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갈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3
사쿠라기 시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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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자신의 몸을 기댈 수 있는 버팀목과 같은 존재이다. 길에서 넘어졌을 때나, 친구에게 놀림을 당했을 때, 몸이 아프거나 배가 고플 때, 아이는 부모에게 찾아가고 부모에게 기댄다. 그렇게 아이는 사람을 신뢰하며, 서로에게 기대며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 그런데 만약 그런 기댈 수 있는 부모나 그 누구도 없이 자란 아이가 있다면 어떨까? 황량한 벌판과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다면... 누구에게 기대 본 경험도 없고, 기댈 사람도 없다면 그 사람을 얼마나 외롭고 삭막할까?


사쿠라기 시노의 [유리 갈대]라는 소설의 여주인공 '기노 쎄스코'라는 여인이 바로 이런 사람이다. 쎄스코는 이제는 한때의 흥청거림만을 기억하는 낡은 항구도시의 유각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곳에서 술을 팔고 몸을 파는 여성이었다. 쎄스코는 어린 나이부터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학대를 당하고 자랐다. 심지어는 그녀가 어머니 가게에 드나드는 남자에게 강간을 당할 때도, 어머니는 그 일이 끝날 때까지 모르는채 했다. 그리고 일이 끝난 후 남자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일을 했다.


소설의 쎄스코가 어머니의 유각에서 화재로 자살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머니의 애인과 결혼했고, 어느 정도 부유한 삶을 사는 그녀가 왜 어머니의 술집에서 자살을 했을까? 소설은 다시 이주 전으로 돌아가 그녀의 일상을 비춘다.


그 날 쎄스코의 남편 기이치로는 아침부터 드라이브를 간다고 집을 나선다. 한때 어머니의 애인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남편인 기이치로는 변두리 호텔의 사장이다. 그는 쎄스코에게 부족함 없는 결혼생활을 약속하고 결혼했으며, 실제로 그녀가 가집까지 낼 수 있도록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일본 '가집'이 무엇인지는 접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른다. 아마 한국의 시조 정도 비슷한 운율을 가진 시집이나 수필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그 날 오후 기이치로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기이치로는 그 사고로 혼수상태가 되고, 기이치로가 사고난 길은 어머니의 유각과 연결된 도로였다. 결국 기이치로는 그 날 어머니를 만나러 갔던 것일까? 이야기는 기이치로가 혼수상태가 된 이후의 사건들을 통해 쎄스코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녀의 가집 제목인 '유리갈대'처럼 그녀는 아무에게도 기대할 수 없고,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소설 곳곳에는 그런 그녀의 상황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쎄스코는 숨을 토했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거르실리는 말을 해도 엄마는 이제 자신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 생각나는 말을 전부 퍼부으며 욕해도 상처 따위나지 않는다. 자신이 엄마를 원하지 않는다. 태아난 뒤로 단 한 번도 원한 적이 없다." (p73-4)


"사모님이 홀가분해지는 건 상관없어요. 아직 젊고, 여러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는 것도 알아요. 그렇지만요, 홀가분해지는 건 무서운 거예요. 속박이 없는 생활의 무서움, 아세요? 의지할 데도 없고 구속하는 곳도 없는 사람에게는 내일이 필요 없어져요." (p221)


소설은 추리소설의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끝에서는 예상치 못한 반전까지 등장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일본 소설이 그렇듯, 추리소설의 형식에 주인공 쎄스코의 공허한 내면을 잘 끄집어 내고 있다. 특히 쎄스코가 쓴 가집 제목인 '유리갈대'와 함께 소설 중간중간에 갈대의 이미지가 쎄스코의 이미지와 겹치며, 그녀의 공허한 삶의 모습을 표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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