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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솔라의 한여름은 뜨겁다.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열기로 가득찬 이솔라의 중심가에 위치한 87관서 사무실에는 날씨 만큼이나 뜨거운 열기가 형사들 사이에서 떠돈다. 젊고 열정적인 버트 클링 형사가 포문을 열었다.

"오늘 신참이 온다면서요."

거대한 몸집이지만 웬지 날렵해 보이는 민완형사 스티브 카렐라가 답한다.

"그렇다는군. 경찰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던데."

 

"자,자..모두 주목. 신참이 왔어."

언제나 유쾌한 마이어 마이어 형사가 사무실 문을 열고 소리쳤다. 문 뒤에 서 있던 사내가 쭈볏쭈볏 들어온다. 사내의 얼굴을 본 87관서 형사들의 입이 모두 벌어졌다. 사내의 얼굴은 온통 부스럼 투성이에 눈은 끝간데없이 찢어졌고, 귀는 뭉그러져 있었다. 가장 심한 것은 눈썹으로 한오라기의 털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무모증에 걸린 듯 머리털도 전혀 없었다.

 

입이 걸은 카튼 호스 형사가 뇌까렸다.

"그 놈 참... 혐오스럽게도 생겼다. 완전 경찰 혐오자네..."

사내는 압도적인 용모와는 달리 붉어진 얼굴로 수줍게 입을 열었는데, 그 모습이 더욱 무서웠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들과 같이 일하게 될 칼 포터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외모와는 달리 칼 포터는 유능한 형사였다. 궃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성실한 성품에 잦은 야근에도 지친 모습 한 번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형사들이 싫어하는 업무인 대민 봉사 업무에도 열심이었는데, 특히 아이들을 좋아했다. 비번인 날도 손수 만든 샌드위치가 가득 든 바구니를 들고 고아원을 방문하곤 했다.

 

8월 말에는 빅 마마라고 불리는 흑인 여성이 운영하는 고아원을 찾았다. 그가 고아원 '빅 마마스 하우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이들이 우루루 모여 들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제1의 아이가 무섭다고 그랬다, 제2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랬다...제 13의 아이까지 무섭다고 그랬다. 결국 그날의 대민 봉사 행사는 실패로 끝났다.

 

9월 중순이지만 날씨는 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더워지는 것 같다. 순찰 업무를 마치고 경찰서로 귀환하는 스티브 카렐라는 문 앞에서 유도의 달인인 핼 윌리스 형사를 만났다. 핼이 유쾌하게 소리친다.

"여어~ 이제 들어오는거야."

"응."

"무지하게 더웠지?"

"그걸 말이라고 해. 새들도 더운지 이상하게 울더라니까."

"어떻게 우는데?"

"왱알왱알 울더라구."

"하하. 그럴리가 있나."

"그렇다니까 그러네."

"그건 그렇고 지금 누가 와 있는줄 알아?"

"오긴 누가 와?"

"애덤 샌들러가 잡혀 있어."

"그게 누군데?"

"자네, 영화 안 봐? <워터보이>에 나왔던 친구 있잖아. 그 바보 말이야."

"아니, 영화배우가 왜?"

"들어가 봐."

 

스티브 카렐라가 들어서자, 마이어 마이어 형사의 책상 앞에 애덤 샌들러가 앉아 있었다. 마이어는 당혹스러워하는 눈치다. 애덤 샌들러가 소리친다.

"아니, 나 몰라..<워터 보이> <빅 대디> 안 봤어? 헐리웃 최고의 코미디 배우인 나를 몰라? 이거 안되겠구만."

마이어가 답한다.

"아, 글쎄. 일단 불어보시라니까요."

"자기 그러다 옷 벗고 싶어. 빨리 풀어줘."

"이 사람, 안 되겠네. 계속 취조에 협조 안 하면 구속 시키겠습니다. 이름?"

"...애덤 샌들러."

"유명하신 분이 왜 음주 운전을 하신 겁니까?"

"파티가 있었다니까. 이솔라의 유명한 작가 부부가 주최한 파티에 참석했었어. 챈들러-모니카 빙 부부 말야."

"레이먼드 챈들러 빙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하여튼 주소는?"

"웨스트 코스트 팝 619"

"좋은 동네 사시네. 이제 음주량 측정해야 하니까 불어보세요."

