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2일

사랑하는 이의 빛이 다만 '지금'(NOW)을 비추고 있는데

과거나 미래에 대하여 내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7월 23일

수피는 '오늘'의 자식이다.

길 위에 선 자는 아무도 '내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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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7-24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그래서 다석 유영모 선생께서는 '하루살이'로 살자고 하셨겠다.
'지금' 속에 과거와 미래가 있고, 시간의 무한성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순간 속에 영원이 존재한다."
사랑하는 이의 빛, 즉 하나님의 영은 '지금'을 비추고 있다.
현재에 천착하라!
 

7월 21일

무함마드께서 이르셨다.

"세상은 이 순간이다."(The world is this mo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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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7-24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는 '시간의 무한한 질적 변화'라고 했던가? 그게 뭔지 의미를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럴듯한 말이다. 그걸 뭉뚱그려서 말하면 아마도 이 말이 되겠다. "세상은 순간이다" 혹은 "순간은 세상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순간 당신 앞에, 당신 안에, 당신을 통해 세상은 존재한다.
 
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우리 학문으로서의 동학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13
김용휘 지음 / 책세상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진정한 믿음은 교회를 열심히 나가고 안 나가고의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어떤 사실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앎의 차원이나 신념의 차원 역시 아니라고 본다. 진정한 믿음은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해서 예수로 상징되는 진리와 생명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자기 삶의 중심적 가치로 수용해서 살아가는 마음의 태도라고 본다. (9쪽)

 
   

 이 책의 머리말을 읽으며 나는 전율했다. 진정한 믿음은 신념의 차원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있다는 단순하고도 어려운 진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더구나 서른아홉의 나이에 이르도록 ‘구원’이라는 문제와 씨름하며 방랑했던 그의 생의 여정들은 이 말이 얼마나 치열한 고투 속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가늠케 하고 있었다. 결국 지난한 속에서 그가 발견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란 바로 삶의 문제이며, 어떠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느냐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번민하며 여러 종교를 방황하던 그에게 있어서 종착점은 바로 ‘동학’이었다.   

저자 김용휘는 그가 도달한 ‘동학’이라는 종교가 바로 오늘날의 세계현실인 ‘죽임’(죽임은 인위적인 생명 파괴를 지칭하는 표현이며 생명과 생태계 파괴가 지속되고 있는 현 문명에 대한 비판과 관련된 용어이다.)을 극복할 ‘생명의 길’임을 밝히면서 동학의 내용과 의미를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특히 그는 그동안 ‘동학’이 종교가 아니라 일종의 사상적 성격으로 이해되어왔던 것을 비판하면서 동학이 학문이자 동시에 종교였음을 주장한다. 사실 동양에서는 언제나 학문과 종교 또는 도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오강남 교수의 <세계종교 둘러보기>라는 책에서도 ‘동학’은 한국의 민족종교로서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수행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춰 ‘사회적 성화’라는 동학적 생활양식을 설명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날 동학은 단지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일종의 운동적 이념이나 사상으로 이해되었을 뿐더러 종교적 수행과 같은 성격을 일체 배제된 듯 인식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동학’의 ‘불연기연(不然其然),’ 즉 ‘아니다, 그렇다’의 논리를 주목하면서 새로운 학문적 방법론으로 본다. 왜냐하면 불연기연이라는 ‘반대일치의 논리’는 양극단, 곧 동양과 서양, 과학과 종교, 이성과 직관, 이론과 실천, 타력적 신앙과 자력적 수행 등과 같은 상호 모순의 원리들을 통합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러한 학문적 방법론의 토대 위에 ‘시천주侍天主’로 대표되는 동학사상을 생명론적 얼개 속에서 그려 넣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 결론적으로 ‘동학’이 바로 실천적 수행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실천적 수행이 자신의 삶을 성화시키고, 사회를 성화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한 차원에서 동학은 결코 정치운동이나 혁명이론이 아니라 인간의 궁극적 변화와 구원을 갈망한다는 차원에서 한나의 온전한 종교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지난날 ‘동학’에 대한 오해들에서 비롯된 왜곡에 답하는 방식으로 친절하고, 상세하고 기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간 진행되었던 ‘동학’ 연구들을 모두 섭렵하여 161번에 이르는 방대한 각주를 동원하여 이해를 돕는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기독교 신자로서, 그리고 한국적 기독교라는 토착화 문제에 대해 고민을 안고 있는 한 신학도로서 이 책을 통해 ‘동학’과 만나게 된 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특별히 동학을 토착적 기독교의 원형으로 삼아 기독교와의 조우 가능성을 타진해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죽임’의 세계 현실 속에서 종교가 지향해야 할 바는 과연 무엇인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땅의 모든 종교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이미 19세기에 등장한 동학이 말하고자 했던 것처럼 모든 이들을 한울님으로 모시며, 모든 만물을 한울님 대하듯 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수행의 노력들을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오늘 나는 그 ‘후천개벽’의 세상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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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얇고 가벼운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줄곧 가슴이 짓눌려야 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제목과 함께 표지에서 전해지는 강렬함은 마찬가지로 책의 전편에 녹아있었고, 그 강렬함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어린이들의 무덤”이 늘어만 가는 세계 현실을 목도하며, 한 맺힌 서글픔이 밀려들었으며, 지표화된 기아와 죽음의 숫자들을 마주할 때마다 분노가 일었다. 세계는 발전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가라는 다소 고답적인 본 책의 문제의식이 철저한 자료와 저자의 경험 속에서 전혀 새롭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써 느껴야할 연민과 애통이 들끓었다.

