는 딱이 아닐까. 유괴라는 범죄는 처음 목표 대상을 점찍고 납치하는 과정도 어렵지만 막상 유괴에 성공해도 인질을 감금하는 장소 구하는 게 문제다. 아무 곳이나 고르면 탈출할 염려도 있고, 옆집의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최고의 난제는 인질의 가족을 만나 돈을 받아내는 것. 돈을 받기 위해 필연적으로 한 번은 그들과 만나야 하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잠복한 경찰에게 걸릴 확률이 99.9퍼센트다. 이렇듯 쉽지 않은 유괴라는 범죄의 뒤엉킨 실타래를 산뜻하게 풀어낸 게이고의 역량에 박수를 보낸다.

 

 

9위. 졸업

 



 

 

 

 

 

 

게이고의 두 번째 작품이자 그의 분신과도 같은 가가 형사가 첫 선을 보인 기념할 만한 작품. 뛰어난 추리력 못지않게 인간적인 성품이 매력적인 가가 교이치로가 대학 졸업반인 단짝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파헤친다는 줄거리다. 나중에 가가는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민완 형사로 활약한다. 당시 게이고는 그때도 이미 추리소설 독자 사이에서 본 거 또 보고, 또 본 거 계속 보고, 라는 말을 들었던 암호나 다잉 메시지, 밀실 등의 고전적인 트릭을 발전시켜 현대에도 통용되는 훌륭한 추리소설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게이고의 말마따나 과연 <졸업>은 그의 초기 스타일인 학원물+물리 트릭의 공식을 아예 극한까지 밀어붙여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는 느낌마저 준다. 작품의 핵심 미스터리는 잠긴 문의 열쇠 트릭과 '설월화'라는 복잡한 일본 다도의 법칙을 이용한 독살 트릭 두 가지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첨단 신소재에 대한 지식에 어두운 사람이라면 맞출 길이 없는데다 좀 황당하다. 그러나 20장 가까운 설명 그림까지 동원하는 두 번째 독살 트릭은 숫제 기가 막힌다. 끝없이 계속되는 그림과 설명이 복잡하기 그지없어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하지만, 그만큼 독자를 속이고야 말겠다는 작가의 집념이 오롯해 추리소설가란 이렇게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구나 하고 묘한 부분에서 감탄하고 말았다.
 

 
8위. 비밀 
  


 

 

 

 

 

 

교통사고로 아내는 죽고 딸만 간신히 살아남는다. 하지만 사고의 충격으로 딸의 영혼과 아내의 그것이 뒤바뀌어버리는데...몸은 딸이라도 마음이 아내의 것이라면 이 사람은 과연 내 아내일까, 딸일까? 남편은 분명히 아내와 같이 살지만 성관계를 할 수도 없다. 딸의 몸에 어찌 추악한 짓을 할 수 있겠는가. 판타지에 가까운 도발적인 설정에 중년 남자의 어쩔 수 없는 윤리적인 딜레마를 담아낸 게이고의 문제작. 빙의라는 초현실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곳곳에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미스터리 요소가 있어 추리소설로도 일급이다. 딸(=아내)은 성장하면서 다시 학교를 다니고 그곳에서 다른 학생의 프러포즈를 받는 등 이미 한 남자의 아내로 시들어버린 과거에 느껴보지 못했던 감동을 받는다. 하지만 서서히 늙어가기만 할 뿐인 남편은 아내의 변화를 막을 명분이 없다. 이런 남편의 절절함과 쓸쓸함의 정서가 깊이 배어 있어 페이지를 다 덮고도 우울한 느낌이 한참 지속되는 책이다. 가만 보면 게이고의 작품에는 언제나 그가 보는 일관적인 남녀상이 드러난다. 남자는 항상 신파에 가까울 정도의 순애를 보여주는 반면, 여자는 그런 남자를 받아주지 않는가 하면 앞뒤를 재거나, 심지어 이용하기까지 한다. 아무래도 작가는 젊었을 적에 간보는(?) 여자에게 된통 당해본 적이 있는 듯-_-;;

 

 

7위. 명탐정의 규칙

 



 

 

 

 

 

 

