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전 텍스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춘향전]이라는 고전 판소리 소설일 것이다. 이 [춘향전]은 판소리를 통해 널리 알려지다가 현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번 영화화 되었다. 20세기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춘향전 영화에서는 춘향의 정절이 주제였다. 고전적인 이런 춘향전의 해석을 크게 바꾼 영화가 2000년에 제작된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란 영화다. 이 영화는 이몽룡과 춘향의 만남에 성적인 부분을 특히 강조했다. 그래서 춘향을 너무 성적인 인물로 묘사했다는 거센 비난과 현대적 해석이란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 보다 더 파격적인 영화가 최근에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이란 영화이다. 이 영화는 춘향전을 방자의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춘향 역시 정절의 여인이 아니라, 출세와 허영에 물든 여인으로 나오고, 몽룡 역시 성공을 위해 춘향을 이용하는 인물로 나온다.

 

 

서양에서 춘향전과 비슷한 텍스트는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일 것이다. 대표적인 영화가 올리비아 핫세가 줄리엣 역으로 나온 1968년작이다. 그런데 [로미오와 줄리엣]의 스토리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배경을 현대적으로 바꾼 영화가 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인 바주 루어만 감독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이 감독은 당시로서는 CF 영상이나 뮤직비디오를 감각적으로 만들기로 유명해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을 낭만적인 분위기에서 현대적이고 세련된 배경으로 바꾸었다. 역시 찬반이 많았던 영화이다.



 

 

한국의 고전 텍스트인 [춘향전]과 서양의 고전 텍스트인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처럼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많은 해석 중에서 어떤 해석이 정답일까?

하이데거 이후의 새로운 해석학의 경향이 존재해석학은 정답을 찾지 않는다. 기존의 해석학은 여러 해석 중에 가장 정확한 해석, 정답인 해석을 찾았다. 그러나 존재해석학은 텍스트 그 자체보다, 그 텍스트를 해석하는 과정을 중요시 여긴다.

해석학은 해석하는 순간의 의미 생성과 관련된다. 의미 생성은 이미 주어져 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순간마다 이해에 따른 것이다. 어느 바다 한가운데 숨겨진 보물섬은 지도를 통해 찾아갈 수 있지만 해석학의 철학은 어떤 경우에도 그러한 보물찾기와 같은 과정이 아니다. 감추어진 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보물섬을 찾아 떠나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체험이 더 값지듯이, 해석학은 텍스트 안에 숨겨진 어떤 비밀스러운 지식을 찾는 존재론적 경험에 따른 생성의 철학이다. 그래서 비로소 깨닫게 된다. 보물은 숨겨진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찾는 과정에서의 의미체험이었다는 사실을. - [해석학] P209

 

존재해석학은 존재와 존재가 속한 세계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존재를 해석하는 주체를 인간인 '현존재'로 본다. 현존재가 존재와 세계를 해석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이다. 그런데 이 현재는 단순한 지금의 현재가 아니라 그동안의 과거,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와 연결된 현재이다. 결국 하나의 텍스트는 단순히 과거의 텍스트일뿐만 아니라, 그 텍스트를 해석한 모든 과거의 여정과 앞으로 새롭게 해석될 미래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해석학적 지평'이라고 말한다.

다시 춘향전과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돌아가보자! 이제 춘향전이나 로미오와 줄리엣을 해석할 때 중점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춘향전과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고전 텍스트일까? 아니면 이 텍스트를 해석해 왔던 모든 과정과 현재의 해석, 그리고 미래의 해석까지일까? 존재해석학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한 것을 해석으로 본다.


이런 존재해석학이 이제 '해체주의'와 만난다. 해체주의란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와 들뢰즈를 통해 시작된 문화비평적 성향이 강한 철학이다. 기존의 철학은 의미를 언어 속에 가두는 경향이 강했다. 다시 춘향전의 예를 들어보면 춘향전하면 떠 오르는 것은 춘향의 정절이다. 그러나 춘향전 속에는 다양하고 많은 의미들을 담고 있다. 춘향의 신분상승 욕구, 방자의 주인에 대한 도전 의식, 향단의 질투... 이 모든 의미들이 춘향전이란 이름이나 정절이란 의미 속에 감추어져, 다른 의미들은 모두 무의미가 되게 된다. 그래서 데리다는 소쉬르의 언어철학을 인용해 언어는 사물의 가장 특징적인 한 가지를 지칭하는 것이고, 이렇게 사물을 언어로 부르게 되면 다른 특징들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예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예를 들어 어떤 그림을 보고 추상적이다라고 말하면, 그 추상적이란 말로 인해 그림의 다른 다양한 의미가 모두 사라지게 된다. 해체주의란 사물의 언어와 의미 속에 숨겨져 있는 다양한 의미를 드러내고, 더 나아가 사물밖의 존재들과 연관성에서까지 그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허물고, 언어의 틀을 해체하는 것이다.

이런 해체주의가 해석학과 만남으로서 기존의 '이성'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던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획일화된 해석이 아닌, 다양하고 풍성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해체주의는 전통 형이상학의 이원론적 구조를 거부한다. 인간과 사물을 본질과 실존 도식으로 설명하는 체계 역시 거부한다. 이원론적 구조는 결국 일원성의 철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인간을 본질과 실존으로 설명하는 체계 역시 인간의 현존재적 실존을 본질에 귀속된, 잠정적이며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설정한다. 해석학의 철학은 해체론의 작업을 통해 새로운 사유로 도약할 것이며, 해체주의의 내용 없음 역시 해석학을 통해 의미론과 진리 이해의 체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해석학] P245



결국 이제 해석은 단순한 텍스트의 해석이 아닌, 그 텍스트라는 언어나 의미 속에 감추어진 풍부한 해석이 드러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칮 너무 다양한 해석으로 인해 길을 잃고 허무주의로 빠져갈 수 있다. 이것을 잡아 주는 것이 다시금 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과연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속한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그리고 나와 세계를 근거로 해석하는 텍스트는 어떤 다양한 의미를 품고 있는가? 존재해석학에 대한 많은 글을 읽을 수록 '나', '세계', 그리고 '텍스트'라는 세 단어로 좁혀짐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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