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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부크 부인의 초상 ㅣ 샘터 외국소설선 4
제프리 포드 지음, 박슬라 옮김 / 샘터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은 이미 <유리 속의 소녀>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첫 선을 보인 제프리 포드의 작품입니다. <유리 속의 소녀>가 상당히 평이 좋아 책을 구해놨지만 아직 읽지는 못했는데, 어쩌다 보니 나중에 나온 이 작품을 먼저 읽게 되었네요. 순서야 어찌 됐든 제프리 포드의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당장 <유리 속의 소녀>도 읽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책도 찾아놨구요. 그만큼 매력 넘치고 재미있는, 한마디로 글 잘 쓰는 작가라는 결론입니다.
배경은 1800년대 후반의 미국입니다. 한때 빛나는 재능으로 다양한 주제의 실험적인 그림을 그렸던 피암보라는 화가가 주인공이고요. 현재 피암보는 부유한 계층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많은 돈을 벌고 있습니다. 사진이 발명되면서 이제 초상화의 수요가 떨어지리라는 관측도 있었지만 사진은 커다란 비용이 들지 않아 개나 소나(?) 다 찍을 수 있지요. 때문에 자신들의 우월성을 자랑하고 싶은 특권층들은 여전히 사진 대신 초상화를 원합니다. 그러니 피암보의 사업은 계속 번창일로에 놓여 있는 것이죠.
허나 피암보는 늘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지향했던 예술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던 어느 날 피암보는 샤르부크 부인으로부터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습니다. 고객 면담을 위해 부인의 집을 방문하지만 그녀는 병풍 뒤에 모습을 숨기고 목소리만 들려줄 따름입니다. 그리고 샤르부크 부인은 뜻밖의 제안을 해요. 절대로 나를 보지 말고, 내가 들려주는 과거의 이야기만 듣고서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제안이 바로 그것입니다.
초상화라는 그림의 성격 자체가 모델의 특성을 낱낱이 화폭에 재현하는 것인데, 얼굴을 보지 않고 그리라니요. 여기서 피암보가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가보슈. 난 그렇게는 못 그리우." 했다면 이 이야기는 허무하게 끝났겠지요. 하지만 당연히 그렇게 전개되지는 않으니 안심하기 바랍니다. 부인은 본인이 만족할 만한 초상화가 나오면 거액을 주기로 약조했습니다. 피암보는 결심해요. 어려운 도전이지만 이 그림을 잘 끝내 목돈을 바짝 땡겨서 앞으로는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만 그리자고.
피암보는 병풍 뒤의 샤르부크 부인으로부터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이야기에서 떠오르는 부인의 이미지를 온전히 상상력만으로 구체화할 작정인 것입니다. 하지만 부인의 이야기는 피암보가 전혀 생각도 못했던 기상천외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예컨대, 그녀의 아버지는 예언과 점술을 숭배하는 재벌에게 고용되어, 눈(雪)의 결정을 보고서 미래를 점치는 점술가예요. 여담이지만 재벌의 또 다른 고용인은 사람들의 배설물 모양을 보고 앞날을 예측합니다(물론 그분도 책에 등장합니다).
부인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도와 눈을 채취하고 그 표본을 만드는 일을 했는데, 자연계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아연실색하고 맙니다. 이 세상의 모든 눈은 마치 사람의 지문처럼 완벽히 동일한 모양이 나올 수가 없다고 해요. 하지만 부녀가 우연히 채취한 눈 결정 두 개는 형태가 완전히 똑같습니다. 부인의 아버지는 동일한 결정 두 개를 '쌍둥이'라 부르며 딸이 차고 있는 목걸이 안에 넣어줍니다. 신기한 일은 이것만이 아니었으니, 샤르부크 부인이 쌍둥이를 손에 넣은 순간부터 그녀에게 미래를 환시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피암보는 이 여자가 누구 앞에서 약을 팔아, 하며 절대로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아요. 부인이 제대로 미쳤거나, 얼치기 소설 지망생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속속 드러나는 증거들은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뒷받침해줍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피암보 앞에 두 눈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여자들이 자꾸 나타나는 것입니다. 샤르부크 부인을 만나고 나서 피암보의 익숙하고 편안한 세계는 점점 붕괴됩니다. 그는 혼돈에 빠져 허우적대지만 그림쟁이의 숙명에 따라 초상화를 그리는 데 열중합니다. 예술혼만큼은 어떤 경우에도 타올라야 하는 것이니까요.
이상이 앞부분의 줄거리인데, 신비스럽고 불가해한 일들이 연속되어 읽는 이를 아주 홀려버립니다. 진부한 말이지만 한 번 잡으면 절대로 놓을 수 없는 책이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이예요. 무엇보다 다채로운 소설들의 맛을 한껏 즐길 수 있지요. 눈의 결정을 보고 미래를 점친다거나 하는 초현실적인 설정들과 고대의 유물 등이 나오는 장면들에서는 빼어난 판타지 소설의 환상성을 흠뻑 즐길 수 있습니다. 실감나게 재현한 1800년대 후반의 미국 풍경이나 당시 예술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영락없는 역사소설이구요. 예술가로서 피암보의 방황과 고뇌, 그리고 진정한 자신의 예술을 찾아가는 과정은 일종의 예술소설로 봐도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샤르부크 부인의 정체나 눈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여인들의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은 그대로 한 편의 추리소설입니다. 모든 의문은 남김없이 풀리고, 그 의문에 대한 설명들은 추리소설의 논리에 확실하게 부합합니다(일부 초현실적인 설정들은 예외입니다). 다만 추리소설로서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최후에 밝혀지는 몇몇 비밀이 어느 정도 진부한 감은 있죠. 하지만 이 작품은 오직 추리소설로만 한정되는 작품은 아니기에 큰 결점은 되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서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왜 같은 얘기를 해도 더 재미있고 실감나게 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아무리 들어도 뻥인 것 같지만 그래도 한 번 믿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사람도 있고요.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천생 이야기꾼이 아닐까 합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능력은 아마 타고나는 것이겠지요. 제가 본 제프리 포드도 타고난 이야기꾼입니다. 기품 있는 문장력은 물론이고, 질릴 만하면 적당히 큰 사건을 펼쳐 독자의 시선을 붙잡아두는 감각, 성실한 자료조사와 발군의 아이디어까지 모든 면이 탁월합니다. 이런 작가가 하는 이야기는 아무리 뻔해 보여도 외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막상 한 번 들어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죠.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에도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보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