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이이치로의 낭패 아 아이이치로 시리즈
아와사카 쓰마오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한마디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걸작 미스터리 단편집. 일본에서 1978년에 출간된 단편집이라 왜 이제야 왔어, 하고 대체로 황홀한, 그러나 조금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책을 몇 번 쓰다듬고 나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스 조각을 연상시키는 미남 탐정 '아 아이이치로'가 8개의 독특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들이 수록된 이 단편집은 몇 번이고 꺼내 읽고 싶어질 정도로 위트 있고 기발한 플롯과 트릭들로 가득하다. 뜬구름이나 곤충 등 별 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만 촬영하는 카메라맨 아이이치로는 촬영 현장에서 늘 우연히 사건과 맞닥뜨리는데, 워낙에 꽃미남인지라 사건에 관계된 여자들은 그를 보고 항상 얼굴을 붉힌다. 하지만 이내 여자들이 헛웃음을 짓고 마는 것은 아이이치로의 굼뜬 행동과 둔한 운동신경, 그리고 말더듬이 때문. 세상은 역시 공평해, 저렇게 잘 생긴 사람이 이토록 헐렁할 줄이야 하고 비웃는 순간, 아이이치로의 날카로운 추리력이 빛을 발한다. 물론 명추리를 선보이는 상황에서도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덜덜 떨며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그 효과가 반감되지만...

 
조각 미남에 얼빠진 행동, 그러나 비범한 추리력이 한데 뭉친 이 사랑스러운  탐정은 아 아이이치로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작가 아와사카 쓰마오가 혹시 나중에 '일본탐정 인명사전'이라도 발간되면 제일 먼저 등장하게끔 하려고 일부러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일본어의 50음도는 '아이오에우' 순이기 때문에 이름과 성이 둘다 '아'로 시작하는 이 탐정이 첫 타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만약 '일본탐정 인명사전'이 한국에서 번역되어 나온다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교이치로'가 처음이 될 것이다. 우리 말은 '가나다라' 순이니까^^ 

 
아이이치로도 그렇지만, 네이밍 센스에서도 볼 수 있듯 작가 아와사카 쓰마오도 걸물이다. 기발한 장난감과 마술을 좋아해서 실제로 마술사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자기 이름을 딴 마술상도 있단다. 1970년대 일본 추리소설계의 풍경을 엿볼 수 있어 무척 흥미진진한 해설을 보면, 특히 바에서 호스티스들에게 마술을 선보여 인기만점이었다고 하니 만나면 언제나 유쾌하고 즐거운 술친구 같은 작가였던 모양이다. 나오키상,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같이 받을 만한 상도 다 받고 잘 나가던 분인데, 2009년초에 별세했다고. 한국어판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가 표지부터 책의 모든 부분에서 만듦새가 출중해 한국어판을 보고 아이같이 좋아했을 장면이 상상되는데, 조금 늦은 한국어판 출간이 영 아쉽다.

 
아와사카 쓰마오의 별명은 '일본의 G. K 체스터튼'이다. 과연 '브라운 신부' 시리즈로 추리소설 역사에 찬란히 남은 명단편들을 선보인 체스터튼과 유사한 작풍이 보이는데, 인간의 행동 뒤에 감춰진 심리에 기반을 둔 추리나 기발한 착상의 트릭, 탐정 캐릭터의 유사상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브라운 신부 역시 아이이치로처럼 총기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얼빠진 행동만 보고 무시하면 큰코다치는 추리력의 소유자다. 둘다 항상 박쥐우산을 들고 다니고, 자주 잃어버리는 것도 비슷. 다만 유일하게 다른 건 외모도 둔중한 브라운 신부와 달리, 아이이치로는 꽃미남이라는 것뿐이다.


