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변호사 - 붉은 집 살인사건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1
도진기 지음 / 들녘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붉은집 살인사건>은 현직 판사가 쓴 추리소설이라는 점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제1작이다. 판사라면 무척 바쁜 직업일 텐데, 언제 그렇게 집필할 시간이 있었는지 2권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도 함께 나왔다. 개인적으로 작품을 읽기 전에 우려보다는 기대를 조금 더 품고 있었는데, 판사라는 직업 자체가 범죄와 깊이 맞닿은 분야라 그만큼 리얼리티가 뛰어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얼마전에 우연히 읽은 <선택>이라는 이 작가의 단편도 꽤 좋았다(<계간 미스터리> 2010. 여름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미권의 경우,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한 존 그리셤이나 스콧 터로우, 윌리엄 랜데이 등 법조인 출신 작가들이 많은 활약을 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알기로 도진기 씨가 처음인 것 같다. 편견인지도 모르겠지만, 특정한 직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그 분야를 다룬 가장 정교한 소설을 쓸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한다. 전혀 관계없는 작가들이 취재나 자료조사를 통해 2차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그 일을 하며 그 분야에서 통용되는 용어들을 매일같이 툭툭 쓰는 사람들이 분명 유리한 점이 있을 테니까. 그런 점에서 현직 판사의 추리소설 집필은 분명 환영받을 일이다. 여세를 몰아 앞으로는 현직 외과의사의 메디컬 스릴러, 현직 야구선수의 야구장 미스터리 등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둠의 변호사'라는 타이틀에서 당연히 법정 스릴러식의 전개를 예상했는데 뜻밖에 정통 본격 미스터리였고, 왠지 반 다인의 고전 <그린 살인사건>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는 언덕 위의 저택 '붉은집'과 그곳에 사는 기묘한 관계로 맺어진 두 가족, 그리고 3대에 걸쳐 벌어지는 살인사건. 암에 걸린 부잣집 노인의 유언장이 공개되면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영락없는 크리스티, 퀸, 반 다인의 세계다. 다시 말해 본격 추리소설 팬들에겐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반갑고 익숙한 설정이라는 얘기. 탐정 역의 인물은 '어둠의 변호사' 고진으로 판사 출신이지만 유별난 호기심의 소유자라 법정에 절대 서지 않는 변호사로 일하며 흥미가 당기는 사건만을 맡고 있다. 한편 본격 미스터리의 필수 요소인 '왓슨' 역은 강남서 형사반장 유현이다. 유현이라는 이름보다는 '감래'가 괜찮지 않았을까. 농담이다...아무튼 그는 경찰이라는 신분을 활용하여 고진에게 각종 수사 정보를 물어다주며 아울러 고진의 추리를 기꺼이 들어주는 역할도 한다. 어느 날, 고진은 60대의 여인에게서 의뢰를 부탁하는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부호인 오빠가 자신에게는 한 푼의 재산도 주지 않고, 딸에게만 전재산을 남긴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자기도 한 몫 받고 싶다는 내용이다. 그녀에게 조언을 해주기 위해 '붉은집'에 방문한 고진은 상속자인 딸의 엄청난 미모에 충격을 받는다. 더구나 그 초절정 미소녀는 눈이 멀기까지 했는데...


본격 추리소설의 세계에서 시력을 잃은 병약한 미소녀가 상속녀가 되는 순간, 그녀는 이미 죽어 있는 거나 다름없다. 과연 미소녀는 부산 달맞이고개 별장에서 실족사로 죽는다. 그녀의 남다른 미모에 반해 있었던 고진은 충격을 받고 이 사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결심을 한다. 고진이 조사를 계속할수록 속속 드러나는 과거의 비밀들, 그리고 연속해서 벌어지는 살인. 경악할 만한 사건의 진상을 당신도 추리해보시라... 간단히 말해 두 건의 알리바이 트릭과 한 건의 밀실 트릭이 핵심인 작품이다. 단서는 비교적 공정하게 제시되는 편이며, 밀실 트릭은 저택의 평면도까지 제공되는 등 순도 100퍼센트의 본격. 세 개의 트릭은 전부 간단한 방법이지만 예외없이 독자의 허를 찌르는 통렬함이 있다. 특히 밀실 트릭에 감탄했는데, 이 정도 수준의 트릭이라면 시마다 소지나 아야쓰지 유키토 같은 일본의 유명한 트릭 제조기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지 않을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리나라의 추리소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니 뭣도 모르면서 무식한 소리한다, 라는 불평을 들을 각오를 하고 하는 말인데 트릭만으로 한정한다면 그간 국내에서 이만한 추리소설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추리소설에서도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는 느낌을 받고 싶은 분에게 감히 일독을 권하고 싶다.


물론 도진기 작가의 처녀 장편이니만큼 장점만 있지는 않다. 무엇보다 문장력이 조금 아쉽다(누구의 문장을 지적할 처지는 아니지만). 예컨대 인물 간의 대화는 재앙에 가까워 대사만 놓고보면 60대 노파와 20대 여성의 차이점을 구별할 수 없을 지경이다. 심하게 말해 모든 인물의 대사를 각각 남성형, 여성형으로 나눈 다음 어미만 바꾼 수준이랄까. 이제 데뷔한 작가에게 내가 너무 높은 기준을 제시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을 보면 각 인물의 대사 몇 마디에서 고집센 노처녀, 완고한 군인, 수줍음 많은 총각, 콧대 높은 아가씨 등 그 인물의 성격이 손에 잡힐 듯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이 작가에게는 그런 테크닉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다. 위에서 유독 반 다인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는 것도 그래서 한 말이다. 골수 추리소설 팬들을 제외하고는 오늘날 오직 사건 현장의 조사와 논리, 추리에만 집중했던 반 다인 추리소설의 생명력은 다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주고받는 대화의 맛이 살아 있고 인물들의 성격이 매력적이고 선명하며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세계의 분위기를 작품 속에 깨알같이 녹여냈던 크리스티 추리소설은 여전히 그 빛을 발하고 있다. 도진기 작가가 이 점을 명심하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몇몇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점도 걸렸다. 냉철해 보이는 고진이 단지 미소녀에 대한 연정으로 사건에 그토록 몰두하는 것은 그리 공감이 가지 않고, 진범으로 제시되는 인물은 살의를 품게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본인의 성격에 걸맞는 행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치밀한 성격과 지성으로 대표되는 범인이 딱 한 가지 행동만 했어도 그는 아마 살인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는 건 추리소설 팬의 인지상정이 아닐까 싶다. 준수한 데뷔작을 발표했지만 다음 작품들에서 조금만 더, 가 멋지게 충족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p.s/ '어둠의 변호사'라는 설정이 꽤 멋지게 느껴졌는데, 실제로는 작품 속에서 별로 활용되지 못하는 것 같다. 파일로 밴스처럼 법의 힘으로 제대로 된 처벌을 하지 못하는 범인을 직접 단죄하는 듯한 설정이 결말에 나와 아, 이래서 '어둠의 변호사'구나 하며 상당히 만족했었다. 그런데 역시나 현역 판사라는 신분이 맘에 걸렸을까. 아무래도 사적인 정의의 실천을 옹호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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