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구광렬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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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체만큼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게릴라가 있을까? 
그의 일기장, 편지글, 자서전, 평전, 커피잔, 티셔츠의 그림, 술, 시계에 까지 박힌 그의 사진과 말들 우리는 그에 대한 정보의 과잉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런만큼 팝스타처럼 광적인 지지자들도 거느리고 있으며, 힐튼에 뒤지지 않을 만큼의 안티도 거느리고 있다. 

이 책은 더이상 뽑아낼래야 뽑아낼 것이 없을 듯한 체의, 그것도 그의 삶에서 어찌보면 가장 고달팠을 죽기 전 마지막 2년간 그가 가지고 있던 자필 필사 노트에 관심을 보낸다. 그 자필노트에 적힌 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예호, 니콜라스 기옌, 레온 펠리페의 시 69편을 통해, 광적인 독서가이자 시를 읽는 사람 체를 소개한다. 그는 무엇을 노래한 시를 삶의 마지막 동안 읽었는가. 

민중

   
 

채찍  
땀과 채찍
피에 물든
채찍,
주인에 의해
피에 물든 

니콜라스 기옌의 시 [땀과 채찍] 中, p83 

 
   

69편의 시의 많은 수는 당시 식민지 민중의 어려운 삶을 노래한 것이다. 체의 인생이 친구와의 오토바이 남미 전역 여행으로 크게 바뀐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그 여행중에 본 것은 아메리카 민중들의 비참한 삶이었다. 농장에서 착취당하던 흑인, 혼혈 노예들의 모습이다. 전세계에 무수한 베트남을 만들러 아프리카로 떠난 그가 이런 시들을 고른 것은 당연했으리라. 굶주림과 고난한 행군 속에서 자신이 누구의 편이며 누구를 위한 혁명을 하는지 한순간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아니었을까. 

라틴아메리카   

그가 필사한 시들 중에는 남미의 현실을 다룬 시들도 많이 있었다. 

끝없는 원주민 사냥과 백인 남성과의 결혼으로 대부분 정복자의 성을 달고 그들의 종교를 믿는 혼혈인 민중들, 정복자들은 내 조상의 살인자인 동시에 아비이기도 하다.   

   
  대사제님, 당신이 원하는 건 또 뭐예요?
우린 전쟁 뒤에 찬미가를 노래하고 또 뭘 계속해야 하나요?
우린, 신의 똥이에요!
자, 모두 반복해봐요, 똥이라고...... 또오옹!
 
레온 펠리페의 시 [역사의 이 거만한 대장] 中 p192
 
   

그래서 그가 필사한 시 중에는 기독교를 비판한 시들도 여럿있다. 일명 '기독교사업'이 얼마나 많은 원주민들을 죽음으로 몰았는지 똑똑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또 백인들의 린치에 의해 죽음을 당한 15세 흑인 소년을 기린 니콜라스 기옌의 시 [에멧 틸을 위한 비가]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흑인과 혼혈인에 가해지는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도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듯 보인다. 그런 애정이 결국 그를 아프리카로 향하게 한 것은 아닐까?

'나와 함께 오르자, 아메리카 사랑이여'로 시작되는 잉카의 고대도시 마추픽추를 노래한 파블로 네루다의 마추픽추4(p146)에서 체는 정복자들의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위대한 남미의 토착문명, 그 속의 순수한 정신을 통해 남미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느꼈다. 그곳에서 체는  비록 현재는 정복자들에 의해 억눌려 있지만, 남미인들의 힘, 혁명을 이룰 수 있는 민중의 힘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 군대를 향해 많은 승리를 만들어냈고 죽는 순간까지 저항했던 마푸체족의 영웅 라우타로를 그린 [센타우로에 대항하는 라우타로](p157)를 읽으며 그들의 저항과 승리도 기억했다.

사랑 

그러나 체가 온통 민중과 혁명이야기로만 자신의 노트를 채운 것은 아니다.  

   
 

파파 몬테로! 이제 알겠네 
그들이 산산조각 내버렸다는 걸 

오늘, 달이 종일 내 집 뜰 안에 떠 있어
날카롭게 땅을 파고들지 

그리곤 거기에 머물지
애들이 얼굴을 씻으며 달조각을 빼내려 하지만 
난 말이야, 이 밤, 베개 속에 넣어두려 하지 

니콜라스 기옌의 시 [파파 몬테로의 디너파티] 중 p110

 
   

 위의 시는 쿠바의 전설적인 춤꾼의 죽음을 기린 시다. 그 역시 음악과 춤을 좋아하는 풍류를 아는 남미의 사내였다. 

   
 

오늘밤 난 쓸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를
난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는 가끔 날 사랑했습니다. 

이런 밤이면
난 그녀를 품에 안았습니다.
가없는 하늘 아래
한없는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 누구
그녀의 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눈망울을
감히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파블로 네루다의 시 [스무번째 사랑의 시] 중 p123

 
   

또한 그는 누구보다 낭만적이고 생과 사랑에 대한 열망에 가득 찬 사람이기도 했다. 그 자신 몇번의 낭만적인 사랑에 빠졌고 그것이 훗날 그가 공격받는 개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낭만적 충동, 사랑에의 충동에 가득찬 사람이기에 안정된 길을 버리고 혁명의 길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 옆의 한사람을 충만히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민중과 세상을 바르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우리는 숱하게 보며 살아왔다.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 인간다운 삶은 대단한 풍요는 아닌 듯 하다. 나를 인정해 주는 열심히 일할 일터가 있고, 일이 끝나면 가족과 동료들과 함께 시 한자락 노래할 낭만이 있는 세상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시를 읽는 혁명가가 꿈꿨던 세상이 오늘 더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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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9-07-12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가능한 꿈을 가진 자만이 혁명을 가슴에 품을수 있나 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7-12 21:35   좋아요 0 | URL
모두가 당연시 하는 것에 '왜'라고 묻는 선지자들 덕에 역사는 앞으로 나가는 것이겠지요.

네꼬 2009-07-12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우리는 숱하게 보며 살아왔다."


아, 리뷰 너무 좋으네요. 잘 읽었어요, 고맙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7-12 21:36   좋아요 0 | URL
네꼬님 주말 잘 보내셨어요?
책은 좀 정리가 덜 된 느낌이었는데, 69편의 시들은 참 좋았습니다. 전편을 다볼수 있으면 좋을텐데 발췌라 아쉬웠답니다.

카스피 2009-07-12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느끼는거지만 혁명가들은 일종의 낭만주의자들이지요.언제나 선두에 서서 혁명을 이끌어가지만 혁명이 완수되면 언제나 숙청되지요.일종의 토사 구팽이라고나 할까요 ^^;;;

무해한모리군 2009-07-12 23:51   좋아요 0 | URL
혁명은 중지될 수 없으니까요.
체제를 유지하는 몫은 다른 사람들의 역할 아닐까요?

비로그인 2009-07-13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가들이 한달에 시집 한권만이라도 읽으면 세상은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무해한모리군 2009-07-13 08:04   좋아요 0 | URL
욕심이 더덕더덕 붙어서 시가 읽히기나 하겠습니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