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의 기록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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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방송에서 아프리카 초원 같은 곳을 배경으로 한 야생 세계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가 자주 방송되었었다. 겉으로는 아름다운 초원이나 밀림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잔인한 약육강식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한가하게 풀을 뜯어 먹는 가젤들 뒤로 몸을 한껏 낮추고 접근하는 표범과 같은 맹수들도 보인다. 아름답기까지 한 늘씬한 몸에 화려한 무늬를 가진 맹수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먹잇감까지 접근하더니 순식간에 목표물을 향해 달려든다. 그리고 주저 없이 약한 먹잇감의 목을 물어뜯는다. 어릴 때는 그런 모습을 보면 참으로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때로는 그것이 그런 맹수의 사는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일본 제목이 우행록(愚行錄)인 누쿠이 도쿠로 [어리석은 자의 기록]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이런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한편으로는 잔인한 초원의 약육강식 세계를 떠올렸다.

이 소설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란한 부부와 두 자녀가 하룻밤 사이에 무참히 살해당한 사건을 취재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처음엔 르포 기자로 알려진 남자가 가족 주변의 사람들을 취재하며 이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부부 모두 일류 대학을 나오고, 남편은 유명한 부동산 회사에 다니고, 도쿄 근처의 맨션에서 살면서, 예의 바르고 공부 잘하는 두 자녀를 키우고 있다. 드라마에 나오는 이상적인 가정이고, 주변 사람들도 '행복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가족'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래요 부인이 아주 미인이었어요. 외출할 때마다, 한껏 멋을 부린 느낌은 아닌데 흐트러진 데가 없었어요. 뭐라고 해야 하나, 좋은 집안에서 곱게 자란 아가씨 같은 분위기랄까. 그래요, 그런 사람을 청조하다고 하죠. 응, 청조한 느낌, 맞아요." (P 18)

"근데 남편도 좋은 사람인 것 같았어요. 만나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더라고. 미인인 부인 못지않게 인물도 훤하고 대기업 엘리트 사원다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죠. 대학도 와세다를 나왔다면서요? 대단해요. '행복'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가족이었어요. 그런데도 그런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다니, 사람 인생은 모르는 거예요" (P19)

그런데 이렇게 좋은 평가만 이어지다가 중간중간 아내인 나쓰하라 씨의 섬뜩함이 드러난다. 모든 사람에게 자상한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의 학벌과 계층을 자랑하고, 타인들을 자신 밑에 두고, 자신에게 대항하는 사람은 철저히 짓밟는 모습들이 드러난다.

남편인 다코 씨 역시 마찬가지이다. 순진한 모습 속에서도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상대를 철저하게 짓밟고, 자신이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서 여성들을 이용하는 악랄한 모습들이 보인다. 그의 의외의 모습을 발견한 회사 동료는 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놀랍습니다. 다코한테 그런 명이 있는지는 몰랐으니까요. 제가 아는 다코는 굳이 말하자면 수동적인 성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스키씨나 야마모토 씨 같은 사람한테 휘둘렸던 거죠. 그런데 자존심을 건드리면 이런 짓까지 하는구나. 이런 인간은 절대 적으로 돌리면 안 되겠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P110-1)

이제 소설은 두 부부의 대학시절의 친구나 옛 애인과 인터뷰하면서 그들의 잔인함을 들춰낸다. 자신의 라이벌을 철저하게 짓밟고, 자신의 성공을 위해 친구나 애인을 이용했던 모습을... 그와 함께 일본 사회의 대학을 중심으로 한 계층 문화와 따돌림 문화까지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잔인한 약육강식 자체인, 일본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다.

일본이란 사회를 잘 알지는 못하고, 또 이 소설에 등장하는 와세다 대학이나  게이오 대학의 문화에 대해서는 더욱 잘 모른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분위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 역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일본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출신학교와 대학으로 그룹을 나누고, 자신보다 낮은 그룹은 철저히 무시하고, 자신보다 높은 그룹은 동경하고, 이렇게 한 단계씩 오르기 위해 서로를 밟고 올라야 하는 치열한 약육강식의 세계를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런 세계에 아주 특화된 인간이 바로 다코와 나쓰하라 부부였다. 소설을 읽은 내내 이렇게까지 사회의 어두운 부분과 인간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가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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