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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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읽은 단편소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은 한 문예지에 김훈 작가가 쓴 단편소설이다.

노량진 입시촌을 배경으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을 담담한 필치를 그리고 있는 소설이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벼랑끝에 몰린 젊은이들의 삶과 내면을 너무나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기에 읽는내내 더 마음이 아프게 공감이 갔다.

그리고 소설을 다 읽은 후에는 너무나 먹먹해서 한 참을 그 소설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작가는 나름 꽤나 성공하고 유명세를 누리고 있을텐데 어떻게 이렇게 젊은이의 아픔에 대해서 자신이 느끼는 것처럼 이렇게 세세하게 묘사할 수 있었을까?'

오랫동안 이런 질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연말이 되어서 작가가 새로 출간한 산문집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서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것 같다.

저자 역시 처절한 시절을 살았고, 비록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을 누리고 있지만 여전히 그 처절함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저자가 자신과 타인의 삶, 그리고 주변의 것들에 대해 소설처럼 담담한 필치로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저자는 돈과 그 돈으로 오는 처절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돈을 증오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돈을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모두 돈을 벌어야 한다.

저자는 그 돈벌이에서 오는 아픔을 애잔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 돈벌이를 인간의 숙명으로 여긴다.

마치 성경에서 에덴 동산에 쫓겨난 아담에게 하나님이 내린 숙명처럼......

 

죽변항의 낡은 어선을 바라보면서 나는 수 천년 전 이 항구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신석기 사내들과 그들의 고기잡이 도구를 생각했다. 그들의 돌도끼와 돌칼도 내 마음에 떠올랐다. 박물관에서 본 신석기의 돌도끼는 그 손잡이 부분이 인간의 손바닥에 닳아서 반질반질했다. 그 돌도끼를 쥐고 사냥을 해서 처자식을 벌어먹이던 사내들의 고난과 희망, 사냥에 실패해서 빈손으로 돌아오는 저녁의 슬픔, 비 오는 날 그 신석기 사내들의 몸의 비린내도 내 마음에 떠올랐다. 그 사내들은 바로 내 눈 앞에 있었다. (P54)

 

사내의 한 생애가 무엇인고 하니,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 알겠느냐? 이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는 돈보다 더 거룩하고 본질적인 국면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얘야, 돈이 없다면 돈보다 큰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P178)

 

 

저자는 단지 돈벌이만을 애잔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람과의 관계 역시 애잔하게 바라본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바라보고, 아버지로서 아들과 딸을 바라본다.

특히 [광야를 달리는 말]이란 글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작가의 애잔한 글을 보고, 나 역시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서 가슴이 먹먹했다.

어찌보면 시대의 흐름에 밀려서 야인처럼 살다간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절절이 배어 있는 글이었다.

 

내 아버지는 공회전과 원점회귀를 거듭하는 한국 현대사의 황무지에 맨몸을 갈았다. 건너가지 못하고, 그 돌밭에 몸을 갈면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업은 신문기자이거나 소설가였는데, 밥을 온전히 먹을 수 있는 노동은 아니었다.(P37)

 

내가 중고교를 다닐 무렵에, 아버지는 두어 달에 한 번씩 집에 들어왔다가 다음날 또 어디론지 나갔다.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가 어디로 다니시는지를 묻지 않았고, 엄마는 아예 아버지를 상대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버지를 미워했찌만 나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새벽에 아버지가 돌아오면, 나는 아버지가 누운 건넛방 아이에 장작을 때서 방을 덥혀드렸고 아버지 방에 들어가 요 밑에 손을 넣어서 바닥이 따스해졌는지 확인했다. 아침에 냄비를 들고 돈암동 시장에 가서 선지해장국을 사와서 아버지께 드렸다. 아버지는 내가 사온 해장국에 목이 메는지 잘 드시지 못했고, 엄마는 내가 하는 짓을 보면서 "사내놈들은 다 똑같다. 다 한통속이다. 저 놈도 자라면 제 아버지처럼 될 놈이다."라면서 울었다. 엄마하고 아버지하고 싸우면, 나는 아버지를 그냥 내버려두라고 엄마한테 대들었는데, 엄마는 더 크게 울었다. 가난은 그 끝과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가난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처럼 누구를 나무랄 수도 없었고,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P39)

 

자신의 딸을 바라보는 시각은 더 애잔하다.

 

딸아이는 어렸을 때 침을 많이 흘렸고, 늘 젖을 토했다. 두 돌이 지나도록 턱밑에 수건을 매달았다. 안아주면 늘 삭은 젖냄새가 났다. 나는 그 젖냄새에 늘 눈물겨워했다. 이것이 내 혈육이고 내가 길러야 할 내 어린 자식의 냄새로구나, 내가 배반할 수 없는 인류의 냄새로구나......(P139)

 

술취하고 피곤한 저녁에, 잠든 아이의 머리에 코를 대고 아이의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때때로 슬펐다. 내 슬픔은 결국 여자의 태에서 태어나서 다시 여자의 태 속에 자식을 만드는 포유류의 슬픔이었다. 여자의 태는 반복과 순환을 거듭하며 생명을 빚어내는 슬픔의 요람이었다. 그 어린아이가 자라서 또 여자가 되었다. 결혼해도 좋을 만큼 자란 여자 성인이 된 것이다.(P140)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부대끼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그런 인생을 살다가 자신의 노력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재능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운 때문인지 어떤 사람은 그 아파하고 힘들어 하고 부대끼는 삶에서 벗어나 남보다 조금 더 위에 서게 된다.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인지 그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부대끼던 삶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고 그 위에 군림한다.

같이 아파할 수는 없는 걸까?

같이 부대끼고 같이 힘들어하지는 않아도 같이 아파할 수는 없는 걸까?

마음만이라도 같이 아파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걸까?

이 글을 읽으면서 저자의 뛰어난 다른 작품들을 제쳐놓고도 아픈 사람들과 같이 아파하는 이 글만으로도 충분히 뛰어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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