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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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이 읽히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이 당하는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와서, 
차라리 뒷 얘기를 읽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좋은 소설은 무엇인가? 

이 소설은 전혀 있을 법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데도, 
등장인물들이 겪고 있는 그 고통만은 너무 일상적이라 마음에 와 닿는다. 

술팔며 몸팔며 살던 엄마와 각기 아비가 다른 두동생을 책임졌던
초장에 끝장난 무명의 전직 야구선수의 아내로 악착같이 산 은주가
전세와 대출을 잔뜩끼고 처음 산 집에서 그녀는 다짐한다.

   
 

 결혼 12년 만에 장만한 이집은, 그녀에겐 단순한 집이 아니었다. 33평 이라는 수학적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는 공간도 아니었다. 강은주는 지니처럼 살지 않았다는 근거였다. 자신의 개 같은 인생과 맞붙어 싸웠다는 삶의 증거물이었다. 아들 서원의 미래에다 거는 엄마의 약속이었다. 너만큼은 맨주먹으로 정글에 뛰어들지 않게 할 것이라고. - 33쪽 

은주는 자기인생의 최대과오가 최현수와 결혼한 일이라고 자인했다. 자인하고 나자 남편에 대한 온갖 실망과 현실적인 고난을 견딜 수 있었다. 짊어져야 할 짐을 한탄한는 대신, 짐을 지고 달리는 쪽을 택했다. 그녀는 불굴의 투사였다. 무엇보다 자기 삶의 사도였다. 폐차버스 골방에서 숨죽이며 꾸던 꿈을 단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 243쪽

 
   

집을 위해 베트남에 가고, 중동에 갔던 우리 아버지들이 겹친다. 내 아이는 중산층을 만들기 위해 때론 어떤 뻔뻔함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있는 어머니들도 겹친다.  

이렇게 결사적으로 살아도 불행은 느닷없이 삶을 덮친다.  

   
  갑옷을 입고 백미터 달리기를 하는 거나 같아요. 숨이 턱턱 막혔죠. 제 레인에서 벗어나고 싶었고요. 제대하고 어찌어찌 철도청에 입사했는데 2년도 못 채우고 도망쳐버렸어요. 출근하고, 퇴근하고, 월급 받고, 승진에 매달리고, 한 집안의 가장 노릇하는 미래가 제 앞에 있었어요. 그것이 삶이긴 하겠지만 과연 나 자신일까, 싶었던 거죠. 나와 내 인생은 일치해야 하는 거라고 믿었거든요. - 323쪽  
   

우리 대부분 놓쳐버린 잡을 수 없었던 꿈 한둘쯤은 품고 산다. 
죽도록 노력해도 가질 수 없던 것 한둘쯤 가지고 있다.   

내가 저질렀던 낯뜨거워지는 멍청한 실수들
뜻하지 않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준 일들 

가끔 어쩌다 내가 이 일을 하며 살고 있고,
이런 나날을 보내는지 터무니 없게 느껴지는 순간들도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한조각씩 공감하게 된다.
가족에게 상처받지 않은 채 어른이 되긴 어렵기 때문일까?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않은 삶이 드물기 때문일까?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좋았다. 

올드보이식으로 말하면
아무리 찌질해보이는 인생이라도 가장 소중한 것 하나쯤은 지키며 살았다고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래본다. 

앞이 안보이는 불행이 덮쳐올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YES'라고 말할 수 있기를, 다른 사람의 불행에 더 많이 손내밀수 있기를, 그리고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이 더 많기를 바래본다.  

소설 나부랭이라며 비웃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 심장을 이렇게 몰랑하게 만들어 타인에게 열어놓도록 하는 것이 문학의 힘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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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1-05-02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사회과학이 전하지 못하는 뜨거움을 문학은 간직하고 있지요..^^

무해한모리군 2011-05-06 12:14   좋아요 0 | URL
그런데... 사실 저는 사회과학서적이 좋아요..
수학도 좋아하고, 아귀가 착착 맞아들어가는걸 보면 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ㅎ

잘잘라 2011-05-02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으니, 작가가 무슨 일 하는 사람인지 알겠어요. 작가는 불 때는 사람들인가봐요. 부지런히 나무 해다가 장작 패다가 아궁에 불 때는 일.. 불 조절 잘못하면 밥 타고 자다가 등짝 디고 사람들한테 욕 먹는 일도 허다하겠지요? 흐흐.

무해한모리군 2011-05-06 12:1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메리포핀스님
지금 이틀째 서른시간이상 일하고 있으니 정신이 몽롱해서 하는 말입니다만,
우리가 서로에 더 공감하고, 더 안쓰럽게 생각할 수 있게 될까요?
아니면 책 덮으면 잊어버릴까요..

마녀고양이 2011-05-02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중한 것 하나만 지킬 수 있다면, 멋진 생이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네요.
한국 소설은 수많은 '겹침'으로 다가와서, 읽기가 힘들어요. ㅠ

무해한모리군 2011-05-06 12:17   좋아요 0 | URL
저는 눅눅한 우리나라 소설은 특히! 싫어하는데,
요즘 이상하게 우리나라 소설을 많이 읽고 있어요.
흠.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나니 인생에서 쉬운건 하나도 없는거 같아요 --

따라쟁이 2011-05-03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책장에 꽃혀있는데 여러가지 이유로 쉬이 읽히지 않아요.

무해한모리군 2011-05-06 12:18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 40자평을 보고 샀는데,
저는 오래오래 걸려서 읽었어요.
읽다가 두고 읽다고 다른책 읽기도 하고..
요즘 일 폭주라 이런 걸 읽을 마음의 여유가 저도 안나더라구요..

감은빛 2011-05-04 0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곳에서 저 책에 대한 감상을 읽었지만, 한번도 끌리지 않았는데,
이 글을 읽고 단번에 끌리게 되었어요.
덕분에 보관함에 책 한 권이 더 채워졌어요.

문학의 힘에 대해 다시 한번 고개가 끄덕여지는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11-05-06 12:1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감은빛님.
과찬이십니다.
좋긴 했지만 아주 좋다는 아니었습니다..
아주 좋은 것들은 자주 만날 순 없으니까요.

2011-05-05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11-05-06 12:20   좋아요 0 | URL
올드보이에 최민식의 말을 기억나는 대로 따와봤습니다.

5일날 새벽 세시에 퇴근해서 다시 열한시에 출근 오후 열시에 퇴근했답니다.. 인생 뭐 --;;

님도 늘 건강하세요.

노란장미 2011-05-06 0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너무 좋아서..ㅎ 따라서 여기까지 왔네요.
혼자서 한줄 한줄 읽으면서 고개 끄덕이고 있어요.
내 리뷰는 너무 정신사납군.;; 혼자서 투덜대다가..ㅋ
왜 이렇게 깔끔하고 간단하게 감정을 표출하지 못했을까 아쉬워졌어요.
어쩜 이렇게 포인트만 콕콕 찝어서 잘 잡아 내셨을까...감탄합니다.
리뷰 너무 멋집니다!^^

무해한모리군 2011-05-06 12:21   좋아요 0 | URL
처음뵙습니다 노란장미님
아휴 제 리뷰야 말로 정신없습니다.
천천히 읽고 천천히 리뷰를 썼더니 남은 잔상만 쓸 수 밖에 없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