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편견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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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보면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엄마 뱃속에 있던 작은 생명 덩어리가 인간의 형체를 갖추어 가고, 이제는 제법 사람의 말과 행동을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이 아이가 살아갈 험악한 세상으로 인해 조금은 걱정스럽다. 이 아이가 어떻게 이런 험악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나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이 험악한 세상에서 살아왔을까. 타인을 밟지 않고는 설 수 없는 세상에서, 괴물이 되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는 세상에서, 나는 왜 아직도 괴물이 되지 않고 있을까. 그러다가 문득 어린 시절의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누렸던 따스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어쩌면 그때의 따스함이 아직 내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따스함이 점점 사라지고 고갈되면 나도 괴물이 되어가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 아이에게 주는 사랑이 더 절실해진다. 이 아이가 평생 동안 고갈되지 않고 험악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부어 주고 싶은 마음에... 

손홍규 작가의 [다정한 편견]이란 산문집을 읽으며, 험악한 세상에서 괴물이 되지 않고 순수함을 간직하려고 몸부림치는 작가의 순수한 영혼을 느꼈다. 이 산문집은 원고지 4-5매 분량은 짧은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그 짧은 글들에 하나같이 작가의 진솔함과 세상과 사람을 향한 따스함이 묻어 있다. 그리고 이런 따스함은 대부분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부터 시작한다. 가난한 집안과 때로는 무능해 보이는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그분들과 함께 했던 따스함이 작가의 마음 깊숙한 곳에 남아서, 세상과 사람을 따스하게 대하게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어린 시절의 추억에 대한 글들을 읽으면 그때 작가 안에 들어왔던 따스함이라는 덩어리가 나에게도 느껴지는 것 같다.

"아버지는 으레 반쯤 마신 뒤 설탕물 대접을 내게 건네주었는데 여태도 나는 그 달고 시원했던 그 설탕물맛을 잊지 못한다. 어느 날인가는 한번 부엌 천장에서 설탕을 끄집어내 물에 타 먹어보았으나 아버지가 건져주었던 것처럼 달기는커녕 밍밍하기만 했다. 아버지의 타락이 조금쯤은 스며들어야, 하루 동안의 노독의 흔적이 스며들어야 단맛이 난다는 걸 지금은 안다. 그러니까 정말 맞는 말이다. 달고 맛있는 물이야말로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이야말로 맛있다. 그저 설탕에 물을 탔을 뿐인데도." (P 31)

작가의 글에는 유독 어린 시절 어머니에 관한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 그중에서 어머니의 빨래 이야기가 종종 언급된다. 손목이 시도록 방망이로 두들기며 빨래를 하는 모습, 그래서 외지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면 어머니에게 쉽게 빨랫감을 내놓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굳이 아들의 빨랫감을 가져다가 깨끗이 빨아 문 앞에 개어 놓아 주셨다. 작가는 그 어머니의 사랑이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게 했다고 말한다.

 "내가 나를 포기하면 할수록 어머니는 힘겨웠으리라. 더 많은 힘을 들여 빨래를 했을 테니.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금언이 있다. 이 말은 거짓이다. 진실은 이렇다. 물이 탁해지면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대신 그곳에 괴물이 산다. 괴물이 된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우리는 종종 저 금언을 이용하는 것이다. 괴물이 되면 되돌아가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 게 삶이라면, 최선은 괴물이 되는 속도를 늦추는 것이다. 우리는 타락하지 않아서 인간다워지는 게 아니라, 타락의 속도를 늦출 용기를 지녀서 인간다워지는 존재니까." (P 69)

"우리는 탁하지 않아서 인간다워지는 게 아니라, 타락의 속도를 늦출 용기를 지녀서 인간다워지는 존재니까"라는 작가의 짧은 글 속에서 작가가 살아왔을 험악한 세상이 느껴진다. 그리고 지금도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작가의 영혼이 느껴진다. 이런 작가의 몸부림의 이 책의 후반부에 많이 등장한다. 그는 이 시대의 작가의 글쓰기를 날마다 유서를 쓰는 것에 비유한다.

"무례하고 오만한 지식인들 앞에 예술이 무릎을 꿇는 순간 자본주의의 지배는 공고해졌다. 그러므로 우리가 쓰는 글은 다만 유서일 뿐이다. 지배계급이 연루된 범죄치고 언제 한 번이라도 샅샅이 전모가 밝혀진 적 있던가, 그러나 억압이 있은 곳에 저항도 있다. 나는 상업주의에 굴복한 작가들의 손에서 소설을 되찾아오기 위해 홀로 길을 떠난다.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다. 아니 패배가 자명하다. 그들은 무척 유능한데다 수많은 지지자를 거느렸기 때문이다. 오늘도 책과 원고지를 앞에 둔 채 열렬히 읽고 쓴다. 작가에게 진실을 기대했던 어느 투명한 영혼을 위해서라도. 날마다 유서를 쓴다." (P 145)

그럼에도 작가는 험악한 세상을 이야기하면서도 여전히 세상과 사람을 따스하게 바라본다. 그 안에는 아직 괴물이 되지 않은 순수한 영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부디 그 영혼이 오랫동안 남아 있기를 바래본다. 그래서 그 순수한 영혼이 묻어 나오는 글들이 얼어붙고 냉랭해진 독자들의 마음을 녹여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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