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친필 사인이 들어간 책을 받아들고 작가가 쓴 그의 이름을 한참을 봤다. 속지에 나온 그의 얼굴보다 백배는 마음에 드는 글자다..
9편의 단편 중 표제작인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포함해 1/3인 세편을 읽었다.
지금 나를 형성하고 있는 세포들은 사람이 뭔지 모른다. 케이케이를 사랑하던 세포들은 이제 내 몸 안에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오랫동안 두 눈을 감지 못한다. 눈물이 흘러 내릴까봐.
(p10)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이야기다. 이 우주의 90퍼센트가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것들로 이뤄져 있다면, 결국 케이케이의 어린 몸도, 그 몸을 사랑했던 내 세포들도 달리 갈 곳은 없을 것이다. 나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그걸 보지 못할 뿐이다.
(p11)
그 여름의 일들에 대해, 에메랄드빛 바닷속으로 사라진 것들에 대해, 쉬지 않고 흩날리던 머리카락에 대해 생각할 때면 그녀에게는 늘 어떤 부끄러움 같은 게 떠올랐다. 첫 생리혈이 묻은 속옷을 물끄러미 쳐다볼 때처럼, 혹은 밋밋하던 가슴이 솟구치고 몸의 곡선이 생겨나는 걸 거울로 지켜볼 때처럼,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존재로 변해가는 느낌. 성장도, 깨달음도, 이해도 아닌 단순한 매혹.
(p50)
지금 도로가 왜 막히는지 알아? 예, 라디오에서 노점상들이 시위를 벌인다고 했잖아요. 아니야, 지겨움 때문이야. 내가 말했습니다. 신문에서 그 자살한 노점상에 관한 기사를 읽었어. 마흔세 살. 내 나이와 같더군. 마흔세 살이란 이런 나이야. 반환점을 덜아서 얼마간 그 동안 열심히 뛰어가다가 문득 깨닫는 거야. 이 길이 언젠가 한번 와본 길이라는 걸. 지금까지 온 만큼 다시 달려가야 이 모든 게 끝나리라는 걸. 그 사람도 그런 게 지겨워서 자살했을 거야.
(p68)
그때 나는 그녀를, 우리가 함께 보낸 나날들을, 영원히 나를 후회하게 만들고 나를 괴롭힐 게 분명한 그 일들을, 우리가 함께 꿈꿨으나 결국 가지지 못했던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내게 새로운 여자를 만나면 모든 일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함께 꿈꿨던 미래를 다시 찾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맞다. 그런 건 이제 흔적도 없이, 자국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p80)
좋고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 우리가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일생에서 단 한번은 35미터에 달하는 신의 나무를 마주한 나무학자 왕잔의 처지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룡과 함께 살았다는, 화석으로만 남은, 하지만 우리 눈앞에서 기적처럼 살아 숨쉬는 그 나무.
(p81)
나는 멋들어진 문장들 보다는 담백하고 간결한 문장을 선호한다. 아마 그것이 내가 김연수라는 작가를 오래도록 주목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글은 묵직하다. 뭔가 내 마음을 묵지근하게 한다.
그저 90쪽 남짓을 읽었을 뿐인데, 내가 잃어버린, 이제는 죽어버린(때로 내 맘에서 살아나기는 하지만) 온갖 과거와 미래들이 나를 덮쳐온다.
이 책의 뒷표지에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소개글 일부가 적혀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최소한 세 번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안게 된다. 먼저 '세계'라는 이야기에 대해, 그리고 '나'라는 이야기에 대해, 결국에는 '우리'라는 이야기에 대해.]
한 때 나는 고스톱을 배워보려고 밤을 세워 쳐본 적이 있다. 그 게임의 모든 룰을 속속들이 알겠는데 아무래도 이길 수가 없지뭔가.. 책을 읽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의 쪽'에서 삶을 알아가면 갈수록 잘 살 수 있는 길은 점점 더 모르겠다.. 마치 처음부터 이길 사람과 질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왜 늙도록 우리는 살아야 하는지 이 책을 놓을 때쯤엔 어떤 답을 가질 수 있을까? 죽을 때도 모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