"좋아. 내가 불긴 부는데, 네가 어떻게 될 지는 책임 못져."

 

애덤 샌들러의 체내 알콜량은 1.29%였다. 즉시 구속 감이었다. 애덤 샌들러의 구속이 결정되는 순간, 경찰서 문이 열리고 칼 포터가 들어왔다. 순간 애덤 샌들러의 눈이 반짝였다.

"이야! 내가 찾고 있던 그 얼굴이야. 요즘 찍고 있는 영화 <Lord of the Ear-Ring>에 딱이겠는걸. 

자네 영화배우 할 생각 없어?"

칼 포터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날이 밝자, 애덤 샌들러는 즉각 풀려났고 마이어 마이어 형사에게는 전출 명령이 떨어졌다. 형사와 헐리웃의 명사 사이에는 태평양 만큼의 신분 차이가 있었다. 감히 대든 것조차 멍청한 일이었다. 그러나 칼 포터가 애덤 샌들러 영화에 출연하기로 하면서, 마이어의 전출 명령은 취소됐다. 칼 포터가 애덤 샌들러에게 몹시 빌며 부탁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칼 포터가 출연했던 역할이 뭐야?"

카렐라가 핼에게 물었다.

"오크. 분장도 필요없었다는데."

"오크가 뭐야?"

"글쎄...영화 나오면 알게 되겠지..."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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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도 저물어간다.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날씨도 한결 쌀쌀해진 것 같고, 낙엽은 우수수 잘도 떨어진다. 매주 주말 집에만 있는 것도 싫증이 나 무작정 집을 나섰다. 사실 나는 늘 궁금하다. 다른 분들은 주말에 무엇을 하는지 말이다. 나만 이렇게 심심하고 할 게 없는 건지 다른 분들은 어떤지 알고 싶다.

 

막상 나와도 갈 곳이 없어 극장으로 갔다. 무슨 영화를 볼지 확실히 정하고 간 것도 아니라, 요즘 뭐가 재미있을까 살펴 봤다. <월레스와 그로밋:거대 토끼의 저주> <유령 신부><새드 무비>...차근차근 살펴 보는데, 굉장히 공포스런 제목의 영화가 있었다. 공포영화 제목 같으면서도 묘하게 심금을 울리는 제목을 가진 영화...<40살까지 못해본 남자> -_-;;;

 

주인공의 처지를 상상만 해도 공포스럽다. 이 영화를 보고 나도 주인공처럼 되면 안되겠다는 경각심을 가지려는 의도에서 봤다. 그저 그런 코미디였다. 아주 재미없지도, 있지도 않은...중년판 <아메리칸 파이>였다고나 할까. 한 마디로 비추다.

 

영화를 보고 서점에 들려서 책구경을 했다. 신돈 이야기를 그리는 월탄 박종화 선생의 <다정불심>을 사려 했는데, 없어서 그냥 왔다. 갖고 싶은 책은 너무 많은데 벌이가 시원찮아 답답하다. 언제쯤 돈 걱정 없이 마음껏 책을 살 수 있을까...

 

서점에서 나와 집에 가려는데 웬 남자가 나를 잡았다. 얼굴을 보니 덕이 있고, 어쩌고 하길래 바쁘다고 뿌리치자 오히려 강하게 나온다. 보아하니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 성인인 것 같은데, 길거리에서 사람이 말을 걸면 들어줘야지 왜 무시하냐 이거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이 상궤를 벗어난 답변에 오히려 죄책감이 드는 것이 아닌가... 백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 때부터 더욱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사주를 볼 줄 아는 자기같은 사람이, 지나가던 나에게 안좋은 기운이 보이길래 친절한 뜻에서 가르쳐 주려 하는데 왜 무시하냐 이거다. 너무 화를 내길래 진정시키느라 힘들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난 후 그 사람, 본연의 임무로 들어왔다. 내가 성공의 기운을 타고 났으나 마가 꼈다, 나 때문에 부모님이 아프시고, 여인과의 인연도 달성할 수 없으며, 친척 중에 자살하신 분도 나 때문에 했단다..내가 무슨 <오멘>이냐! 안되는 건 다 내 탓이란 말이냐! 

