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추리소설 열풍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미 1984년에 350종 출간을 돌파하여 1일 1권 시대를 열었고, 2000년대는 대략 연평균 450종 정도의 추리소설이 나온다고 하니, 가히 추리소설의 '왕국'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렇다면 현재 이 추리소설 왕국을 지배하는 왕은 누구일까? 인기와 실력을 두루 갖춘 후보가 여럿이겠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야말로 최강자가 아닐까 싶다. 1985년 <방과후>로 신인상에 해당하는 에도가와 란포상을 받고 데뷔한 그는 25년 가까운 작가 생활 동안 70편에 달하는 많은 작품을 써냈으며, 1999년 <비밀>로 추리작가협회상, 2006년 <용의자 X의 헌신>으로 나오키상을 수상하며 평단에서도 인정을 받았고, <변신> <게임의 이름은 유괴> <호숫가 살인사건> 등 영화화된 작품이 11편, <유성의 인연> <백야행> 등 드라마로 만들어진 작품이 무려 20편일 정도로 베스트셀러 제조기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대 장점은 뭐니뭐니 해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토리텔러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의 머리를 꾹 누르면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툭 튀어나오지 싶은데, 말이 70편이지 아무리 소설가라도 그 정도 양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게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더군다나 그가 창조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대충 막 지어낸 것도 아니다. 일단 집필의 기본이 되는 발상이나 소재를 뽑아내는 능력부터가 탁월하다. 빙의나 시간여행 같은 초현실적인 것에서 노인문제나 청소년범죄 등 당대 일본 사회의 첨예한 이슈까지 한마디로 자유자재. 이렇게 독자의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할 만한 소재를 고른 다음, 특유의 현란한 전개와 견고한 구조, 공들인 트릭과 반전으로 책을 다 읽은 독자의 입에서 '졌다' 소리가 절로 나오게 만든다. 신본격 작가들의 '언플'로 인해 어느새 트릭의 대명사가 신본격이 됐지만 개인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트릭이 그들에 비해 빠지는 구석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무엇보다 대다수의 신본격 작가들이 아이디어와 창작력이 절정에 달하는 젊은 시절 잠깐 반짝이고 마는 경우가 많았다면, 게이고는 장년에 이른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완성도 높은 플롯과 트릭을 쏟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넘사벽'이라는 것이다.
물론 게이고의 단점도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문장이 평이하고 묘사가 없다. 이는 타고난 글솜씨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가 한 문장, 한 문장 힘을 줘서 썼다면 지금처럼 많은 작품을 내지는 못했을 듯하다. 예를 들어 그가 묘사하는 파티 장면이 있다고 하자. 다른 작가들 같으면 파티장 내부나 집기의 배치, 참석자들이 입은 옷과 나온 음식을 꼼꼼히 그릴 터. 하지만 게이고는 이런 식이다. "야마다 나오코는 호화찬란한 파티장에 들어섰다. 다른 참석자들이 입은 화려한 드레스와 자신의 초라한 옷이 비교되는 것 같아 괜시리 얼굴이 붉어졌다." 요즘 유행하는 드레스의 경향이나 디자인의 전반적인 흐름 등을 취재하는 데는 시간이 든다. 게이고는 플롯의 핵심도 아닌 걸 취재할 바에야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이야기를 쓰자는 주의인 것이다. 이건 아마도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펑펑 샘솟는 사람만의 어쩔 수 없는 고충(?)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게이고가 1년을 넘게 투자하여 에도시대 배경의 추리소설을 쓴다거나 하는 건 기대하지 말도록 하자. 이공계 출신인 자기가 잘 아는 과학이나 취미인 스포츠 등의 소재만으로도 그럴싸한 이야기를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데 굳이 우리도 하기 싫은 공부를 작가한테까지 강요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작가도 자기의 단점을 모르지는 않는다는 거다. <명탐정의 규칙> 같은 책을 보면 자기도 문장력 없고 깊이 있는 성격 묘사 안 된다는 걸 자조적으로 고백하곤 한다. 나는 게이고의 이런 면모가 좋다. '나 글 못 쓰고 깊이 없어. 하지만 잘하는 분야에서는 그야말로 끝내주지. 굳이 단점이 아니라 장점을 봐주면 안 될까?' 아아, 호쾌하도다! 국내 출간된 작품 중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베스트를 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잘하는 분야에서 그가 얼마나 '끝내주는지' 알리고 싶어서다.
* 완벽하게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 국내에 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다 읽었습니다.
