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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노래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1월
평점 :
품절

소설은 끔찍한 살해 장면으로 시작된다. 두 아이가 살해되었다. 어린 남자아이는 즉시 죽었고, 여자아이는 몸부림치다가 병원으로 이송되는 차 안에서 죽었다. 엄마는 비명을 지르며 늑대 울음소리를 지른다. 사건 현장에는 다른 한 명의 여자가 있었다. 아이들이 죽은 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한 여자이다. 목숨을 끊으려고 한 여자는 보모였다. 처음 이 장면을 읽었을 때 강도나 사고로 두 아이를 잃고, 엄마는 충격을 받고, 엄마보다 더 아이들을 사랑한 보모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했다고 생각했었다.
소설은 이 장면을 보여준 후 아무런 설명 없이 두 아이를 키우며 직장을 다니는 미리암의 가정을 보여준다. 미리암 변호사였고, 남편 폴은 아티스트를 키우는 프로듀서이다. 처음 밀라라는 여자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미리암은 직장을 쉬면서 혼자 아이를 돌보았다. 그러나 아당이란 남자아이가 태어나고 미리암의 육아에 병들어간다. 그 무렵 미리암에서 변호사 일자리가 들어오고 둘은 결국 보모를 구하기로 한다. 자신의 두 아이를 맡아 줄 보모를 구하면서 부부는 보통 사람들처럼 신중히 사람을 구한다. 몇 명을 면접하고, 루이즈라는 여성을 만난다. 처음 루이즈는 이 가정에 마치 신이 보낸 선물처럼 나타난다. 그녀는 집에 오자마자 아이들과 친구처럼 놀아주고, 집 안의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무엇보다도 최고의 요리 솜씨를 보여준다. 마치 자신의 집처럼 알뜰하게 가족을 돌본다. 폴과 미리암은 그런 루이즈를 신뢰하고 가족처럼 대한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자랑한다.
소설은 이렇게 루이즈가 이 가정의 일원으로 서서히 동화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면서도 중간중간 끔찍했던 살인 사건의 날짜로 돌아와 그 장면을 묘사하거나, 그 과정을 수사하고 탐문하는 과정을 언급한다. 그리고 루이즈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가 언급된다. 두말할 것 없이 모두들 루이즈는 완벽한 보모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루이즈가 자신의 자녀처럼 키우던 두 아이를 살해했다니... 사건을 접하는 사람마다 충격을 받는다.
이제 소설은 점점 루이즈라는 여성의 삶과 내면으로 들어간다. 파리 외곽의 허름한 원룸에서 혼자 사는 루이즈. 자신을 학대하던 남편이 있었지만 병만을 남겨 주고 죽는다. 스테파니라는 딸이 있었지만 그녀 역시 집을 떠나 연락이 되지 않는다. 미리암의 가정에서의 평온한 모습과는 반대로 루이즈의 혼자의 삶은 공허하고 두렵다. 그럴수록 그녀는 미리암의 가정에서 평안을 느낀다. 그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다. 그녀의 이런 내면이 가장 처음으로 드러난 장면은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는 부분이다. 너무나 재미있는 이 놀이 속에서 작가는 조금의 섬뜩함을 비친다.
"그러면 밀라는 놀이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손바닥을 마주친다. 아당은 밀라를 따라다닌다. 아당은 너무 웃다가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여러 번 엉덩 방아를 찧는다. 아이들은 루이즈를 불러 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루이즈? 어디야?' 조심해. 우리가 간다. 아줌마를 찾아낼 거야. 루이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이들이 울부짖으며 불러도, 폴이 죽어 울먹여도 숨은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어둠 속에 웅크린 그녀는 아당의 공포를, 흐느끼다 목이 메고 기진맥진한 아이의 공포를 주시한다. - 중략 -둘만 남았다고, 루이즈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걷잡을 수 없게 불안해져서 밀라는 보모에게 애걸한다. '루이즈 아줌마, 하나도 안 재미있어요. 어디 있는 거야?' 아이는 신경이 곤두서서 발을 구른다. 루이즈는 기다린다. 그녀는 방금 낚은 물고기가 아가미는 피투성이 된 채 온몸을 펄떡이며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을 관찰한 듯 아이들을 바라본다. 배 바닥에서 파닥거리는, 기진한 입으로 공기를 빨아들이는 물고기, 그 상황에서 벗어날 가망이 전혀 없는 물고기." (P 60-1)
폴은 친구들을 초청한 파티에서 술기운에 루이즈도 여름휴가에 함께 갈 것이라고 공포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로 여행을 떠난다. 루이즈는 일주일간의 그리스 여행에서 자신은 가족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폴과 미리암도 루이즈는 우리 가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이 끝나면 그는 혼자 쓸쓸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럴수록 루이즈는 더욱더 미리암의 집에 머무르고 싶어 한다. 폴과 미리암은 점점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루이즈를, 그리고 무언가 알 수는 없지만 점점 자신들을 조이는 듯한 루이즈에 대한 거부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은 루이즈를 내보내기로 결심한다. 루이즈 역시 이것을 직감한다. 이제 그녀는 아이들과 있어도 행복하지 않다. 그녀는 결국 내보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국 혼자가 될 것이다. 그녀는 결국 가족이 아니었다.
"행복감에 이어 낙담의 나날들이 이어진다. 세상은 점점 줄어들고 움츠러들어 그녀의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다. 폴과 미리암은 그녀에게 문을 닫았고, 그녀는 그 문을 부수고 싶다. 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다. 그들과 함께 세상을 이루고, 자기 자리를 찾고, 그곳에 거주하는 것, 몸을 숨길 둥지 하나, 따스한 은신처 하나를 마련하는 것, 가끔 그녀는 자기 몫의 땅을 요구하리라는 마음을 먹었다가 곧 풀이 죽고 서글픔을 차오르며 무언가를 믿었다는 것이 부끄러워지기까지 한다." (P 243)
이 소설은 노벨문학상과 맨 부커상과 함께 3대 문학상으로 알려진 2016년도 프랑스 콩쿠르상 수상작품이다. 소설은 한 가족에게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통해 그 사건과 연루된 미리암과 폴, 루이즈, 그리고 아이들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가족이면서도 가족이 아닌 관계, 부모와 보모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결국 이들은 가족이라는 터울 속에 고용인과 피고용인으로 존재했다. 이런 프랑스의 사회적인 문제점과 함께 루이즈라는 여성의 내면을 묘사하는 부분이 너무도 섬세해 읽는 이를 전율케 한다. 혼자 남겨진 그녀의 공허한 내면과 그럴수록 아이들에게 집착하는 마음들, 그리고 결국 부모와 아이들에게까지 외면당하고 혼자 남겨지는 그녀의 마음들이 읽는 내내 그대로 전달된다. 마지막 궁지에 몰린 그녀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자칫 스티븐 킹의 미저리의 프랑스 판이 될 수 있을 거 같은 소설이지만, 소설은 내내 루이즈라는 인물을 광기나 집작과는 다른 연약하고 상처받은 여인으로 묘사한다. 작가는 소설에서 계속해서 연민의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럼에도 아이를 키우는 내 입장에서는 그녀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나 역시 폴과 미리암처럼 내 아이가 먼저고 내 가정이 먼저이기 때문일까? 결국 가족 외에 또 다른 가족은 허울뿐일 것일까? 읽은 후에도 너무나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