 

그러면서 자기와 5분만 이야기를 해보잔다. '됐거든'하고 그 인간에게서 벗어났다. 얘네들이 전략을 바꿨나 보다. 사람들이 무시하면 오히려 화를 내는 걸로, 순간 당황해서 사과하고 말을 들어주면 본색을 드러내는 식으로...아직도 이런 사람들이 있나 답답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 역에서 내려서 버스를 한 번 더 타야 한다. 그런데 집으로 가는 길, 인도에 온통 낙엽이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웬지 낙엽을 밟으며 집으로 걸어가고 싶었다. 약 30분쯤 걸어야 하는 짧지 않은 길이지만, 낙엽을 사박사박 밟으며 걷는 것이 운치가 그만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적없는 길을 홀로 걸었다. 그 얼마나 많은 시인,묵객들이 가을과 낙엽을 노래했는가...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이런 시도 있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처럼 쓸모없고, 처연한 느낌을 지닌 낙엽을 밟으며 한껏 늦가을의 정취에 빠져 걷고 있는데...어디선가 묘한 냄새가 났다. 금방 사라지겠지 했는데 계속 난다. 주위를 둘러보니 오른편에 철책 넘어로 거대한 건물이 있다. 표지판을 읽어보니 <하수처리장> 이다...-_-;;

 

일요일 밤에 무슨 처리할 하수가 그렇게 많다고...질식할 듯한 살인적인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 냄새는 마치 파리의 하녀, 프랑소와가 걸레빤 물 냄새+ 맨해튼 하수도 냄새+ 안동 김씨 종가 측간에 2백년 동안 쌓인 인분 냄새를 합한 듯한 냄새였다.

 

나는 미친 놈처럼 달리며 냄새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 냄새는 빚쟁이가 빚진 놈을 끈질기게 쫓아오듯 나를 추격했다. 미치는 줄 알았다. 나는 냄새를 털어내려 발버둥치며 미친 넘처럼 댄스를 추워댔다. One Man Tango...

 

간신히 위험 지역을 벗어났다. 집에 오자마자 샤워를 했지만 아직도 나는 듯 하다. 어느 늦은 가을 날의 외출은 최악이었다...T.T

 

 



  

 

 

 

 

 

 

 

 

   

 

 

 

 

<사진은 디씨 인사이드- 신돈 갤에서 퍼왔음. 본문 내용과는 1g도 상관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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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muko 2005-11-07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그들이 전략을 바꾼 모양이네요. 가을 낙엽 밟으며 영화 보러 가고 싶다며 울부짖는 요즘인데, 제다이님의 이 글을 읽어도 여전히 영화 보고 싶고, 낙엽 밟고 싶어요...

아영엄마 2005-11-07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도 제사를 지내야 조상님 덕을 본다... 이런 거 하는 사람들이 길에 버티고 있으시구먼요. 빠져 나오기 버거워...@@;

oldhand 2005-11-0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수필에서도 여전히 대단하신 필력입니다. ^_^

jedai2000 2005-11-08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무코님...하수 처리장은 우리 동네에만 있을 테니까 안심하시고 나가서 바람도 쐬시고, 낙엽도 밟으시고, 영화도 보세요..^^;;

아영엄마님...그 사람들은 제사 잘 지내서 조상님 덕 많이 봐서 길거리에서 그러구 섰나 보죠 뭐..ㅋㅋ

올드핸드님...아이구~ 수필은 무슨요..^^;; 그냥 잡담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라마 <신돈>에서 노국공주 역을 맡은 서지혜 양이시다. 아흑~! 상콤하기도 하여라. 화제가 됐던KT&G <춤추는 천사> 광고에서 따왔다.

 

요즘 신도니안(신돈 폐인- 본인도 신도니안을 자처함. 여태까지 드라마에 이렇게 필 꽃혀본 건 처음임)들 사이에서 톡끼지혜라는 엄청 귀여운 별명을 갖고 있는 지혜 양. <여고괴담4-목소리>의 주연이었다. 내가 이 영화를 왜 안 봤을까? 매콤한 눈물이 난다.

