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외근을 은근히 기다린다.    

태양 아래 걷는 것 자체만 해도 즐거운데다 

약간의 농땡이도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사당역에 내려, 

역사안 서점을 어슬렁거리며 눈 맞은 책 한권을 산다. 

책을 읽으며 목적지까지 지하철로 이동한다. 

오늘은 조경란의 백화점 이었다. 

누군가 내 속의 말을 빼어 적은 듯하다. 

을지로3가에 내려 볼 일을 보고 

11시 이른 점심을 먹기로 한다. 

외근은 회사 앞 메뉴가 아닌 다른 점심을 먹을 수 있는 드문 기회기도 하다. 

한 냉면집에 들어서는데 같이 들어선 4명에게는 물도 주고 주문도 받는데 내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소심한 나는 조그마하게 '저기요' 하고 외친다. 

아주머니는 여전히 물수건을 접으면서 눈을 든다. 

나는 다시 조금 더 크게 '냉면 주세요'하자, 

아주머니는 아직도 여전히 물수건을 접으며 

'혼자 오셨으면 자리를 옮겨주세요. 그리고 냉면은 기다리셔야 되요' 

라고 퉁명스레 말한다.  

아주머니가 가르킨 자리는 창과 문 앞이다.  

혼자가면 더 아늑한 자리를 배치해주는 레스토랑이 그리워진다. 

8천원짜리면 그리 싼 점심도 아닌데 오전 11시 썰렁한 식당에서 야박하기 그지없다. 

슬그머니 일어나 나온다. 

일전에 던킨에서 브리토와 커피를 시켜먹는데,  

브리토가 너무 매워 물한잔 달라고 했더니  

'물은 사마시는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보단 덜 야박했고, 

예쁜 꽃무늬 양산을 들고 걷는게 좋아서 금새 마음이 풀어진다. 

한 십분 더 헤매다 4300원에 커다란 당근, 호박이 들어간 카레라이스를 먹는다. 

강 남쪽에 산지 꽤 오래되었지만 나는 강 북쪽의 식당들의 분위기가 더 편안하고 마음에 든다. 

드물게 백화점에 가지만(주로 식품관에) 나는 백화점의 향도 과도한 친절도 불편하다.  

미용실도 같은 이유로 드물게 가고 가면 자는 척을 한다. 

나는 엄마가 사준 스텐 다라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쳐박아 두었다. 

수세미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사는 신랑이 미워질 때도있다.  

싱크대를 볼때면 미운 모양새에 성능도 시원치않은 수세미만 보인다..

그래서 때로 내가 물건에 너무 과도하게 정을 주는게 아닌가 걱정스러울 때도 있다. 

아니다. 물건들이야 말로 내가 있을 장소가 거기라는 걸 말해준다. 

나를,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는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다. 

속속들이 인간을 알 수 있는 눈 같은게 주어진다면 재앙일 것이다. 

단 하루도 살기 싫을 만큼. 

다른 이들이 고심 끝에 고른 물건들로 나를 오해해 주기를 오늘도 기대해 본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은빛 2011-06-15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외근나가는걸 좋아합니다. 답답한 사무실에 콕 박혀있는것보다 훨 낫죠! 그 냉면집은 참 너무하네요! 잘지내시죠? 일전에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11-06-15 21:48   좋아요 0 | URL
네 저희는 잘지내요.
감은빛님도 금요일에 뵐 수 있으면 좋을텐데..
고맙긴요 이힛
그 책이 너무너무 기대되요.

웽스북스 2011-06-16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휘모리님. 저 낮에 이 글 읽고 너무 좋았어요 :)

무해한모리군 2011-06-16 08:58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이랑 차한잔 할 영광을 어서어서 가져야겠어요.
보고 싶어요 ^^

다락방 2011-06-16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백화점은 별로 불편하지 않은데 미용실은 불편해요, 휘모리님. 이상하게 미용실에 가면 제 자신이 너무 작아져요. 어서 빨리 나오고 싶어지죠. 그래서 자꾸만 동네의 아주 작은 미용실에 가게 되는것 같아요. 스텝없이 혼자서만 일하는 그런 미용실이요. 낡아버린 소파, 저렴한 파마요금.

