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무기 - 이응준 이설집
이응준 지음 / 비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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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치열한 삶을 꿈꾸었다. 세상에서 살면서 내 모든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잡고 평생 씨름을 하고 싶었다. 이제는 그런 삶이 부담스럽다. 그냥 물 흐르듯이 흐름에 몸을 맡기는 삶을 살고 싶다.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일까? 그럼에도 아직도 삶을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그 열정과 몸부림이 부럽다.

[영혼의 무기]라는 방대한 이응준 작가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을 한 마디로 정리하라면 바로 이 '치열함'이다. 이 책은 작가가 그동안 써왔던 많은 양은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펴낸 것이다. 두께가 무려 800페이지가 넘는다. 내용 역시 단순한 삶에 대한 감상에서부터 시작해서 영화나 책에 대한 감상, 정치적인 이야기,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인터뷰 내용까지 다방면에 걸쳐 있다. 그래서 이 책의 느낌을 한 편의 서평에 담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전반적인 느낌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로 그 '치열함'이다.

이 책의 서문에 해당되는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바로 자신의 이 치열함을 이야기한다. 그는 스무 살 때 가졌던 세상을 향한 열정을 아직도 간직하며 글을 쓰고 있다고 회고한다.

"스무 살 무렵을 돌이켜보면 나는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 갈수록 삶의 해답에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근접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맹랑했던 것일까, 어리석었던 것일까. 그때로부터 자못 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냉정한 결과는 비참까지는 아니더라도 차라리 허망에 가깝다. 확실한 패배보다 오히려 더 괴로운 오리무중 속에서 나는 고정 중이다. - 중략- 나는 무턱대고 내 인생과 싸우듯 다만 세상에 지지 않으려는 본능에 기대어 이 산문들을 써 내려갔다. 때로는 멍하니 걷던 길 위에서의 작은 수첩 속 몇 줄이었고 대로는 하루 이틀을 꼬박 뜬 눈으로 버티는 고단한 몇 장이었으나 분명한 것은, 뜻밖에도 바로 그것이 맹랑하고도 어리석기 그지없는 내 인생이 세상과 화해하는 유일한 길이었다는 사실이다. 스무 살 무렵의 나와 지금의 나는 아직도 사막과 가시덤불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살고 있지만, 그때의 그와 오늘의 나는 죽음과 같은 안식에 눕기보다는 불구덩이 같은 생을 가로지르려 노력하기에 여전히 이렇게 한 사람이다." P 10-11

 

그의 치열함은 단순히 글쓰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정치에 대한 그의 견해 역시 편안한 길을 가기보다는 모두에게 돌을 맞는 중도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다.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중도란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모두 공격을 받고, 무능하거나 우유부단함으로 비친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도야 말로

"우리의 습관 같은 선입견과는 완전 다르게, 사실 중도만큼 정치적으로 래디컬 한 입장도 없다. 극우와도 싸우고 극좌와도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중도주의자는 그 어느 혁명가보다 치열하고 그 어느 애국자보다 중후하다. 흰옷에 떨어진 피보다 선명한 중도는 회색주의자가 아니다. 중도는 어설픈 화해를 거부하고 옳은 판단을 내려 행동하는 강력한 이성의 실현이다. 사랑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아닌 너의 무관심은 중용이 아니라 한갓 중간이며 사랑할 때는 사랑하고 미워할 때는 미워하는 절도에 중용의 본질이 있노라고 철학자 우송 김태길 선생은 갈파하지 않았던가. 아직도 대한민국 안에서 좌에게 이용당하고 우에게 휘둘리고 있는 중도주의자 백범에게 아쉬웠던 것은 정당성도 의지도 아니었다. 오직 힘이었다. 실력 없는 중도는 그저 갈등하는 소수일 뿐이다." - P 159

이 얼마나 예리하고 날카로운 지적인가? 나 역시 정치적 중도를 표방하지만,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 항상 보수와 진보에게 욕을 먹고 있다. 왜 우리나라는 극단적인 사람들의 목소리만이 항상 진리인 것처럼 포장되는 것일까? 극단은 결국 자신 외의 사람들은 모두 적으로 돌리고, 결국에는 끔직한 학살?을 꿈꾸는데도...

 

사랑에 대한 그의 메시지 역시 남다르다.

"사랑은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부러 사랑을 해서 고통을 받는다. 그 고통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삶의 비밀에 한 발짝씩 접근할 수 있다. 그 비밀을 풀어낸다는 소리가 아니다. 불꽃에게 다가가듯 이 세계와 사랑에게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뜻일 뿐, 와중에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 사람마저도, 전부 불에 타 사라질 수도 있다. 사랑의 고통을 맛볼 것인가, 아니면 회피할 것인가. 선택은 각자에게 달려 있다. 대체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죽음이며 무엇이 이 세계란 말인가? 내가 사랑한다고 미고 있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재에게서는 재의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다. 죽은 불의 냄새가 난다. 우리는 불꽃인가? 자, 이제 어쩔 작정인가?" P 376-7

글을 읽으면서 글 속에서 그 사람의 치열함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짜릿한 즐거움인가? 내가 살지 못한 그 치열함을 타인의 글로서나마 대신 맛볼 수 있으니... 스스로를 산문가도, 소설가도, 대설가도 아닌 이설가라고 이야기하는 그는 지옥과 연옥의 국경선에 참오를 파고 전쟁을 기다리는 말단 병사와 같은 심정으로 글을 쓴다고 고백한다. 과연 그런 심정이란 어떤 심정일까? 비록 치열한 글 쓰는 삶은 살지 못했지만, 이응준 작가의 이설집을 통해 그런 삶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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