추리소설가로서 게이고의 자세를 폄하하는 글을 간혹 보는데, 그럴 때마다 솔직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적어도 추리소설가 게이고의 도전 정신이나 진지함만큼은 다른 모든 것들을 부정하더라도 인정해줘야 할 부분이다. 게이고는 데뷔 초기에는 고전적인 트릭의 현대적인 변용이나 깜짝 반전, 뜻밖의 범인 같은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장치들을 중시했다. 하지만 중기 이후로는 작풍의 변화를 이뤄, 범인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도 시선을 둠으로써 동기 면에서의 의외성도 충분히 이끌어내고 있다. 요컨대 게이고는 끊임없이 고뇌하는 추리소설가라는 거다. 현대의 추리소설이 어디까지 도달했나, 나는 어떤 추리소설을 써야 하는가, 지금까지도 성공스러운 경력을 이뤘지만 뭔가 새로운 걸 추구해야 하는 시점이 아닐까 등등. 이런 게이고의 고뇌의 산물이 바로 이 작품이 아닐까 싶다. <명탐정의 규칙>은 긴다이치 코스케를 연상시키는 명탐정 덴카이치 다이고로가 기존 추리소설들의 온갖 클리쉐 속에서 발버둥치는 일종의 패러디 단편집으로 밀실, 동요살인, 다잉 메시지 등 요란하지만 비현실적이고, 흥미롭지만 진부한 추리소설의 공식들을 갖고 놀며 완전히 산산조각을 내버린다. 동료 추리소설가는 물론 게이고 자신에게도 풍자와 비판의 칼끝을 들이대는 이 작품은 다소 가볍다는 약점이 있지만 기존의 것들을 해체하고, 새롭고 다른 것에 도전해보겠다는 작가의 결기가 느껴져 작가의 팬으로서 무척 좋아한다. 사실 닥치는 대로 망가뜨리는 식의 패러디는 웬만큼 글줄을 쓸 줄 알면 누구나 가능하다. 그러나 <명탐정의 규칙>은 작가가 언급하는 전형적인 추리소설 공식에 따라 나름 내적 완성도가 있는 단편 하나를 완성하고 그 안에서 비난을 하는 식이라 공히 한 수 위라 할 만하다.

 

 

6위.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믿고 보는 가가 형사 시리즈다. 위에 언급한 혁신가로서 게이고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하면 좋을 듯. 어느 여자 A의 독살 사건이 벌어진다. 용의자는 그녀를 버린 남자 애인B, 그리고 A의 절친한 친구이자 B와 바람이 난 C여인. 달리 동기와 기회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디까지나 범인은 남자B와 여자C 둘 중의 하나. 친구의 애인을 빼앗아가는 일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하니 비교적 현실감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이 무엇보다 새롭고 색다른 것은 사건을 수사하는 가가 형사의 모든 행적과 마음속 추리가 꼼꼼하게 그려지다 범인이 밝혀지기 직전에 모든 페이지가 끝나버린다는 것에 있다. 누가, 어떻게 죽였는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생각하기도 귀찮으니 그냥 범인을 빨리 알려주소, 하고 마는 게으른 추리 독자들에게 날리는 게이고 나름의 일침이랄까. 귀중한 단서를 숨기는 것도 없고, 반칙도 없다. 꼼꼼히 생각해보면 누구나 맞출 수 있는 것이다(하지만 게이고는 일급 추리소설가라 당연히 쉽지는 않다-_-;;). 이 책을 읽는 동안 모처럼 공책에 B와 C가 수상한 점을 낱낱이 적어보며 내가 가가 형사가 된 듯 추리하는 맛에 흠뻑 젖었다. 옛날 애거서 크리스티 책을 보면서 이랬었는데, 내가 너무 이 맛을 잊고 살았어, 하며 진심으로 흐뭇했다. 게이고가 독자에게 원한 것도 아마 이런 능동적인 자세가 아니었을까. 만약 답을 맞추지 못해도 해설에 힌트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하지만 해설도 몇 번 꼬아놓아서 당연히 쉽지는 않다-_-;;). 처음 나온 단행본은 지금보다 난이도가 쉬웠는데 해설이 없었고, 나중에 나온 문고본은 난이도를 높인 대신 해설을 추가했다고 한다. 국내에 출간된 책은 문고본 판으로 알고 있다.             