 신자유주의의 세계질서 속에서 갈수록 양극화가 심해지고, 가진 자들이 자신의 배를 더 채워가는 만큼 자신의 허기를 달래지 못해 죽어가는 이들의 수가 갈수록 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오랜 정설이다. 게다가 지구온난화로 인한 환경파괴와 자연재해의 급증은 가지지 못한 자들의 결핍을 강화한다. 궁지에 몰린 이들은 적절한 돌파구를 찾지 못해 좌충우돌하다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사실 그들에게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일부만 주어진다 해도 굶주림으로 인한 처참을 어느 정도 막을 수는 있다. 아니 그것은 차치하더라도 대기업의 횡포가 조금만 줄어든다면 그들에게 생을 연장할 기회는 주어질 수 있다. 하지만 주지하듯이 이 살인적인 사회구조는 오로지 “이윤극대화”라는 목표를 향해 끝없이 질주하고 있다. 그들의 안중엔 인간도 없고, 생명도 없다. 오로지 ‘자본’만이 있을 뿐이다. 

 지글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의 희망을 본다. 왜냐하면 다른 이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인간의 희망을 찾는 일은 부질없어 보인다. 그만큼 인간의 탐욕으로 얼룩진 세상이다. 하지만 인간에게서가 아니라면 과연 우리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더 나은 세상, 즉 기아가 사라지는 세상은 과연 무엇을 통해 가능하단 말인가? 결국, 결국에는 인간 밖에 없다. 정의를 향한 인간의 근원적 지향성은 세상을 변화시킬 거의 유일한 동인(動因)이자, 대안이다. 브레히트의 말처럼 분노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인간성은 오늘날 분노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지글러의 말대로 오늘날, “기아에 관한 한 시장의 자율성을 맹신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못해 죄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아는 극복되어야 하며 지구상의 모든 거주민은 충분한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대전제 아래 우리는 기아와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 

 지난날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망령과 싸우던 이들은 대부분 낙담하거나 좌절하였다. 도무지 쓰러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이 ‘괴물’은 인간의 내면을 깊숙이 점령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일상풍경이 되어버린 굶주림을 모른 체 했고, 오로지 ‘자본’의 증식이 세계를 구원해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 시간에도 지구 한 편에서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단지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관심하게 그들의 죽음을 응시하고, 음식 쓰레기는 그 처분을 위해 골치가 아플 정도로 길거리에 넘쳐난다. 사람들은 멜서스주의와 같은 자연도태설을 통해 “양심의 가책을 진정시키고, 불합리한 세계에 대한 분노를 몰아내”고 있다. 하지만 지글러는 “오늘날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살고 인간적인 지구를 만들기 위해 이제 한 걸음만 더 앞으로 나가면 된다. 이를 위해 멜서스적인 선입견이 없어져야 한다. 이 책은 그것에 기여하고자 쓰였다.”라고 말한다. 지글러가 인간의 변화에 희망을 두고 있다는 점은 다소 낙관적이다. 하지만 그 미래가 비관적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결국 희망의 틈은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결국 (기아에 관한한) ‘사람만이 희망이다’.

(추기: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실린 부록은 참 적절하였다. 또한 아빠와 아들의 대화형식으로 구성한 것은 단연 돋보이는 부분이다. 아마도 가장 쉬우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신자유주의의 입문서로 단연 최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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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18 21:40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2007년 11월 도서목록에 있는 책으로 2007년 11월 8일 읽은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들 위주로 읽다가 알라딘 리뷰 선발 대회 때문에 선택하게 된 책인데, 이런 책을 읽을 수록 점점 내 관심분야가 달라져감을 느낀다. 총평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 책에서 언급하는 "기아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막연하게 못 사..
 
 
은비뫼 2007-08-17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빠와 아들의 대화형식이라 참 쉽고도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서평 잘 읽었습니다.

바람결 2007-08-21 12:1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은비뫼 님. 참 인상적인 책이죠. 쉬우면서도 이리도 무거우니 말입니다.
 

7월 20일

영지인(靈知人, the Gnostics)에게는

그릇된 시력(視力)을 바로잡는 안약이 있다.

네가 시간의 강물을 바라볼 때

그는 영원의 바다를 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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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7-24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지'를 추구하라. 당신의 그릇된 시력이 교정되고,
비로소 당신은 구원받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