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바탕으로
델핀 드 비강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내가 좋아하는 한국작가 중 한 명을  꼽으라면 은희경 작가를 이야기한다. 처음 그녀의 소설을 접한 것은 1998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인 [아내의 상자]를 통해서이다. 소외되고 거절 당하던 과거를 가진 아내가 결국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고, 일탈을 선택한다는 내용의 소설이었다. 소설을 다 읽고서도 소설 속의 아내의 선택이 끝내 마음에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마치 소설 속의 주인공이 작가처럼 느껴져 연민을 느꼈었다. 얼마 후 출간한 그녀의 장편소설인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라는 소설을 읽었다. 누구에게도 사랑을 주지 못하는 주인공 진희라는 여성이 마치 [아내의 상자]의 주인공의 결혼 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읽은 은희경 작가의 [새의선물]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또 다른 진희라는 주인공이 어린시절 세상이 거짓을 일찍 깨닫고 냉소적인 생각을 가지는 이야기였다.  결국 이 소설을 읽고 [새의 선물]의 어린 진희,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의 성인인 진희, 그리고 [아내의 상자]의 주인공이 같은 여성이며, 그것이 모두 작가의 이야기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내가 만든 착각이자 환상이었다. 그러나 그 환상에서 깨어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론 소설 속에는 작가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담겨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미 소설이 된 작가의 이야기는 그것이 진짜 작가의 이야기가 아님을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실화를 바탕으로]라는 소설은 이런 소설에 대한 개인적 생각을 더 확신시켜 주는 소설이다. 작가인 델핀 드 비강은 얼마 전 [길위의 소녀]로 만났었다. 소설 속에 뭍어나는 그 진실함이 독자를 감동시키는 작가였다. 작가는 자전적인 소설로 데뷔했고, 계속해서 자신의 삶을 다룬 소설로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책 [실화를 바탕으로]라는 소설은 제목부터 작가가 본격적으로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뉘앙스를 준다. 소설의 주인공의 이름도 작가의 이름과 같은 '델핀'이다.


델핀은 자전적 소설로 순시간에 인기를 얻는다. 그녀는 수많은 싸인회와 인터뷰를 다니며, 갑자기 닥친 유명세에 어리둥절한다. 내성적이고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사람들의 관심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 때마침 그녀의 우체통으로 그녀의 삶과 작품을 비난하는 편지가 온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거짓으로 그려서 유명세를 누리고 있고, 그런 작품으로 인해 그녀의 부모와 주변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로인해 델핀은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를 두려워한다.


이렇게 압박감을 느끼고 있을 때 우연히 L이라는 여성을 만난다. L은 그녀가 가지고 있지 못한 당당함과 우화함, 그리고 여성적인 매력까지 담고 있었다.

"내가 멋진 여자(내가 되고 싶었던 나무랄 데 없는 여자, 두말할 나위가 없는 여자 말이다)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나한테는 늘 뭔가가 ​ 모자라거나 지나치거나 곤두섰거나 늘어져 있었다. 나는 곱슬곱슬한 동시에 뻣뻣한 이상한 머리결을 지녔고, 입술에 바른 립스틱을 한 시간 이상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마스카라 바른 것을 잊고 밤늦게 눈을 비비기 일수였다. 극도로 조심하지 않는 한 자주 부딪혔고, 계단이나 튀어나온 지면에서 발을 헛디뎠고, 심지어 내가 사는 아파트 층수도 헷갈렸다. 그러나 이런 일과 나머지 모든 일들을 달게 받아들였다. 우는 것보다는 웃는 것이 나으니까. 그런데도 그날 아침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L에게 배울 것이많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관찰할 시간이 충분히 있다면 어쩌면 항상 놓쳤던 뭔가를 나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녀와 가깝게 지내다 보면 그녀가 어떻게 그 모든 것에, 그러니까 우아함과 자신감과 여성다움에 동시에 도달하는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P62-63)


항상 당당하고, 불의나 폭력을 보면 참지 못하고 맞서고,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재치있게 대응하는 L을 보면서 델핀은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차츰 그녀와 자신의 소설 이야기를 하게 된다. L은 그녀의 광팬이었으며 모든 작품을 읽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사실을 쓰기를 권고한다. 그녀는 독자가 원하는 것은 결국 사실이라고 말한다. 이미 독자들은 왠만한 픽션은 모두 접하고 있으며, 그것에 식상해 하고 있고, 픽션으로서의 소설은 이미 생명을 다했다고 말한다. 작가 델핀이 써야할 것은 한 가지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미 그녀 안에 있는 것으로, 그것을 끄집어 내기만 하면 된다고 확신을 준다. 델핀은 L의 말에 감동을 받고, 점차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그러나 델핀은 사실을 써야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점점 글을 쓰 수가 없게 된다. 수많은 강연회와 인터뷰, 기고 등을 할 수 없고, 심지어는 세 문장 이상은 글은 전혀 쓸 수가 없게 된다. 대필작가였던 L은 델핀의 집에 살면서 그녀를 대신해 글을 쓰고 모든 것을 대신해준다. 그리고 델핀으로 변장해 강연회까지 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L에게 의지하며 L이 그녀를 대신해 주지만, 한편으로는 L이 주는 압박은 점점 강해진다. L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사실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작가가 사실을 쓸 수 있을까? 델핀은 L에게 이 세상에 진정한 실화소설이나 자전적 소설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네가 느끼는 거, 그건 단순히 그걸 알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안들어? 그게 진짜 이야기 혹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거나 '매우 자전적인'이야기라고 네가 믿게끔 공들였기 때문이란 생각은 안 들어? 간단한 광고 몇 마디로 너한테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우리 모두가 가고 있는, 신문 3면 기사에 관한 호기심 같은 걸 불러일으키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란 생각은 안들어? 하지만 나는 현실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진 않아. 현실, 그것이 존재하다면,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해. 네 말대로 현실은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변화되고, 해석될 필요가 있어, 소설가의 시선과 관점 없이는 아무리 잘 풀려봐야 죽도록 지루하고, 잘 안 풀리는 경우엔 엄청난 불안을 야기하지. 그리고 어떤 재료에서 출발했든 그 작업은 언제나 픽션이라는 형태야." (P 273)


과연 델핀과 L 중 누가 맞는 걸까? 그리고 델핀은 자신의 생각과 L의 생각 중 누구의 생각을 따를까? 그리고 소설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광기를 드러내는 L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우리는 타인에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자신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면서 얼마 전 읽었던 라캉의 글에서 라캉이 언급한 내용을 떠올리게 되었다. 라캉은 우리가 과거에 대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환자가 의사에게 아무리 과거의 사실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환자가 의사에게 말을 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의사를 대상으로 한 포장된 이야기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환자가 자신의 생각으로 과거를 말할 때, 그것은 이미 과거가 아니라 미래라고 말한다. 그렇게 과거가 미래로 향해가는 순간(이 소설의 내용으로 말하자면, 실화가 픽션이 되는 순간), 환자는 과거로부터 나와서 치료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 말한다.


많은 독자들은 작가가 사실을 이야기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런 소설만이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사실을 이야기하더라도 이미 독자를 대상으로 글로 쓰여지는 순간, 그 이야기는 작가의 의식화와 글쓰기를 통해 이미 다른 형태의 이야기로 변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소설이 모두 허구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 과정에 작가의 사실이 담겨져 있고, 그 과정에 작가의 회복이 포함되고, 그 과정에 독자의 치유과정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결국 델핀 드 비강이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하는 것은 소설의 힘일 것이다. 픽션의 힘, 사실이 아니지만 사실을 내포한 소설의 힘,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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