 

 

<下>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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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7-30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없이 읽다보니 제목은 베스트 10인데? 아...하편에^^;
좋아하는 작가지만 골라읽다 보니 해당되는 건 일단 10위뿐~ 아주 재미나게 뒷통수를 쳐주었던 책으로 기억합니다^^
게으른 독자인데다가 남자취향이 편협해서 가가형사가 맘에 안드는--;

jedai2000 2010-07-31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ju님...제가 어제 깜박 잊고 <베스트 10>의 상편이라고 쓰지를 않았네요^^ 두 번으로 끊어서 읽는데 지장을 드려 죄송합니다. 그런데 정말 가가 형사가 맘에 안 드세요. 이래서 남녀의 시각차가 있는 건가 보네요. 왜 남자가 좋아하는 남자,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가 다르잖아요. 여자도 마찬가지로^^ 제게 가가 형사는 추리소설 탐정 캐릭터 중 최고의 매력남인데^^

쯔센 2011-09-19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비밀은 최악이었는데. 그때 당시 엄청 기대하고 사본. 책 '비밀'은 완전 최악. 영화는 b급. 그래서 한동안 히가시노 게이코 작품은 손도 안댔었는데....

쥬베이 2011-09-24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졸업> 읽으려고, 눈앞에 준비중입니다ㅋㅋㅋ
그전에 제다이님, 평 읽으려고 들어왔어요.
(아, 노블하우스 판 <레몬>은 좀전에 읽었는데,
거기 앞부분에 제다이님 편집자 코멘트 있어서 엄청 반가웠어요^^)

쥬베이 2012-04-15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들 대부분 다 읽고나서
다시 제다이님 글 읽으니 느낌이 팍팍 오네요^^
설명을 어쩜 저리 잘하셨는지ㅋㅋㅋ <게임의 이름은 유괴>도 한번더 읽었어요.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 아 아이이치로 시리즈
아와사카 쓰마오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한마디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걸작 미스터리 단편집. 일본에서 1978년에 출간된 단편집이라 왜 이제야 왔어, 하고 대체로 황홀한, 그러나 조금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책을 몇 번 쓰다듬고 나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스 조각을 연상시키는 미남 탐정 '아 아이이치로'가 8개의 독특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들이 수록된 이 단편집은 몇 번이고 꺼내 읽고 싶어질 정도로 위트 있고 기발한 플롯과 트릭들로 가득하다. 뜬구름이나 곤충 등 별 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만 촬영하는 카메라맨 아이이치로는 촬영 현장에서 늘 우연히 사건과 맞닥뜨리는데, 워낙에 꽃미남인지라 사건에 관계된 여자들은 그를 보고 항상 얼굴을 붉힌다. 하지만 이내 여자들이 헛웃음을 짓고 마는 것은 아이이치로의 굼뜬 행동과 둔한 운동신경, 그리고 말더듬이 때문. 세상은 역시 공평해, 저렇게 잘 생긴 사람이 이토록 헐렁할 줄이야 하고 비웃는 순간, 아이이치로의 날카로운 추리력이 빛을 발한다. 물론 명추리를 선보이는 상황에서도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덜덜 떨며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그 효과가 반감되지만...

 
조각 미남에 얼빠진 행동, 그러나 비범한 추리력이 한데 뭉친 이 사랑스러운  탐정은 아 아이이치로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작가 아와사카 쓰마오가 혹시 나중에 '일본탐정 인명사전'이라도 발간되면 제일 먼저 등장하게끔 하려고 일부러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일본어의 50음도는 '아이오에우' 순이기 때문에 이름과 성이 둘다 '아'로 시작하는 이 탐정이 첫 타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만약 '일본탐정 인명사전'이 한국에서 번역되어 나온다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교이치로'가 처음이 될 것이다. 우리 말은 '가나다라' 순이니까^^ 

