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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
이우일 지음 / 비채 / 2017년 12월
평점 :
가끔 어렸을 때 하던 땅따먹기 놀이가 떠오른다. 마을 공터에서 커다란 원을 그려놓고, 평평한 돌을 골라서, 자기의 땅을 만드는 것이다. 처음엔 조그만 원에서 시작해서 돌을 세 번 튕겨 그려지는 땅까지 모두 자신의 땅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커다란 원이 각자의 땅으로 다 차면, 이제는 남의 땅을 빼앗기 시작한다. 내 땅, 네 땅 하면서 서로의 땅을 빼앗아가는데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요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커서도 사는 모습이 이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좁은 땅에서 내 땅, 네 땅 하면서 서로의 것을 빼앗아가는 모습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렸을 때는 재미로 했지만, 지금은 죽기 살기로 한다는 것이다.
여행이 주는 유익은 잠시 내가 머물던 곳을 떠나면 이런 모든 것이 하찮아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죽기 살기로 가지려 했던 것이 어쩌면 별거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여유와 낭만을 주는 것, 그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이런 여행의 묘미를 제대로 누리게 해 주는 책이 있다. 이 우 일 작가의 여행산문집인 [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이라는 책이다. 이 책의 그림을 보고 어딘가 익숙하다 싶었다. 알고 보니 내가 재미있게 읽은 올림픽 관람기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드니]와 하가시노 게이고의 [꿈은 토리노를 달리고]라는 책등에서 일러스트를 그렸던 작가였다. 조금 무심한 듯, 그냥 막 그린 듯 느낌이 나지만, 보고 있으면 무언가 정겹고 아기자기한 느낌이 나는 그림들이었다.
이 책은 작가가 '퐅랜'이란 도시에서 아내와 딸과 함게 2년 동안 머물렀던 일기 비슷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퐅랜이란 도시가 너무 생소해서 여러 번 검색을 해 봤는데, 나오지를 않았다. 책을 읽던 중 작가가 머물던 아파트에서 후드 산의 만년설이 보인다고 해서, 다시금 후드산 주변을 검색해 보니 오리건 주의 포틀랜드가 검색되었다. 아마 이곳을 현지 발음으로 퐅랜이라고 부르는가 싶었다. 나 같은 영어 무식자를 위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소개하는 퐅랜은 우리가 잘 아는 심슨 가족의 배경이 된 도시라고 한다. 또 비가 많이 내리고, 재즈로 유명하고, 미국에서 가장 긴 자전거 도로가 있어서 자전거를 많이들 탄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는 작가가 퐅랜에 동화되어 가는 과정을 아주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퐅랜에는 워낙 비가 자주 내려서 웬만한 사람들은 우산도 쓰지 않고 그냥 비를 맞고 다닌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익숙지 않은 풍경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도 우산을 쓰지 않고 다니고, 딸도 우산을 쓰고 다니지 않더라는 것이다. 결국 우산을 쓰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고, 결국 자신도 우산을 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비를 맞고 속옷이 다 젖도록 자전거를 타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한 퐅랜에서는 버스를 타고 내릴 때 누구나 큰 소리로 인사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낯선 장면에 당황해하다가도 어느새 그것을 따라 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이곳에 도착해 버스를 타자마자 퐅랜 사람들의 독특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시내버스에서 앞뒤로 문이 각가 하나씩 있다. 딸 때는 앞문을 이용해 타지만 내릴 때는 앞뒤 문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재미있는 건 내릴 때 튼 소리로 인사하는 모습. 앞으로 내리면서 운전사에게 인사를 하는 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뒤로 내리는 사람도 다들 큰 소리로 "생큐"를 외치는 것이다. 음 뭐, 처음에는 인사성이 밝으면 그럴 수도 잇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계속 보다 보니 조금 이상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뭘 그렇게까지 큰 소리로 인사를 할까. 그런데 더 황당한 건 우습다고 며칠 우리끼리 낄낄거리고 있었는데, 곧 우리도 내리면서 큰 소리로 "생큐"를 외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P81)"
낯선 여행지에서 오래 머물다 보면 점점 그곳에 동화되어 가는 것이 매력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단순히 여행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작가가 자신의 딸인 은서와 함께 그림에 대해서 시간을 보낸 장면도 나온다. 아버지와 같은 취미를 공유하고, 나중엔 그것이 전공까지 되었다. 결국 이 책은 은서가 미술을 전공하러 암스테르담으로 떠나면서 끝난다. 작가 역시 2년의 퐅랜의 생활을 접고 태평양의 한 섬으로 떠난다면서 이 책의 기록이 끝난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렇게 머물다 떠남의 반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도 잠시 내 품을 머물다 떠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땅따먹기처럼 모든 것에 치열한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 본다. 작가처럼 잠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훌쩍 떠날 수 있는 여유가 부럽고, 지금 그렇지 못하는 내 삶이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책으로나마 작가가 느꼈던 퐅랜에서의 여유와 낭만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