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자들은 그래, 잊어버릴 수 있어"아유미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잊지 못해."
"물론이지." 아오마메는 말했다.
"역사 속의 대량학살하고 똑같아." 
"대량학살?"
"저지른 쪽은 적당한 이론을 달아 행위를 합리화할 수도 있고 잊어버릴 수도 있어. 보고 싶지 않은 것에서 눈을 돌릴 수도 있지. 하지만 당한 쪽은 잊지 못해. 눈을 돌리지도 못해. 기억은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대대로 이어지지. 세계라는 건 말이지, 아오마메 씨, 하나의 기억과 그 반대편 기억의 끝없는 싸움이야." 

(중략) 

"내 경우를 말하자면, 실은 남자가 두려워. 아니, 뭐랄까, 특정한 누군가와 깊은 지점에서 서로 관계를 맺는 것이. 그리고 상대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거나 하는 것이. 생각만 해도 몸이 움츠러들어. 하지만 혼자라는 건 때로는 좀 그래. 남자한테 안기고 싶고 내게 넣어줬으면 싶어. 참을 수 없을 만큼 하고 싶어져. 그런 때는 완전히 낯선 사람 쪽이 편해. 훤씬 더." 

(중략) 

"티베트의 번뇌의 수레바퀴와 같아. 수레바퀴가 회전하면 바퀴 테두리 쪽에 있는 가치나 감정은 오르락 내리락해. 빛나기도 하고 어둠에 잠기기도 하고. 하지만 참된 사랑은 바퀴 축에 붙어서 항상 그 자리 그대로야." 

1권 624~626쪽

여자들이 타인의 감정에 훨씬 민감하고, 

다른 사람이 해준 일에 훨씬 더 크게 감사하는 건, 

여자에서 여자로 학대와 고통의 기억들이 전해져 오기 때문일까? 

 참 그다운 글이다.  

 별 이야기 없이 몇 백페이지라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감상적이고, 쿨하고 멋지다. 

 그래서 싫지만, 또 빠져들고 만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머큐리 2009-10-05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는 그래서 피해다니는 작가에요..ㅋ

무해한모리군 2009-10-05 22:33   좋아요 0 | URL
음.. 대학을 졸업하곤 하루키와는 이제 결별이다 생각했는데,
그냥 이런 소설이 읽고 싶더라구요.. 겉멋진 소설이 ㅎ

와인한잔 하고픈 생각이 절로 들어요~~
하루키가 중년이라 그런지 중년남자의 로망도 어느정도 담겨있어요 ㅋㄷㅋㄷ

Forgettable. 2009-10-05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결제직전에 늘 탈락하는 작가;;;;

왠지 일기장소설의 효시가 된 작가라는 선입견때문인가봐여, 암튼 상실의시대부터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언제나 다짐만 ㅎㅎ

무해한모리군 2009-10-06 10:35   좋아요 0 | URL
저도 기본적으론 그래요. 그냥 때로 이런 글이 읽고 싶을 때가 있어요. 상실의 시대는 더 어렸을 때 읽었거나 당신이 더 나이가 많아야(일명 68세대) 깊이 호흡할 수 있을 걸 ㅎ

Kitty 2009-10-06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라카미 부라더스(하루키, 류)에 트라우마가 있어서 ㅡㅡ;; 감히 손을 못댑니다.
아참, 하루키의 잡문(?)만은 참 좋아해서 거의 읽지만요... 소설은 도무지;;;
1Q84 재미있나요? 사실 이 소설에 대한 좀 거한 평론을 번역할 일이 있어서 꼭 읽었어야 했는데 역시 트라우마때문에 그냥 서점에 가서 몇 장 들춰보고 인물 이름만 확인하고 말았답니다 ㅠㅠㅠ

무해한모리군 2009-10-06 08:34   좋아요 0 | URL
재미는 있습니다만.........
이거 읽다 울적해서 와인한잔 들이키고 술주정 했더니,
현재 회사는 지각할 예정이며,
연애는 짤릴 위기입니다 --;;
(과연 저도 트라우마가 생길 거 같군요.. 음..)

자하(紫霞) 2009-10-06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소설을 읽을때마다 저는 "아~ 또 잘난척 해~ 그래 당신 잘났어요!"하게되는 건 저만 인가요? 역쉬 삐딱해 삐딱해!!혼잣말임ㅋㅋ

무해한모리군 2009-10-06 09:42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베리베리님 저희 통하는군요!!
누군들 너처럼 안살고 싶냐 짜샤~
뭐 이런 ㅋㄷㅋㄷ

다락방 2009-10-06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하루키를 광적으로 좋아하는데(1Q84는 별로였음) 여긴 제가 끼면 안될 자리 같군요 ㅎㅎ

무해한모리군 2009-10-06 11:28   좋아요 0 | URL
취향이지요. 전 단정하고 간결한 문장을 선호합니다.
1Q84를 보면서 이 사람 '집으로 돌아갔다' 한문장이면 될일을 수백페이지로도 쓸 수 있겠다는 공포가 ㅎㅎㅎ

비로그인 2009-10-07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별로 공감대를 느끼지 못하는지라. 살짝 옮기신 글과 댓글을 보니..역시 안보게 되겠군요!!

무해한모리군 2009-10-07 14:37   좋아요 0 | URL
네!! 별로입니다.
쳇 원작을 우롱하는 처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