 
아이이치로도 그렇지만, 네이밍 센스에서도 볼 수 있듯 작가 아와사카 쓰마오도 걸물이다. 기발한 장난감과 마술을 좋아해서 실제로 마술사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자기 이름을 딴 마술상도 있단다. 1970년대 일본 추리소설계의 풍경을 엿볼 수 있어 무척 흥미진진한 해설을 보면, 특히 바에서 호스티스들에게 마술을 선보여 인기만점이었다고 하니 만나면 언제나 유쾌하고 즐거운 술친구 같은 작가였던 모양이다. 나오키상,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같이 받을 만한 상도 다 받고 잘 나가던 분인데, 2009년초에 별세했다고. 한국어판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가 표지부터 책의 모든 부분에서 만듦새가 출중해 한국어판을 보고 아이같이 좋아했을 장면이 상상되는데, 조금 늦은 한국어판 출간이 영 아쉽다.

 
아와사카 쓰마오의 별명은 '일본의 G. K 체스터튼'이다. 과연 '브라운 신부' 시리즈로 추리소설 역사에 찬란히 남은 명단편들을 선보인 체스터튼과 유사한 작풍이 보이는데, 인간의 행동 뒤에 감춰진 심리에 기반을 둔 추리나 기발한 착상의 트릭, 탐정 캐릭터의 유사상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브라운 신부 역시 아이이치로처럼 총기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얼빠진 행동만 보고 무시하면 큰코다치는 추리력의 소유자다. 둘다 항상 박쥐우산을 들고 다니고, 자주 잃어버리는 것도 비슷. 다만 유일하게 다른 건 외모도 둔중한 브라운 신부와 달리, 아이이치로는 꽃미남이라는 것뿐이다.


 
체스터튼의 단편들처럼 'DL 2호기 사건'과 'G선상의 족제비' 같은 작품은 일견 무질서한 행동처럼 보여도 거기에 그만한 이유가 따르는 인간 심리의 맹점을 파고든 일종의 심리 트릭이 쓰였다. 물론 '비뚤어진 방', '검은 안개' 등 주어진 물리적인 단서들을 착실하게 분석해 정답에 이르는 트릭도 훌륭하다. 이외에도 암호 트릭이나, 몇 십 년전에 벌어진 살인사건의 진상을 설명만 듣고도 진실에 이르는 등 그야말로 트릭의 종합 선물세트다. 30년도 더 된 단편들이라 어느 정도 빛이 바랜 작품들도 없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아직도 대부분은 쓸만한데 개인적으로는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황금불상의 손에서 광고지를 뿌리다 권총으로 사살된 남자의 사건을 해결하는 '손바닥 위의 황금 가면'을 꼭 추천하고 싶다. 꽤 공감이 가는 인간 심리와 물적 증거가 착착 맞아떨어지는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와사카 쓰마오는 아무래도 마술사 출신의 작가라 사람을 속이는 테크닉은 물론 인간의 주의력의 한계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출중한 트릭의 비밀이 여기에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작가 자체가 유쾌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도 산뜻하고 귀여운 분위기가 흐른다. 살인사건을 저지른 범인도 별로 독이 느껴지지 않고, 우연히 사건에 관계된 아이이치로를 갈구는(?) 무서운 형사들도 뒤를 돌아서면 슬쩍 한쪽 눈을 찡긋 감고 윙크할 것 같은 애교가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시체가 발견된 어느 사건 현장에서 아이이치로는 코냑을 마시고 있었다. 얼큰히 취해 떡이 되어 있는데, 형사가 도착하자 아이이치로는 무람없이 술을 권한다. 그때가 추운 날씨였던지라 형사 왈, "어이쿠, 이거 감...아니 지금은 근무 중이라 곤란합니다." 이게 얼마나 귀여워.
 

