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 램의 선택
제인 로저스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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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는 모든 선택이 과감했다.

그러기에 실수도 많았고, 후회도 많았다.

나이가 들어가고, 세상을 알아갈 수록 선택이 망설여진다.

한 순간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알기에, 그 선택의 결과를 오로지 내가 다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고민하고, 또 고민을 한다.

그러다보니 점점 선택의 순간들을 놓치고, 과거의 결심들은 흐려진다.

어떤 때는 내 삶이 흐르는 물결에 그냥 휩쓸려 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욱 더 어렸을 때의 그 무모하고도 과감한 선택이 그리워진다.


[제시렘의 선택]이란 책은 영국의 권위있는 SF문학상인 아서클라크상을 수상했다.

그러기에 당연히 이 소설은 SF소설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가까운 미래의 세계에 테러로 인해 MDS(모체사망증후군)이란 바이러스가 퍼지고, 그로 인해 임신한 여자들은 모두 죽게 되고 신생아는 사라진다.

이로 인해 사회는 극도의 혼란과 공포 속에 빠진다는 배경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다른 SF소설과는 더 세상과 사람에 대해서 고민하게 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MDS가 발병해 임신한 여성들이 죽고, 신생아들이 사라진다는 배경만 빼면, 대부분의 것들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과 같다.

특히 16세의 어린소녀 '제시램'의 세계는 여타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세계과 같다.

학업성적 때문에 고민하고, 부모님의 갈등으로 고민하고, 좋아하는 남자와 다른 여자의 만남으로 인해 질투하고, 나름대로 친구들과 모임을 만들어 세상을 구하겠다는 환상에 빠져보기 하고....

그럼에도 이 소설은 여타의 장르소설과 같지 않게 우리에게 묵직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선택은 정말 내 자의에 의한 진정한 선택인가?'



소설은 어린 '제시렘'이 누군가에 의해 방안에 갇혀있는 상태에서 시작된다.

읽는 사람들은 왜 제시렘이 갇혀 있는지, 그를 가두워두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녀의 독백적인 회상 속으로 들어간다.

MDS가 발병하고 세상이 혼란에 빠지지만 제시는 여전히 옆집 친구인 '샐'이나 서로 좋아하지만 아직 감정표현을 못한 '버즈'라는 남자 친구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사회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곳곳에 테러나 폭동들이 일어나고, 주변의 임신한 여성들은 계속 죽어간다.

제시와 친구들은 처음에는 장난스럽게 모임을 만들어 세상을 바꾸어보려는 계획을 가진다.

이언이라는 아이의 주도로 '요피'라는 모임을 만들고, 에너지 안 쓰기 운동이나 공항폐쇄등의 운동을 한다.

제시 역시 이 모임에 빠져 부모님에게 에너지를 쓰지 말라거나, 비행기 여행을 하지 말라고 강요를 한다.

그러나 이 모임에 참석한 아이들은 이 모임의 허구를 깨닫고 점점 다른 길로 흩어진다.

이언은 정치적인 야망으로 요피의 모임과 참석자들을 이용했었고,  리사는 아이들끼리만 살 수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려 하고, 버즈와 몇 명의 친구들은 동물실험을 반대하고 테러하는 극단적인 모임에 가입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MDS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의 아버지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잠자는 미녀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만든다.

MDS가 발병하기 전의 저장한 배아를 16세 이하의 소녀를 대리모로 만들어 아이를 출생시키는 것이다.

배아를 잉태한 소녀는 임신기간 마취상태에 빠지게 해서 MDS의 발병을 늦추고, 아이를 출생한 후에는 죽게 된다.

제시는 이 프로그램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이 프로그램에 자원한다.


제시의 선택은 처음에는 어린 아이의 즉흥적이고 반항적인 성격이 강했다.

사회는 혼란스러워지고, 좋아하는 남자친구들와는 다투고, 부모님은 이혼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제시는 자신이 무언가를 바꾸고 싶어 했다.

자신의 선택으로 집 나간 아빠를 돌아오게 하고, 이 프로그램만이 인류의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아빠에게 칭찬을 받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칭찬을 기대했던 아빠는 오히려 강하게 반대하고, 주변 친구들도 반대를 한다.

여러 가지 반대에 부딪히면서 오히려 제시의 선택은 더 구체적이 되고, 확고해 진다.

이 책은 제시의 순간의 선택들이 그녀 안에서 확신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마치 그녀의 몸 속에서 또다른 생명체가 태어나는 것처럼....


얼마나 잤을까. 갑자기 눈이 번쩌 뜨였다. 주위는 온통 암흑이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기억해내려 애쓰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벽난로 불길 쪽으로 돌아보았지만 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일어나서 거친 카펫에 발을 내려놓았다. 암흑이 마치 망토처럼 목을 조여왔다. 검은색 형제조차 없었다. 오직 칠흙같은 어둠뿐이었다. - 중략- 온 세상이 숯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산 채로 땅에 묻히는 상상을 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어둠뿐이겠지. 어둠이 얼굴을 짓누르겠지. 밖으로 나갈 길은 어디에도 없겠지. 사람들이 마취를 했는데도 잠이 들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따면.... (P257)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손님방에서 방사능처럼 나쁜 기운을 발산하고 있는 아빠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양파와 마늘을 썰면 썰수록, 점점 더 이 모든 상황이 단순한 오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아빠가 이해를 못 해서 그래.이게 아주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 만약 이 결단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것만 이해시킬 수 있다면, 나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그 일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내게 힘을 준다는 것을 이해시킬 수 있다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마음이 평온하고 내 삶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을 이해시킬 수 있다면, 그것만 이해시킬 수 있다면, 나한테 화내지 않을텐데, 분명 두 분은 내가 행복하기를 바랄 것이다. 어떻게 설명해야 엄마 아빠의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까. 나는 공항의 무빙워크에 올라탔다. 이미 준비는 끝났다. 수선을 떨고, 짐을 부치고, 갈팡질팡하고, 가슴 아파하는 시간을 모두 뒤로하고 이제 탑승구로 향하고 있다. 그곳에서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날아갈 것이다. 이것은 전혀 슬퍼할 일이 아니다. (P284-285)


주인공의 확신이 점점 강해질수록 이 책을 읽는 나는 오히려 그 확신이 점점 의심스러웠다.

정말 제시는 선택이 본인의 확고한 의지였을까?

어쩌면 주위에서 만든 환상에 속은 것은 아닐까?

단순히 그 나이의 부모에 대한 반발심리나 영웅심리는 아닐까?


그럼에도 제시는 이 선택이 단순한 선택을 넘어서 소명처럼 커져간다.

이 책에 처음부분에서 제시는 자신이 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날 수 있도록 태어났지만 그것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확고해질수록 그녀는 자신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날아간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자신이 태어난 이유이고, 자신이 생명을 버리고 값진 것을 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주제를 한 소녀의 관점에서 매우 진솔하게 풀어가고 있는 소설이다.

또한 저자는 이 소녀의 선택에 여러 가지 반대 상황을 제시할 뿐, 어떤 것이 맞거나 그라다고 말하지 않는다.

묵묵히 현실이 아닌, 현실같은 상황을 소설을 써 내려갈 뿐이다.

과연 제시램의 선택을 옳은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아마 우리가 살면서 매일같이 고민해야 할 문제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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