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국내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그냥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사회의 답답한 이야기를 읽는 게 별로다. 서울이라는 이 숨막히게 빡빡한 도시에서 헤헤 거리는 얘기를 쓸 수 있으려면 머리가 텅 비거나 제정신이 아니여야 되는데, 작가란 직업은 저 두 상태로는 쉽지가 않은지 퍽퍽한 우리동네 얘기는 목에 걸리는 지라 피하고 피해왔다. 

이런 사정으로 국내 작가를 피하고 있는 차에 하필 김훈의 소설을 빼든거보면 나도 어딘지 모르게 피학적 성향이 있나보다. 그저 재고소진때문이었다고 이유를 억지로 찾아본다.. (그럼 사기는 왜 샀냐고는.... 묻지 말아주시라..) 

어쨌거나 김훈의 빡빡한 글쓰기는 익히 정평이 나있다. 육하원칙에 맞춰서 건조하게 바늘하나 들어갈 틈없이 이어지고 이어진다. 그리고 소설의 막판에 자기 소설을 작가의 말로 이렇게 완벽하게 정리도 해 놓았다. 

나는 나와 이 세계 사이에 얽힌 모든 관계를 혐오한다. 나는 그 관계의 윤리성과 필연성을 불신한다. 나는 맑게 소외된 자리로 가서, 거기서 새로 태어나든지 망하든지 해야 한다. 시급한 당면문제다.

이 소설은 위의 세문장과 같은 내용이라 내가 덧붙일 말도 없다.  

진중권 선생이 소형 비행기 조정법을 배우신다며 한국을 뜨신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진정 짐칸이나 애완동물로 위장해서 동물칸에라도 나를 데려가달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공무도하, 강을 건너지 못하고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덕전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이다. (35쪽)" 

다들 떠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할 인연의 그물망에 얽혀서 퍼덕거리면서 살지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so cool하게 사는 놈 하나 못봤다. (내주변만 구질한건지도 모르겠다.) 참 별놈 없고, 별일이 없고, 별 삶이 없다. 

그래서 살 이유를 찾고 찾아서 로드 처럼 존재론적이거나, 종교적 이유에 심취해서 '그래도 길을 걸어야 한다'는 답을 찾으면 다행이고, 아니면 야동이나 맛집 같은 단기 아편으로 뇌를 마비시켜서 생각없는 상태를 점점이 이어붙여 고뇌를 죽여가야하는가.

김훈은 말한다. 변하는 것들과 변하지 않는 것들에 우위가 없다. 변하지 않는 것들은 변하는 것들 위에 실려서 함께 흔들리며 존재의 방식을 운영해 왔단다. 

또 한반도 늪에 살던 공룡은 날지는 못했지만 날고자 하는 지향성에서 날개가 생겼단다. 이륙과 비행을 향한 지향성이 날래를 만들었다나.  

글을 잘쓰고 싶다는 나의 염원을 계속 외면 내 글에 그게 나타날지, 이 놈의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어하면 나가질지 모르겠지만, 중요한건 지속적인 퍼덕거림과 지향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취권처럼 힘을 유연하게 실어가는 것이다. 혹시 아나 그러다 보면 한 백만년쯤 후에 내새끼들은 날개 비슷한게 생길지..  

연차휴가를 김훈과 함께 방바닥을 배로 밀며 보내는 중에 올리는 페이퍼라 말안되는 소리를 지껄인다. 이건 내일 출근하기 싫다라는 간명한 문장을 수백줄로 늘리는 것으로 김훈이 저 세줄이면 될 얘기를 소설로 쓰는 것과 비슷한 욕망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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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1-26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차휴가를 김훈과 함께 방바닥을 배로 밀며 보내시느라 [500일의 썸머]는 보류중이신가요, 휘모리님?

그나저나 알라디너들에게 글을 잘쓰고 싶다는 염원은 공통된 것이로군요. 아니 이건 알라디너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이려나..

무해한모리군 2010-01-26 16:42   좋아요 0 | URL
500일의 썸머는 할인쿠폰을 누군가가 주기로 해서 그걸 받고 주말에 보기로 했습니다. 그걸 보면 일전에 본 페어러브랑 같이 후기를 써야지 하는 결심을!
(사실은 아직 세수도 안해서 나가지를 못하는... --;;)

누군가와 소통을 잘 하고 싶어요. 글도 좋고 말도 좋고.. 누가 내 머리속을 들여다보고 뽑아쓴 거 같은 글들을 보고 있으면 샘이 나요.

마늘빵 2010-01-26 19:08   좋아요 0 | URL
500일의 썸머 나 완전 조아요. 근데 그 여자애는 정말! 나도 싫어!!

다락방 2010-01-27 09:03   좋아요 0 | URL
아프락사스님, 저는 500일의 썸머에서 남자주인공 여동생 있잖아요, 그 여동생한테 완전 뻑갔어요. 최고 최고!!!!

무해한모리군 2010-01-27 11:34   좋아요 0 | URL
아 대화에서 소외. 일단 보고나서 댓글 쓰겠습니다 ㅎㅎㅎ

비로그인 2010-01-26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나온 책들은 거의 보질 못해서 일반화하긴 그렇지만..) 김훈의 글들은 무엇보다도 "나"로부터 시작해서 제겐 좋게 다가옵니다. 자신부터 추스리고 뭘 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비록 제가 뭔가 착각을 했을지언정 그게 좋았지요.. 실존.. 실은 "살아간다" 라는 것이 "나" 를 우선순위에서 밀어 놓고 얼마나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만 자신을 먼저 돌본 후에 다른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고요.

어쩌면 스무살 무렵에 읽은, 이런 뜻으로 받아들인, 아직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밥벌이에 대한 어떤 변치 않는 관념은 그의 영향 아래 생긴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요새 데이비드 흄이 남긴 글들에 생각이 많이 미치다 보니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고요.)
어쩌면 이 댓글은 김훈이 전하는 글들에 대한 저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네요..^^

배를 깔고, 책을 보며, 이러 저러한 생각을 하고 있으신 휘님을 떠올려보는데요. 오늘도 여러 갈래로 길을 열기 위해 분투하시는 휘님! 화이팅입니다 !!

(..아 이 왠 급마무리인가요..ㅋ)

무해한모리군 2010-01-27 11:35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아 어젠 참 좋았어요.
막 놀고 저녁엔 빕스에 가서 배터지게 그것도 얻어먹었거든요 ㅎ
김훈은 문장이 참 힘있는 사람이지만,
정말 소설이기보다는 약간 르포같긴해요.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라는..

바람결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blanca 2010-01-26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김훈은 촌철살인이 무언지를 제대로 아는 작가 같아요. 기자 출신이라 그런가. 이 리뷰도 김훈을 닮았어요^^

무해한모리군 2010-01-27 11:37   좋아요 0 | URL
극찬이신데요 ㅎ
네 아주 깔끔하고 힘있는 문장이라 읽는 동안 즐거웠습니다.

머큐리 2010-01-27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난 김훈하고는 인연이 없는걸까? 고민중...흠

무해한모리군 2010-01-27 16:29   좋아요 0 | URL
정직하게 저도 별로 안좋아하는 작가인데..
왜 사놓았는지..
고민하시지 말고 조만간 뵐때 제가 드릴테니 읽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