 
또 이런 장면도 있다. 아시다시피 2차대전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남아에 식민지가 많았다. 남방의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일본에서 파견한 군대와 미국의 해군이 수 차례 격전을 치룬 바 있고, 당시에 낙오된 일본 병사가 항복한지도 모르고 몇 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발견된 사례도 종종 해외토픽에 나온다. 당시 참전해 겨우 살아 돌아온 옛 군인. 그는 동료 병사들의 유골을 거두는 '유골 조사단'에 합류하여 남방으로 가는 배를 타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젊은 남자(아이이치로)가 주변의 일행들에게 자꾸 '뼈, 뼈' 운운하는 것이 아닌가. 옛 군인은 분노한다. 저런 되먹지 못한 놈, 우리는 생사를 걸고 싸웠건만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는 세대가 저렇게 예의없이 전우의 유골을 뼈라 칭하다니. 옛 군인은 아이이치로에게 항의한다. "쓸데없는 참견일지는 몰라도 '뼈'라는 말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일본어에는 '유골'이라는 말이 분명히 있는데요." 뜻밖에 아이이치로는 선선히 잘못을 인정하고 주변 일행들에게로 돌아가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말이죠, 선생님. 그 브라키오사우루스의 유골 말씀인데, 톨레미 원정대가 발견한 건 어느 부분의 유골이었습니까?" 선생님이 답한다. "음, 톨레미 원정대의 발표로는 그 뼈...유골은 제8경골이네만." 아이이치로 일행은 '유골 조사단'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검은 안개'라는 단편에서는 서로에게 분노한 상가 사람들이 누구는 두부를, 다른이는 케이크를 던지며 뿔난 어린이들처럼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처럼 어딘지 상쾌하고 즐거운 기운이 감도는 이야기 속에서 펼쳐지는 놀랄 만한 트릭의 향연. 이쯤되면 권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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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10-07-13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뭐;; 사지 않을 도리가 없군요. ㅎㅎ

BRINY 2010-07-14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깃하네요.

보석 2010-07-14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 보관함에 어제 담은 건 어떻게 아시고 이렇게 뽐뿌질을..제다이님 나빠요!

무해한모리군 2010-07-14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담아놓고 이번달엔 책을 더사면 안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는 중인데 이러시면 안되요 --;;

jedai2000 2010-07-15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itty님...ㅎㅎㅎㅎ 사셔도 아마 큰 후회 안 하실 것 같아요^^;;

BRINY님...세월이 좀 지난 책이라 어떻게 보실지는 모르겠는데, 옛날 느낌의 산뜻한 추리소설 좋아하시면 대만족하지 않으실까 싶네요^^

보석님...당장 보관함에서 장바구니로 옮기시기 바라요ㅎㅎ

고고씽휘모리님...흑흑, 저도 이미 7월달 구매를 끝낸 상태인데, 데니스 루헤인의 <운명의 날> 때문에 고민이예요. 지금 사야 사인본 받는데...그렇다고 또 살 수도 없고.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말 힘들어요ㅠ.ㅠ
 
뉴욕을 털어라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이원열 옮김 / 시작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뉴욕을 털어라>는 미국 추리소설계가 자랑하는 거장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도트문더 시리즈' 제1작입니다. 그는 지난 2008년 12월 31일 75세의 연세에 멕시코에서 휴가 중에 눈을 감았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2009년에 처음 떠오르는 해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1960년부터 작가 생활을 시작해 무려 95편의 작품을 남긴 웨스트레이크는 손 꼽히는 다작가였죠. 한 작품, 한 작품에 몇 년간 공을 들인다기 보다 타고난 아이디어의 샘과 천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슥슥 가볍게 써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비할 데 없이 많은 작품량과 후배 작가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거성의 위치에 오른 행복한 작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4권이나 되는 이야기가 이어진 범죄소설의 고전 '파커 시리즈'가 그의 대표작으로 1999년에 멜 깁슨이 주연한 영화 <페이백>은 파커 시리즈의 첫 작품(1962년 출간)을 스크린으로 옮긴 거예요. 국내에도 <인간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있는데, 걸인의 돈까지 양심의 가책없이 슈킹(?)치는 진짜 악당 파커가 자신을 배신한 친구와 애인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는 내용이랍니다. 갱스터가 등장하는 미국 소설을 보면 실제 범죄자에 불과한 그들이 어느 정도 미화되고, 그들의 범죄 행위도 이런저런 이유로 정당화되는 경우가 많지만, 파커는 철저하게 자신의 이득과 복수만을 위해 움직이는 인간 늑대니 출간 당시에 꽤 화제가 되었을 것 같네요.            