10위. 게임의 이름은 유괴
부자 아버지를 골탕먹이려는 철없는 아가씨와 주어진 모든 일을 게임처럼 처리하는 쿨한 남자 주인공이 손을 잡고 가짜 유괴극을 벌인다. 그러나 한탕에 완전히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찰나 뜻밖의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는데...휴대폰, 이메일, 디지털 카메라 같은 현대적인 문명의 이기를 총동원하고, 혼잡스러운 도심지의 특성을 교묘히 이용해 범죄를 성공시키는 등 세련되고 감각적인 느낌의 도시 추리소설이다. 특히 후반부에 연달아 터지는 반전의 반전의 반전은 읽는이를 혼절 직전까지 몰아갈 테니 안전벨트를 꼭 하시길. 빠른 템포에 엎치락뒤치락하는 전개가 전형적인 히가시노 게이고표라 그를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이야기 자체도 깔끔한데다 내용이 그리 어렵지 않으니 입문용으로는 딱이 아닐까. 유괴라는 범죄는 처음 목표 대상을 점찍고 납치하는 과정도 어렵지만 막상 유괴에 성공해도 인질을 감금하는 장소 구하는 게 문제다. 아무 곳이나 고르면 탈출할 염려도 있고, 옆집의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최고의 난제는 인질의 가족을 만나 돈을 받아내는 것. 돈을 받기 위해 필연적으로 한 번은 그들과 만나야 하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잠복한 경찰에게 걸릴 확률이 99.9퍼센트다. 이렇듯 쉽지 않은 유괴라는 범죄의 뒤엉킨 실타래를 산뜻하게 풀어낸 게이고의 역량에 박수를 보낸다.
9위. 졸업
게이고의 두 번째 작품이자 그의 분신과도 같은 가가 형사가 첫 선을 보인 기념할 만한 작품. 뛰어난 추리력 못지않게 인간적인 성품이 매력적인 가가 교이치로가 대학 졸업반인 단짝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파헤친다는 줄거리다. 나중에 가가는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민완 형사로 활약한다. 당시 게이고는 그때도 이미 추리소설 독자 사이에서 본 거 또 보고, 또 본 거 계속 보고, 라는 말을 들었던 암호나 다잉 메시지, 밀실 등의 고전적인 트릭을 발전시켜 현대에도 통용되는 훌륭한 추리소설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게이고의 말마따나 과연 <졸업>은 그의 초기 스타일인 학원물+물리 트릭의 공식을 아예 극한까지 밀어붙여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는 느낌마저 준다. 작품의 핵심 미스터리는 잠긴 문의 열쇠 트릭과 '설월화'라는 복잡한 일본 다도의 법칙을 이용한 독살 트릭 두 가지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첨단 신소재에 대한 지식에 어두운 사람이라면 맞출 길이 없는데다 좀 황당하다. 그러나 20장 가까운 설명 그림까지 동원하는 두 번째 독살 트릭은 숫제 기가 막힌다. 끝없이 계속되는 그림과 설명이 복잡하기 그지없어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하지만, 그만큼 독자를 속이고야 말겠다는 작가의 집념이 오롯해 추리소설가란 이렇게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구나 하고 묘한 부분에서 감탄하고 말았다.
8위. 비밀
교통사고로 아내는 죽고 딸만 간신히 살아남는다. 하지만 사고의 충격으로 딸의 영혼과 아내의 그것이 뒤바뀌어버리는데...몸은 딸이라도 마음이 아내의 것이라면 이 사람은 과연 내 아내일까, 딸일까? 남편은 분명히 아내와 같이 살지만 성관계를 할 수도 없다. 딸의 몸에 어찌 추악한 짓을 할 수 있겠는가. 판타지에 가까운 도발적인 설정에 중년 남자의 어쩔 수 없는 윤리적인 딜레마를 담아낸 게이고의 문제작. 빙의라는 초현실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곳곳에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미스터리 요소가 있어 추리소설로도 일급이다. 딸(=아내)은 성장하면서 다시 학교를 다니고 그곳에서 다른 학생의 프러포즈를 받는 등 이미 한 남자의 아내로 시들어버린 과거에 느껴보지 못했던 감동을 받는다. 하지만 서서히 늙어가기만 할 뿐인 남편은 아내의 변화를 막을 명분이 없다. 이런 남편의 절절함과 쓸쓸함의 정서가 깊이 배어 있어 페이지를 다 덮고도 우울한 느낌이 한참 지속되는 책이다. 가만 보면 게이고의 작품에는 언제나 그가 보는 일관적인 남녀상이 드러난다. 남자는 항상 신파에 가까울 정도의 순애를 보여주는 반면, 여자는 그런 남자를 받아주지 않는가 하면 앞뒤를 재거나, 심지어 이용하기까지 한다. 아무래도 작가는 젊었을 적에 간보는(?) 여자에게 된통 당해본 적이 있는 듯-_-;;
