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산책을 하다, 문득 나의 인터넷 아이디를 돌아보니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스물의 나의 아이디는 붉은바위 였었다. 이 대목에서 나이드신 많은 분들이 웃으실 듯 하다. 중국혁명소설 '붉은 바위'라는 책에서 따온 것이 맞다. 내가 스물이었다는 점을 생각해주시라. 그때는 미제와 장개석의 모진 고문과 압박 속에서도 굳세게 노동현장과 농촌에서 싸우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 멋지고 그렇게 살아야 겠다며 불끈 했었다.. 내가 게으르고, 개인주의적이며, 특히 폭력을 싫어한다는 점을 고려하기엔 너무 어렸었다.
그 다음은 작은나사였다. 이것도 많은 분들이 예상하듯이 '뇌봉'이라는 책에 나오는 한구절에서 따왔다. 노래에도 인용된 '삐걱되는 세상 작은나사로 살겠다'는, 자신을 공부시켜주고 사람대접 받게해준 혁명정부를 위해 작은 나사못의 역할이라도 해내고 싶다는 구절이다. 이 책은 위의 붉은 바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지겨운데, 왜냐면 뇌봉이라는 이인간이 인간이 맞나 싶게 완벽한 혁명인간이기 때문이다. 고아로 자라난(출신 성분조차 완벽!!) 뇌봉은 혁명조국을 위해 사고로 죽은 22살까지 가장 어려운 곳에서 모든 걸 바쳐서 일한다.. 뭐 내가 그러겠다는 결의는 당근 아니었다. 그저 가진 천성이 게으르고 능력이 일천할지라도 아주 작은 것이라도 보템이 되는 일을 성실히 하자는 결심이었다.
마지막이 휘모리다. 드디어 책에서 빠져나왔다. 우리 90년대 끝학번들은 제대로된 선도 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며, 망가지는 학생운동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왔다. (내가 입학했을때 과학생회 일꾼 수가 졸업할 때 학교 전체 일꾼 수와 같아졌다) 나는 데모가 신나지 않았다. 뭐 열심히 데모 하지도 않았고, 그래도 세상이 잘못된 거 같기는해서 저기 끝줄에 보이지도 않는 자리에 십년간 서 있었다. 학교 선배들 만나면 제일 많이 듣는 얘기가 '야 금새 그만둘 거 같은데 어째 니가 아직 있냐'는 소리다 --;; 뭐 어쨌거나 지금은 신나게 데모하고 싶다. 내 옆에 한사람 한사람과 눈 맞추고, 하고 싶은게 뭔지 함께 이야기하면서 활동하고 싶다. 성과가 적더라도 놀듯이 재미있게!! 스물의 거창함이 서른에는 가늘고 길게로 바뀌었다 ^^
하는 일은 없으면서 아이디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는데, 이러저런 생각이 든 것은 민경우 선배님의 책을 오늘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386 민족민주진영 활동가들에게 저자가 보내는 편지다. 그 자신도 386 NL활동가이다. 통일신문에 이 책에 난 내용들이 올라왔을 때, 변절이라는 둥 온갖 말을 들은 것으로 안다.
이제 읽기 시작한터라 내용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자신이 20년간 해온 운동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용기, 얼마든지 토론할 수 있다며 내미는 손 나는 이런 사람이 좋다. 더구나 저기 멀리 제도권에 들어간 후 지가 버린 조직을 이러쿵 저렇쿵 하는 것이 아니라, 굳건히 버티고 서서 인파이팅을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좋다. 나는 인파이터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분열주의자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누구보다 조직을 사랑하기에 악역을 감당하는 것 아니겠는가.
나에게는 저자와의 아주 작은 에피소드도 있다. 저자가 학생운동에 대한 책을 내었을때 우연한 기회에 술자리에 옆에 앉은 저자에게 강짜를 부린 적이 있다. 96년 연대항쟁에 대한 재평가가 없는 학생운동 역사책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억지를 부리는 내게, 그건 내 몫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셨다. 그래, 이 책을 보니 그건 우리의 몫이고, 이런 책이 저자의 몫인듯 하다.
동지에게는 봄날처럼 따스하게 대하고
사업은 여름날처럼 뜨겁게 하고
개인주의는 추풍낙엽 쓸 듯이 하고
적들에게는 엄동설한처럼 냉혹해야 한다.
뇌봉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