파커 시리즈로 새로운 유형의 장르와 캐릭터를 만든 웨스트레이크가 새로이 도전한 시리즈가 바로 도트문더 시리즈입니다. 1970년 이 작품 <뉴욕을 털어라>에 첫 등장한 전문 도둑 도트문더가 매 작품마다 불가능한 도둑질에 도전하며 대소동을 벌이는 이 시리즈도 전부 14권이나 되니, 파커와 더불어 작가가 가장 사랑했던 캐릭터에는 틀림이 없는 듯합니다. 2004년부터는 파커와 도트문더를 매년 한 권씩 번갈아 가면서 썼는데, 2009년에 출간된 유작이 도트문더니 작가와 함께 50년을 살아 숨 쉰, 아마도 문학을 넘어 미국 대중문화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친 캐릭터들이 아닐까 싶네요. <뉴욕을 털어라>의 원제는 <Hot Rock>. 이 작품에서 도트문더는 가상의 아프리카 작은 왕국을 상징하는 에메랄드를 털고자 혼신의 힘을 다하는데, 그래서 제목에 Rock(돌)이 들어갔나 봅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도트문더는 원래 파커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구상하다가 뜻밖에 분위기가 너무 코믹해지자 이건 무자비한 파커에는 어울리지 않아!, 하고 접어둔 걸 나중에 아예 새로운 인물(도트문더)을 등장시켜서 만들어보자!, 하며 쓴 것이라고 하네요.


영화 <토머스 크라운 어페어>나 <오션스11> 같이 몇 명의 전문 도둑들이 모여 계획을 짜고 온갖 역경을 딛고 마침내 도적질에 성공하는 장르를 케이퍼(Caper)라고 부른답니다. 이 장르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도널드 웨스트레이크는 도트문더 시리즈를 특히 웃음이 넘실대는 코믹 케이퍼로 만들었어요. 천재적인 작전가 도트문더만 비교적 정상이라 할 수 있고, 그의 절친한 친구 켈프는 나사가 조금 빠진 인물이죠. 운전담당 스탠 머시는 마마보이 기질이 있는 속도광, 자물쇠 담당 체프윅은 기차 오타쿠, 장비 담당 그린우드는 경찰이 몰려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여자를 꼬득이는 구제불능의 바람둥이입니다. 각자 맡은 일에서는 걸출한 능력을 자랑하지만 뭔가 사랑스럽게 맛이 간 이들이 벌이는 에메랄드 강탈 계획은 성공했다 싶으면 어긋나고, 이번에야말로 하면 역시나, 하면서 무려 여섯 번이나 계속됩니다. 똑같은 보석을 여섯 번이나 털어야 하는 이들의 기구한 사연은 정말 웃음 없이는 볼 수 없죠. 인간의 행동이라는 게 비록 도둑질 같은 범죄라도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인 모양입니다. 냉혈한 파커와 헐렁한 도트문더는 어쩌면 도널드 웨스트레이크가 바라본 범죄의 양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뉴욕을 털어라>는 320페이지의 짧은 분량에 반 이상이 유머 넘치는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혹시 보석을 빼돌린 게 아닌가 하고 도트문더가 체프윅을 의심하자, 그는 자기가 비록 이런 일을 해도 신용 하나는 확실한 사람이라며 큰 상처를 받습니다. 그가 하는 '일'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도둑질이죠^^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명대사. 켈프가 밉살맞은 변호사(도트문더 일당을 배신한 전력이 있죠) 프로스커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프로스커의 약속과 10센트가 있으면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죠. 하지만 그냥 10센트만으로 사 먹는 커피 맛이 더 좋아요." 여기서 한밤에 떼굴떼굴 굴렀습니다. 아주 사실적인 케이퍼물은 아니고, 요즘 작품들 같이 특수한 장비가 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타고난 이야기꾼만이 펼칠 수 있는 탁월한 '구라'와 '썰'이 있죠. 이런저런 배경지식을 한 무더기 펼쳐놓으면 소설이 되는 줄 아는 요즘 대중작가들에게 꼭 권하고 싶네요. 제 생각에 소설의 본질은 거짓말이고, 또 이야기라는 것을 충분히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요즘 대중소설 작가들의 죄악 중 하나인 한없이 늘어지는 분량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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