 

 

 

 

 

 

 

 

 

 

 

<여고괴담4:목소리>에서 공연했던 김옥빈 양과 함께...왼쪽이 서지혜 양이시다. 개인적으로 다시 태어나면 오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이번이 처음이다. -_-;;

 

 

 

 

 

 

 

 

 

 

 

 

 

 

 

드디어 <신돈>의 노국공주다. 개인적으로 노국공주 같은 마눌을 얻을 수 있다면 지금 죽어도 한이 없겠다. -_-;; 현재의 발청률(11%)을 넘어 많은 사랑을 받는 드라마가 되기를 소망하는 바이다.

 

다음은 서지혜 양이 직접 쓴 제작노트입니다. MBC 홈에서 퍼왔습니다.

 

아직까지 신인티를 벗지못한 저에게 노국공주라는 큰 배역을 주셔서 제작진에게 너무나 감사하고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처음 드라마 "신돈"의 출연제의를 받았을때, 사극출연은 처음인데다 지금까지 출연했던 드라마와 차별되는 대규모의 제작비가 소요되는 역사물이고 노국공주의 나이폭도 넓어서 적지 않은 부담감도 있었지만, 감독님 및 작가선생님과 제작 스탭진 모두를 믿고 의지하고 연기하고 있으며, 이번 출연기회를 통해 연기는 물론 연기외적으로 많은것을 느끼고 배우며 촬영에 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올해 복을 가장 많이 받은 것 같아여~~ *^^*

제가 제일 막내이다 보니 연기자 선배님 및 모든 스텝분들이 많이 도와주시고 이뻐해주셔서 즐겁구 재미나게 촬영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두 들구여~

드라마나 CF를 통해서 더욱 더 노력하는 모습, 새로운 모습 보여드릴테니깐 응원 마니 마니 해주시구여, 이쁘게 봐주세요~ㅎㅎ 

앞으로 "신돈" 더 많이 사랑해주시고 많은 시청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즐겁구 행복한 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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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11-03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돈이 재밌나 보군요...! 보고싶긴 한데, 파리의연인이랑 시간이 겹치죠?

jedai2000 2005-11-04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일&추리가 좋아님...서지혜 양 120% 제 스타일이죠. 요즘 서지혜 양과 사귀는 방법을 연구중입니다. 조만간 연구 성과를 발표하겠습니다.

날개님..<신돈> 너무 잼있습니다. 최고예요! <프라하의 연인>이 인기가 많지만, 종영되면 <신돈>이 날아오를 게 분명합니다!

아영엄마 2005-11-05 0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훗~ 제다이님이 좋아하는 여성상이군요.^^

jedai2000 2005-11-07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정말 좋아여~ ^^;;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 초시네 증손녀(曾孫女)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는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

이 날은 소녀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 세수를 하고 있었다.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올린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

토요일이었다.

개울가에 이르니, 며칠째 보이지 않던 소녀가 건너편 가에 앉아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소년은 참외 그루에 심은 무우밭으로 들어가, 무우 두 밑을 뽑아 왔다. 아직 밑이 덜 들어 있었다. 잎을 비틀어 팽개친 후, 소녀에게 한 개 건넨다. 소녀는 먼저 대강이를 한입 베물어 낸 다음, 손톱으로 한 돌이 껍질을 벗겨 우쩍 깨문다.

그러나, 세 입도 못 먹고, "아, 맵고 지려." 하며 집어던지고 만다.

"참, 맛없어 못 먹겠다."

그 때, 거웃한 수염의 농부가 지나가며 말한다.

"어서들 집으로 가거라. 소나기가 올라."

참, 먹장구름 한 장이 머리 위에 와 있다. 갑자기 사면이 소란스러워진 것 같다. 바람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삽시간에 주위가 보랏빛으로 변했다.

산을 내려오는데, 떡갈나무 잎에서 빗방울 듣는 소리가 난다. 굵은 빗방울이었다. 목덜미가 선뜻 선뜻했다. 그러자, 대번에 눈앞을 가로막는 빗줄기.

비안개 속에 원두막이 보였다. 그리로 가 비를 그을 수밖에.

오들오들 떨던 소년과 소녀는 비가 그치자 원두막을 나섰다. 시냇가에 도착하자 엄청나게 물이 불어 있었다. 빛마저 제법 붉은 흙탕물이었다. 뛰어 건널 수가 없었다.

소년이 등을 돌려 댔다. 소녀가 순순히 업히었다. 걷어올린 소년의 잠방이까지 물이 올라왔다.