7위. 명탐정의 규칙
추리소설가로서 게이고의 자세를 폄하하는 글을 간혹 보는데, 그럴 때마다 솔직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적어도 추리소설가 게이고의 도전 정신이나 진지함만큼은 다른 모든 것들을 부정하더라도 인정해줘야 할 부분이다. 게이고는 데뷔 초기에는 고전적인 트릭의 현대적인 변용이나 깜짝 반전, 뜻밖의 범인 같은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장치들을 중시했다. 하지만 중기 이후로는 작풍의 변화를 이뤄, 범인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도 시선을 둠으로써 동기 면에서의 의외성도 충분히 이끌어내고 있다. 요컨대 게이고는 끊임없이 고뇌하는 추리소설가라는 거다. 현대의 추리소설이 어디까지 도달했나, 나는 어떤 추리소설을 써야 하는가, 지금까지도 성공스러운 경력을 이뤘지만 뭔가 새로운 걸 추구해야 하는 시점이 아닐까 등등. 이런 게이고의 고뇌의 산물이 바로 이 작품이 아닐까 싶다. <명탐정의 규칙>은 긴다이치 코스케를 연상시키는 명탐정 덴카이치 다이고로가 기존 추리소설들의 온갖 클리쉐 속에서 발버둥치는 일종의 패러디 단편집으로 밀실, 동요살인, 다잉 메시지 등 요란하지만 비현실적이고, 흥미롭지만 진부한 추리소설의 공식들을 갖고 놀며 완전히 산산조각을 내버린다. 동료 추리소설가는 물론 게이고 자신에게도 풍자와 비판의 칼끝을 들이대는 이 작품은 다소 가볍다는 약점이 있지만 기존의 것들을 해체하고, 새롭고 다른 것에 도전해보겠다는 작가의 결기가 느껴져 작가의 팬으로서 무척 좋아한다. 사실 닥치는 대로 망가뜨리는 식의 패러디는 웬만큼 글줄을 쓸 줄 알면 누구나 가능하다. 그러나 <명탐정의 규칙>은 작가가 언급하는 전형적인 추리소설 공식에 따라 나름 내적 완성도가 있는 단편 하나를 완성하고 그 안에서 비난을 하는 식이라 공히 한 수 위라 할 만하다.
6위.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믿고 보는 가가 형사 시리즈다. 위에 언급한 혁신가로서 게이고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하면 좋을 듯. 어느 여자 A의 독살 사건이 벌어진다. 용의자는 그녀를 버린 남자 애인B, 그리고 A의 절친한 친구이자 B와 바람이 난 C여인. 달리 동기와 기회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디까지나 범인은 남자B와 여자C 둘 중의 하나. 친구의 애인을 빼앗아가는 일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하니 비교적 현실감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이 무엇보다 새롭고 색다른 것은 사건을 수사하는 가가 형사의 모든 행적과 마음속 추리가 꼼꼼하게 그려지다 범인이 밝혀지기 직전에 모든 페이지가 끝나버린다는 것에 있다. 누가, 어떻게 죽였는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생각하기도 귀찮으니 그냥 범인을 빨리 알려주소, 하고 마는 게으른 추리 독자들에게 날리는 게이고 나름의 일침이랄까. 귀중한 단서를 숨기는 것도 없고, 반칙도 없다. 꼼꼼히 생각해보면 누구나 맞출 수 있는 것이다(하지만 게이고는 일급 추리소설가라 당연히 쉽지는 않다-_-;;). 이 책을 읽는 동안 모처럼 공책에 B와 C가 수상한 점을 낱낱이 적어보며 내가 가가 형사가 된 듯 추리하는 맛에 흠뻑 젖었다. 옛날 애거서 크리스티 책을 보면서 이랬었는데, 내가 너무 이 맛을 잊고 살았어, 하며 진심으로 흐뭇했다. 게이고가 독자에게 원한 것도 아마 이런 능동적인 자세가 아니었을까. 만약 답을 맞추지 못해도 해설에 힌트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하지만 해설도 몇 번 꼬아놓아서 당연히 쉽지는 않다-_-;;). 처음 나온 단행본은 지금보다 난이도가 쉬웠는데 해설이 없었고, 나중에 나온 문고본은 난이도를 높인 대신 해설을 추가했다고 한다. 국내에 출간된 책은 문고본 판으로 알고 있다.
<下>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