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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코미디 - 유병재 농담집
유병재 지음 / 비채 / 2017년 11월
평점 :

어렸을 때 주말의 명화에서 재미있게 보는 영화 중에서 '내 이름은 튜니티'라는 영화가 있었다. 주인공이 테렌스 힐이란 이탈리아 출신의 배우인데, 금발에 초록색 눈과 터프한 수염이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시리즈의 원제는 "My name is nobody"이다. 항상 허름한 차림으로 시니컬한 블랙 유머를 구사하는 튜니티이기에 자주 악당들과 시비가 붙는다. 상대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총을 뽑는 순간 튜니티는 전광석과 같은 솜씨로 총을 뽑아 상대방의 총을 떨어뜨리거나 허리띠를 끊어 놓는 듯한 묘기와 같은 총솜씨를 보인다. 그제서야 상대방이 놀라서 이름을 불으면 "My name is nobody"라고 대답합니다. 어렸을 때 가끔은 나도 튜니티와 같은 삶을 살고 싶었다. 매일 학교와 시험, 그리고 경쟁과 좌절이 아닌, 세상을 마음껏 비웃으며 튜니티와 같은 블랙 유머를 던지며 살고 싶었다.
이런 튜니티와 같은 느낌은 유병재의 농담집 [블랙코미디]를 읽으면서 느꼈다. 다른 점은 튜니티가 서부 시대를 낭만적으로 비웃었다면, 저자는 현대의 야박하고 경쟁적인 세상을 더 시니컬하게 비웃는다. 일반 커피보다는 조금 더 진하고 쓴 블랙커피와 비유되는 블랙 유머다.
"명문 사학 대학의 청소노동자 K 씨. 나이대로라면 학생 신분이 더 어울리는 K 씨는 불우한 가정환경 탓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중략- 유능한 교수는 단번에 K 씨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자신의 밑에서 조교로 일할 것을 제안하였죠. - 중략- 어제까지 박봉의 청소하였던 K 씨. 이제 명문 대학원의 조교가 되어 박봉에 교수 집을 청소하고 애도 봐주고 교수 논문도 써주고 교수 장모님 기장도 담가준답니다." (P 31)
"내 인생은 절대자가 연출하는 예능의 미션 같다. 죽을 각오로 별의별 고난을 다 견뎌내고 '우리 돼지 한 돈' 정도의 보상을 받는 것이다." (P 45)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하지만 어떤 똥들은 무서울 정도로 더럽다." (P 91)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다. 나는 코미디를 선택하길 정말 잘 했다. 뭐랄까 직업으로서 확신이 든다. 코미디야말로 내 직업으로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왜냐면 너~~~무하기 싫을 때가 많다. 하기 싫어야 직업이지, 좋으면 취미니." (p165)
또한 읽다 보면 별거 아닌 유머 같지만, 생각할수록 세상과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는 글들도 많다.
"[매트릭스의 네오, 빨간약을 먹고 진실에 눈 뜰 것인가, 파란 약을 먹고 현실에 순응할 것인가.
[달콤한 인생]의 선우. 보스의 명령대로 희수 애인의 목숨을 빼앗을 것인가, 못 본 척할 것인가.
[다크나이트]의 배트맨, 하비 덴트를 구하러 갈 것인가, 레이첼을 구하러 갈 것인가.
[슬램덩크]의 서태웅. 경기 종료 2초 전 정우성, 신현철의 더블마크를 뚫고 슛을 강행할 것인가, 노마크의 강백호에게 패스할 것인가.
이외에도 부지기수.
가만 생각해 보면 위 영화, 만화들처럼 내가 누구인지 정의해줄 결정적인 선택의 기로, 드라마틱한 갈등의 순간들은 내 인생에 잘 일어나니 않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혹은 어떤 존재인지는,
대부분 담배꽁초 바닥에 버리고, 알바한테 반말하고, 엄마한테 짜증 부리고,
이런 기억에도 남지 않을 미세먼지 같은 작은 순간들이 모여 결정되는 것 같다." (P 148-9)
이 책의 특징이자, 조금 아쉬운 부분은 농담 전반에 자신에 대한 비하적인 유모의 분위기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아무런 존재도 아니라고 말하는 튜니티와는 조금 다른, 자신이 정말 아무런 인정도 못 받는 존재라는 뼈아픈 자각들의 글들이 실려져 있어, 읽는 내내 연민을 느끼면서도 마음이 개운치가 않았다.
"촬영차 시골에 내려갔던 날, 모두 잠든 어두운 밤, 배가 아파 화장실로 향했다. 잠금장치가 고장 난 화장실에 아니나 다를까 문과 변기의 거리마저 멀었다. 행여 누가 들어올까 두려워 나는 계속 입으로 아! 아아! 소리를 냈다. 왠지 모를 기시감, 아, 나는 여태 이렇게 살았구나. 평생 나의 존재를 이렇게 피력하며 살았구나. 나 여기 살아 있노라고, 여기 존재하노라고. 이렇게 유약한 나, 여기 존재하니 나에게 상처 주지 말라고, 나는 이렇게 살았구나." (P 18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