 
체스터튼의 단편들처럼 'DL 2호기 사건'과 'G선상의 족제비' 같은 작품은 일견 무질서한 행동처럼 보여도 거기에 그만한 이유가 따르는 인간 심리의 맹점을 파고든 일종의 심리 트릭이 쓰였다. 물론 '비뚤어진 방', '검은 안개' 등 주어진 물리적인 단서들을 착실하게 분석해 정답에 이르는 트릭도 훌륭하다. 이외에도 암호 트릭이나, 몇 십 년전에 벌어진 살인사건의 진상을 설명만 듣고도 진실에 이르는 등 그야말로 트릭의 종합 선물세트다. 30년도 더 된 단편들이라 어느 정도 빛이 바랜 작품들도 없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아직도 대부분은 쓸만한데 개인적으로는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황금불상의 손에서 광고지를 뿌리다 권총으로 사살된 남자의 사건을 해결하는 '손바닥 위의 황금 가면'을 꼭 추천하고 싶다. 꽤 공감이 가는 인간 심리와 물적 증거가 착착 맞아떨어지는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와사카 쓰마오는 아무래도 마술사 출신의 작가라 사람을 속이는 테크닉은 물론 인간의 주의력의 한계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출중한 트릭의 비밀이 여기에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작가 자체가 유쾌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도 산뜻하고 귀여운 분위기가 흐른다. 살인사건을 저지른 범인도 별로 독이 느껴지지 않고, 우연히 사건에 관계된 아이이치로를 갈구는(?) 무서운 형사들도 뒤를 돌아서면 슬쩍 한쪽 눈을 찡긋 감고 윙크할 것 같은 애교가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시체가 발견된 어느 사건 현장에서 아이이치로는 코냑을 마시고 있었다. 얼큰히 취해 떡이 되어 있는데, 형사가 도착하자 아이이치로는 무람없이 술을 권한다. 그때가 추운 날씨였던지라 형사 왈, "어이쿠, 이거 감...아니 지금은 근무 중이라 곤란합니다." 이게 얼마나 귀여워.
 

 
또 이런 장면도 있다. 아시다시피 2차대전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남아에 식민지가 많았다. 남방의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일본에서 파견한 군대와 미국의 해군이 수 차례 격전을 치룬 바 있고, 당시에 낙오된 일본 병사가 항복한지도 모르고 몇 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발견된 사례도 종종 해외토픽에 나온다. 당시 참전해 겨우 살아 돌아온 옛 군인. 그는 동료 병사들의 유골을 거두는 '유골 조사단'에 합류하여 남방으로 가는 배를 타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젊은 남자(아이이치로)가 주변의 일행들에게 자꾸 '뼈, 뼈' 운운하는 것이 아닌가. 옛 군인은 분노한다. 저런 되먹지 못한 놈, 우리는 생사를 걸고 싸웠건만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는 세대가 저렇게 예의없이 전우의 유골을 뼈라 칭하다니. 옛 군인은 아이이치로에게 항의한다. "쓸데없는 참견일지는 몰라도 '뼈'라는 말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일본어에는 '유골'이라는 말이 분명히 있는데요." 뜻밖에 아이이치로는 선선히 잘못을 인정하고 주변 일행들에게로 돌아가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말이죠, 선생님. 그 브라키오사우루스의 유골 말씀인데, 톨레미 원정대가 발견한 건 어느 부분의 유골이었습니까?" 선생님이 답한다. "음, 톨레미 원정대의 발표로는 그 뼈...유골은 제8경골이네만." 아이이치로 일행은 '유골 조사단'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검은 안개'라는 단편에서는 서로에게 분노한 상가 사람들이 누구는 두부를, 다른이는 케이크를 던지며 뿔난 어린이들처럼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처럼 어딘지 상쾌하고 즐거운 기운이 감도는 이야기 속에서 펼쳐지는 놀랄 만한 트릭의 향연. 이쯤되면 권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Kitty 2010-07-13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뭐;; 사지 않을 도리가 없군요. ㅎㅎ

BRINY 2010-07-14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깃하네요.

보석 2010-07-14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 보관함에 어제 담은 건 어떻게 아시고 이렇게 뽐뿌질을..제다이님 나빠요!

무해한모리군 2010-07-14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담아놓고 이번달엔 책을 더사면 안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는 중인데 이러시면 안되요 --;;

jedai2000 2010-07-15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itty님...ㅎㅎㅎㅎ 사셔도 아마 큰 후회 안 하실 것 같아요^^;;

BRINY님...세월이 좀 지난 책이라 어떻게 보실지는 모르겠는데, 옛날 느낌의 산뜻한 추리소설 좋아하시면 대만족하지 않으실까 싶네요^^

보석님...당장 보관함에서 장바구니로 옮기시기 바라요ㅎㅎ

고고씽휘모리님...흑흑, 저도 이미 7월달 구매를 끝낸 상태인데, 데니스 루헤인의 <운명의 날> 때문에 고민이예요. 지금 사야 사인본 받는데...그렇다고 또 살 수도 없고.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말 힘들어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