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재난 영화를 좋아해서 자주 보는 편이다. 그런데 재난 영화에는 비교적 일관된 패턴이 있다. 먼저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재앙이 기다리고 있다. 이를 먼저 눈치챈 주인공이 -주로 과학자나 기자 등이 주인공의 역할로 나온다- 정부 관료나 책임자를 찾아가 사태의 심각성을 알린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재난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에 이들은 그런 경고를 무시한다. 대부분 영화에서는 관료적인 안일함에 빠져있는 책임자들이 이를 무시하고 비웃는다. 그리고 재난이 닥친다. 그때부터 대혼란이 다가온다. 경고를 무시하던 지도층들은 제일 먼저 탈출하고, 지휘계통은 무너지고, 사람들은 우왕좌왕한다. 결국 주인공을 비롯한 일반 시민들이 나서서 재난과 싸운다는 것이 보통 재난 영화의 스토리이다. 오래된 영화이지만 [투모로우]나 우리나라 영화 [해운대]가 이런 재난 영화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아카넷에서 출간한 [징비록]을 읽으면서 왜 이런 재난 영화가 떠오를까? 임진왜란 전에 많은 경고가 있었지만, 선조와 신하들은 이를 모두 무시한다. 당시 조선은 여러 차례 북방의 여진족과 남쪽의 왜의 침략을 받았지만, 모두 지역전이 전투였다. 20만이 넘는 대군이 바다를 건너온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 밖의 일이었다. 그러기에 조선은 전쟁에 대비를 하지도 않고, 만약 전쟁이 일어나도 거뜬히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다. [징비록]의 번역자인 김시덕 교수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물론 미래에서 과거를 보자면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자신감이 화를 초래했지만, 16세기 말 일본이 20여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공격한다거나, 17세기 전기에 누루하지가 여진을 통일해서 몽골, 조선, 명, 티베트, 위구르를 정복한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민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면에서 류성룡은 임진왜란의 최대 패인을, 조선이 일본의 정세 변화를 세밀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기존의 대 왜구 전략을 고수하거나 북방에서의 성공을 과신한 데에서 찾는 것이다." - [징비록] P145


 

이렇게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상태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이라는 국가 시스템은 일순간에 마비가 되고, 군사들과 백성들은 모두 혼란에 처한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이라는 국가 시스템이 무너지는 과정은 사건별로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질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부산과 동래를 비롯한 경상도 지역이 점령당하는 단계이다. 최근에 읽은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이병주 작가의 [천명]이란 소설에서는 당시 적이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을 때, 조정에 올리는 보고들을 언급하고 있다. 경상 우수사 원균은 적선 90척이 나타났다고 보고했다가, 후에 150척이 나타났다고 보고한다. 그 후 경상감사 김수는 왜선 4백 척이 나타났다고 보고한다. 배 한 척마다 몇 십 명이 타고 있으니 병력은 만 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보고한다. 모든 재난상황에서 초기 파악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최근의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에서도 알 수 있다. 임진 왜란 초기의 상황인식이 이처럼 안일했다. 그리고 그 결과 파죽지세도 부산포, 동래성, 양산 등이 점령 당한다. 이 과정에서 전쟁 다운 전쟁 한 번 못해보고, 약삭빠른 지휘관들을 재빨리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두 번째 단계는 상주에서 이일 장군이 패하는 과정이다. 징비록에서는 당시 조선의 방어 체계가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임을 이야기한다. 제승방략은 전쟁이 나면 일대의 군대가 한 한 곳으로 모여서 대기하고, 중앙에서 지휘관을 파견하는 제도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각 지역별로 방어를 하는 진관제도가 중앙권력을 분산시키고, 토호세력을 양산할 수 있기에 이런 제도를 만든 것 같다. 그런데 일단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런 시스템은 순식간에 허점을 드러낸다. 조정에서는 전쟁의 소식을 듣고, 이일에게 군사를 데리고 가서 막게 한다. 이일은 한양에서 정예병 3백 명을 데리고 지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대와 합류하려 한다. 그러나 한양에서 3백 명은 모이지 않고, 과거용 시험지를 들고 있던 유생 몇 명과 대신 끌려 나온 양반집 하인들 몇 명만 모여 있을 뿐이었다. 결국 너무나 소중한 사흘이란 시간을 기다리던 이일은 군대도 모으지 못하고 혼자 몸으로 내려간다. 대구에서 중앙 지휘관을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은 시일이 지나도 지휘관은 오지 않고, 적은 가까이 오자 대부분 달아나고, 이일이 상주에 모였을 때 모인 군사는 수백 명뿐이었다. 그나마 도망가던 백성들을 잡아서 모아온 것이 전부였다. 더군다나 적이 온다는 것을 알리는 백성을 헛소문을 낸다며 처형시킨다. 그리고 불시에 적이 몰려오자 이일은 살겠다고 혼자 알몸으로 도망을 간다.

세 번째 단계는 신립이 충주에서 패하는 과정이다. 조정에서는 이일로서는 부족한 줄 알고 신립이 뒤에 보낸다. 그리고 신립은 충주에 도착해서 군사를 모은다. 징비록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역사가들은 신립이 주변의 권고도 무시하고, 천혜의 요새인 문경새재를 버리고 탄금대 앞에서 배수진을 치고 전쟁에 임한 것을 패인의 원인으로 본다. 당시 신립은 여진족과 싸워 명성을 떨친 이름난 명장이었지만, 유성룡은 신립이 매우 교만하고 자만심이 넘치는 인물로 묘사한다. 그 결과 그는 독단적인 결정을 하게 되고, 그 결과 많은 군사들이 떼죽음을 당하게 된다.

마지막 과정은 임금이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는 과정이다. 신립이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자 임금과 신하들은 달아날 준비를 하고, 한양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경북궁이 불타고, 한양을 구하러 올라오던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의 삼도의 병사 5만 명은 싸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패하여 뿔뿔이 흩어진다. 이런 와중에서도 신각이란 장수가 첫승을 거두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참수를 시켜 버린다. 마지막으로 임진강에서 방어를 하기 위해 한응인과 김명원을 보내지만 지휘권의 혼란으로 패하고 만다. 총체적인 혼란과 국가 시스템이 무너지는 상황이다.

이 과정을 보니 얼마 전 발생한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태를 보는 것 같다. 자신만만하다가 위기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고, 대응 시스템이 무너져 우왕좌왕하는 꼴을 보는 것 같다. 이것이 단순한 침몰사고나 전염병 사태가 아닌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이나 국가적인 재난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결국 국가가 전쟁이나 재난으로부터 국민을 지키려면 지도자의 명철한 판단력과 함께 이에 대비한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들이 있어도 지도자가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시스템이 엉망이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역사의 비극이 반복되지를 않기를 바라며 징비록을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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