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을 추석 연휴 기간에 읽은 소설이다. 명절이면 내려가는 부모님의 집은 그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해발 500미터 정도의 높이이다. 내가 20살이 넘을 무렵 아버지가 노후를 생각하며 거주하기 시작한 집이다. 그 곳에는 손님들이 오면 머물 수 있게 나무로 지은 작은 목조주택이 있다. 지은 지 10년이 넘어 허름하지만 부모님의 집에 내려 오면 항상 이곳에 머문다. 이번 추석연휴 기간동안 이 목조주택에 머물며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는 책을 읽었다. 창문을 열면 산이 보이고, 주변은 항상 새소리들이 들렸다. 덕분에 이 소설을 읽으며 작가가 창조한 아사마산의 아우쿠리마을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이 책은 주인공 사카니시1980년대 초에 유명한 건축가인 무라이 슌스케의 건축사무소에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무라리 사무소는 여름이면 도쿄사무실에서 무라리의 별장이자 사무실로 쓰고 있는 아사마산이 있는 아우쿠리마을로 사무실을 이전한다. 무라리의 건축철학에 따라 자연 속에서 건축물을 설계하고 구상하기 위해서이다. 무라리는 속도감과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현대건축과는 다르게 자연과 조화되면서도 사람을 배려하는 전통적이면서도 모던한 건축을 추구한다. 사카니시는 입사한 첫여름 무라이 건축사무소의 중요한 직원들과 함께 아우쿠리마을로 향한다. 아우쿠리마을에서는 모든 것이 늦게 흘러간다. 그 숲속에서 사카니시는 무라리의 자연적이고 사람을 중요시하는 건축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무엇보다도 함께 일하고 있는 무라리의 조카인 마리코와 느리면서도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섬세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된다. 물론 마리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키니시보다는 조금 일찍 들어 온 온화한 성격의 유키코와도 아우쿠리 마을의 여름을 배경으로 서로를 알아간다.


 

​이 책의 초반부를 읽었을 때는 느린 속도감과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 조금은 당황했었다. 그러나 초반부분이 지나고 무라이 사무소가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입찰을 시작하고, 주인공과 마리코의 관계가 깊어지면서도부터 이야기는 느리지만 잔잔하게 마음 속으로 들어온다. 특히 저자의 절제되면서도 담백한 표현들이 매우 매끄럽다. 주변 자연을 묘사하는 시선부터, 주인공이 마리코를 바라보는 시각들이 매우 섬세하면서도 아름답다. 마리코의 행동과 말투에 대한 묘사가 마치 무라이의 건축물과 같이 담백하면서도 섬세하다.

 

말이 저물었을 때쯤, 월요일 아침에 돌아올 예정이었던 마리코가 까만 르노5를 타고 돌아왔다. 물색 마 원피스, 종요했던 여름 별장 마루에 밝은 색 공이 굴러운 것 같았다. (P203)

 

그 풀 수 없는 의문과 별개로, 마리코하고는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마리코에게 저항할 수 없이 이끌리고 있었따. 귀에 살그머니 들어와 그대로 머무는 목소리 톤, 가볍고 부드러운 손가락과 손의 감촉, 목과 어깨 움직임을 따라 물결치는 머리카락,자유로운 다리의 움직임, 강인한 성격이 반전되어 모든 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듯한 몸짓. (P275-6) 

개인적으로 좋은 소설은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장면과 이미지가 그려지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을 읽을 때면 아우쿠리 마을, 무라리 건축사무소, 아사마 숲속의 길들, 마리코와 유키코의 모습들이 저절로 그려졌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무라이가 의식을 잃고 입원한 병원에 주인공이 마리코와 유키코를 데리고 가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 부분은 그냥 일기만 해도 하나의 영상이 보여진다. 겨울의 초입, 을씬스러운 아사마산 주변의 도로에서 의식을 잃은 무라리에게 들려주기 위해 마리코가 녹음한 피아노 음악을 듣는 장면이다.

 

“18번 국도를 달리는 차 안에 마리코가 치는 피아노 소나타가 흐르기 시작했다. 터치는 부드럽고 막히는 곳이 없었다. 교양이라고 할 레벨이 전혀 아닌 것에 대한 놀라움은 이내 사라지고 그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와 맞서는 것도 아니고 친한 친구에게 보내는 것도 아닌, 하물며 애인에게 들려주는 것도 아니고 혼자 자기하고 대화하고 있는 것 같은 선울이었다. 슈베르트는 남겨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백미러에는 유키코가 비춰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숙이면 눈물이 떨어질까 봐 고래를 숙이지 않고 앞을 보고 있는 표정이었다.” (P 381-2)

   

 

지금은 비교적 한가한 도시의 외곽에 살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서울 중심의 한복판에 살았다. 집 주변으로는 지하철 공사 중이여서 일년 내내 길을 막고 땅을 파고, 트럭들이 다녔다. 또한 집 맞은편에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빌딩을 짓는다고 한참 공사중이었다. 소음과 먼지, 사람과 차량, 모든 것이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 공사현장들을 지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콘크리트 더미들을 쌓는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건축과 사람, 그 자연과 우리의 인생을 생각하게 되었다. 느리지만 마음 속에 깊이 남는 올해 내가 읽는 최고의 감동의 소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