일전에 혼자서 회덮밥을 먹으러 갔는데 테이블에 앉았더니 자리를 옮겨달라는 거에요. 4인용이라고. 그리고서는 바에 앉으라길래 앉았는데, 아우 마음이 너무 불편했어요. 밥을 5분도 안걸려서 먹어치운 것 같아요. 회를 뜨는 주방장이 바 앞에서 왔다갔다 거리는데 그 사람과 눈을 마주치게 되면 어찌나 어색한지. 끔찍했어요.

저 위에 백화점도, 레몬케이크의 특별한 슬픔도
이렇게 나직나직한 페이퍼를 쓰게 될 휘모리님께 참 좋은 책이 될 것 같아요.


무해한모리군 2011-06-16 08:5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제가 지난 이주일동안 그동안 읽은 열권의 책을 한페이퍼에 리뷰를 써보겠다고 끙끙거리느라 포스팅을 못하고 있었어요.
결국 그 페이퍼는 완성을 못하고 아직도 임시저장 상태예요 --;;

저는 비싼 가방이 딱 하나 있는데 그걸 들고 가는 장소가 저 두곳과 결혼식장이예요. 왠지 옷차림도 한번 다시보게 되고 말이지요... 그중에서도 물론 더 힘든 곳은 미용실이예요. '어떤 스타일을 원하세요?'라고 물으면 저는 할말이 늘 없는거예요 ㅠ.ㅠ

백화점은 다락방님이 생각나서 산 게 맞아요. 어제 서점에서 몇몇 책을 보며 다락방님 글이 떠올라서 참 좋았어요.

자하(紫霞) 2011-06-16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미~던킨에서는 물도 사먹는거였어요?
커피도 뿅뿅하게 맛없으면서...
저는 백화점가면 좋아하는 브랜드에서 초스피드로 쇼핑을 마치기 때문에...
미용실도 단골미용실가서 알아서 해주세요~하고 맡기기 때문에...
<백화점>을 봐야할지 모르겠어요.
여자로서 감성이 좀 부족한건지도...ㅋㅋ

무해한모리군 2011-06-16 12:18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커피를 주면서 물한잔을 함께 내는 것이 본토의 예절이거늘 말이죠.
백화점은 읽을만한 에세이인데 고만 반 읽고나니 밀려서 덮어뒀다 다시 생각나면 읽어야겠어요..

베리베리님 안그래도 제가 질문이 있었어요 ㅎㅎㅎ
제가 8월말에 교토에 4박5일을 가려고 하는데요.
아무래도 오사카도 하루 다녀오는게 좋을까요?

자하(紫霞) 2011-06-16 17:26   좋아요 0 | URL
쇼핑을 좋아하신다거나 오사카성을 보고 싶으시다거나 무인양품 물건을 좋아하신다거나(3개 층이더라구요) 그렇다면 오사카에서 하루를 보내셔도 좋을 듯 합니다.
그렇지 않으시다면 나라에서 하루를 보내시는게...나라는 하루면 다 본다고 하더군요.(오사카보다 나라가 좋다는 분도 있으셨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11-06-17 10:24   좋아요 0 | URL
아하 나라에는 사슴들이 있다던데...
그냥 교토에서 술이나 마실가봐요 ㅎㅎㅎ

... 2011-06-16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던킨 도넛츠 갈때마다 그 브리또를 (참치랑 치킨, 두 가지 있는 거 맞죠?) 노리고 있는데 10분에서 15분 기다리셔야 합니다, 손님. 하는 말에 다른 거 시키고야 말아요....

백화점과 레몬케이크는, 모두 모두 좋은 책이죠? 풋.

무해한모리군 2011-06-17 10:24   좋아요 0 | URL
그런데... 별 맛이 없어요 ㅋㄷㅋㄷ

네 두책다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