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이야기는 팔레스타인 땅의 나블루스라는 도시의 한 가정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세상에 막 나온 이 갓난아이를 맞이한 것은 당황스럽게도 눈물과 한숨뿐이었습니다. 아이는 이어서 여동생 셋이 더 태어나 딸만 여덟인 가정의 다섯 번째 딸로 자랐습니다. 대를 잇고 재산을 물려받을 아들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께서는 계속되는 딸들의 출생에 크게 상심하였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상심하신 이유는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하는 딸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다른 이유는 과거 아랍 사회에서 딸만 낳은 아버지를 제구실을 못한 남자로 보는 시각이 있었는데, 이런 '딸부잣집 아버지' 이미지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반응은 더 심각했습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저주받은 여자라고 여긴 나머지 저를 낳고 며칠을 그저 울기만 하였습니다.
이런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저는 이 세상에서 제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차려야 했습니다. 제 자신이 쓸모없고 가치 없는 성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자이기에 생길 수 있는 위험에 대비하는 방법을 어려서부터 배웠고, 시키는 일에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 생활의 세세한 구석까지 간섭하는 모든 종류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 저의 본분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고, 또 그렇게 훈련받았습니다.
- 84~85쪽 <나의 삶, 나의 문학> 사하르 칼리파
후지탄의 어머니는 딸이 태어나면 무척 기뻐한다. 딸의 장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경제와 사회가 여성들에게 안정적이고 유력한 기회를 늘 제공해준다. 젊은 여성의 성실함과 모험심은 서구사회에서와 달리 여기서는 방해물이 되지 않는다. (중략)
이튿날 산모와 아이가 집에 돌아오자 가족의 친구인 78세의 여성이 찾아왔다. 그녀는 조산과 수유, 산후조리에 대해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아이라니 정말 잘됐구나, 나중에 나이가 들었을 때 옆에 있을 사람이 생긴거야"라고 산모에게 말하며, 신생아의 입에 점액 제거를 위한 약초기름을 한 숙가락 넣어주었다. 그녀는 아이가 마치 자신의 딸이나 손녀라도 되는 듯, 머리와 몸, 팔을 가볍게 마사지해주고는 이런저런 주의사항들을 일러주었다. 떠나면서 그녀는 산모에게 아이를 위한 다음 며칠분의 기름을 선물했다. (중략)
물론 아이를 주로 책임지는 것은 어머니이다. 그러나 생후 40일이 지나면 아이의 엄마는 장사 등 원래 하던 일을 하려 일터로 돌아간다. 그러면 집에 있는 사람-할머니, 자매, 아이 보는 소녀, 아니면 남편이 당연히 아이를 돌보는 일을 맡는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누군가가 아이의 엄마가 있는 시장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서 젖을 먹인다. 아니면 엄마가 잠시 집에 돌아오고 그사이에 가족 누군가가 시장의 노점을 지켜준다. (중략)
이곳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외롭거나 소홀히 취급되면 병에 걸린다고 믿는다. (중략) 요컨대 아이의 병과 회복은 그냥 개인의 일이 아니고, 그 책임 또한 엄마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여러 사람들이 이에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략)
일곱 살쯤 되면 소녀들은 놀이나 가정교육, 학교, 축제 등을 경험하면서 장사의 기술도 익힌다. 토르티야나 구운 생선, 과자, 집에 있는 채소밭의 꽃 등을 파는 일이라면, 아무리 어린 소녀라고 해도 금방 익힌다.
- 156 ~ 160쪽 <후지탄, 여자들의나라(3)> 마리나 메네세스
환대속에 자란 아이와 짐으로 느껴진 아이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이 사회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아이 낳기를 원치않는 이유는 단지 돈인가, 인간답게 살 수 없는 이 사회 구조 자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