소녀는 '어머나'소리를 지르며 소년의 목을 끌어안았다.

 

며칠 후, 소년은 자리에 누워서도 같은 생각뿐이었다. 내일 소녀네가 이사하는 걸 가보나 어쩌 나. 가면 소녀를 보게 될까 어떨까.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는가 하는데,

"허, 참 세상일도……."

마을 갔던 아버지가 언제 돌아왔는지,

"윤 초시 댁도 말이 아니야, 재산만 많으면 뭘 하나. 악상까지 당하는 걸 보면……."

남폿불 밑에서 바느질감을 안고 있던 어머니가,

"증손(曾孫)이라곤 계집애 그 애 하나뿐이었지요?"

"그렇지, 사내 애 둘 있던 건 어려서 잃어버리고……."

"어쩌면 그렇게 자식복이 없을까."

"글쎄 말이지. 이번 앤 꽤 여러 날 앓는 걸 아무리 비싼 약을 써도 별무 소용이었다더군. 지금 같아서 윤 초 시네도 대가 끊긴 셈이지.……그런데 참, 이번 계집앤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 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소년의 말이 모두 끝났다. 허름한 초가집 마루에는 소년과 소년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정운산 형사가 앉아 있었다. 정운산이 입을 열었다.

"그게 전부니?"

"네."

"정말 더 할 말 없어?"

소년은 입을 열지 않았다. 정운산은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잘 들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구나.

그 소녀를 왜 죽였니?"

소년과 그의 부모들의 얼굴에 놀란 빛이 역력했다. 그들의 반응을 무시한 채 정운산은 입을 열었다.

"지금은 9월이란다. 가을 무 철이지. 가을 무는 맛이 올라 달디 달지.

그런데 네가 뽑아준 무를 먹은 소녀는 왜 맵고 지려 했을까? 네가 무언가를

발랐던 거야. 바로 양잿물이지. 네 어머니의 빨래통에서 양잿물을 훔쳐 무에다 바른 후 소녀에게 갖다 준 거지. 당연히 소녀는 맵고 지려 할 수 밖에 없었고..."

소년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소년의 아버지, 어머니는 직감으로 정운산의 말이 사실인 걸 깨달았다. 어머니는 소년의 등짝을 내지르며

"아이고! 이놈아. 어쩌자고 그런 일을 저질렀어!"  연신 소리지른다.

사실, 정운산도 소년의 범행 동기가 궁금했다.

"아부지가 맨날 윤초시한테 빌빌거리는 게 보기 싫었단 말예요. 걔도 미웠어요. 서울에서 왔다고 잘난 체만 하고...아부지가 만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힘들게 일해도, 우리 집은 가난하기만 한데, 윤초시네는 아무 것도 안 하면서도 우리가 일한 거 다 가져 가는 게 싫었어요."

소년의 아버지가 힘없이 뇌까린다.

"이놈아. 그마나 우리가 먹고 사는 게 다 누구 덕인데. 윤초시님 아니면 우린 다 굶어 죽었어. 인석아."

마침내 정운산이 입을 열었다.

"꼬마야. 소녀가 왜 자기 옷을 같이 묻어달라고 했는 지 알겠니? 소녀는 네 등 뒤에 업혔을 때, 네 등 위에 침을 비롯해 토사물을 흘렸어. 소녀 옷에도 물론 묻었겠지. 나중에 소녀는 병석에 누워 자기가 먹은 무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지. 혹시 옷을 조사해 너의 범행이 발각될까 두려워 한 소녀는 옷을 같이 묻어달라고 했던거야. 그 옷을 영원히 세상에서 없애려고 했던 거지. 소녀는 죽으면서도 너를 지켜주려 했단다..."

소년은 오열했다.

정운산은 한창 아름다울 나이의 소년이 소녀를 죽여야만 했던 불평등의 고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가난과 세습화된 빈익빈 부익부의 현실이 소년으로 하여금 무서운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한 것이다.

또한 죽어가면서도 소년만을 생각한 소녀의 가슴아픈 사랑도 그의 마음을 시리게 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처연한 감상만을 남긴 채, 얄궂은 소나기가 초가집 안마당을 때리기 시작했다.

1953년 거문도에서 있었던 일...

2005년 지금도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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