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가끔은 오래 전 친구들을 만날 때가 있다.

항상 어디로 튈지 몰라서 주변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엉뚱한 농담으로 상대를 혹케 하던 이들이 지금은 너무나 뻔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

모두들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사에 매여있고, 눈에는 생기가 없어지고, 배는 나오기 시작한다.

꿈이이나 미래와 같은 이야기는 없어지고 오직 하루 하루 사는 이야기가 전부이다.

누가 사람을 이렇게 변하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사람을 이렇게 변하게 하는 것일까?

가끔은 조직사회라는 것이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여기 현대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실패자라고 부를만한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찰스 부코스키가 쓴 [우체국]이란 소설에 나오는 ''치나스키'라는 인물이다.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치나스키'는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한량'이자 사회 부적응자이다.

직장을 다니기는 하지만 대부분 지각과 결석이다.

상관에게 항상 대들고, 조직의 규율에 반항한다.

항상 여자를 만나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거나 경마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아침이면 술에 덜 깬 모습으로 출근을 한다.

그나마 그런 직장 역시 오래 다니지를 못한다.

 

이 책은 작가인 찰스 부코스키가 우체국에서 일한 경험을 토대로 '치나스키'라는 인물이 2년간 우체국에서 배달원으로 일하고, 다시 11년간 우체국 사무직으로 일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말이 좋아 우체국 사무직이지 하루를 소포나 편지를 분류하는 작업을 하는 일이다.

그리고 당시 미국의 근무조건은 매우 억압적이고 열악했다.

그 조직 속에서 인간은 마치 기계처럼 정해진 일들을 한다.

이 책은 그런 조직사회가 어떻게 사람들을 무너뜨리는지를 잘 묘사한다.

 

현장 주임은 양철 분류함 앞에서 서서 나를 가리켰다. 사무원들은 아주 빨리 우편물을 꽂고 있었다. 그들이 미친 듯이 오른팔을 휘두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통통한 여자애도 우편물을 제자리에 쑤셔 놓고 있었다.

"이 분류함 끝에 쓰여 있는 숫자들이 보이나?"

"네"

"1분당 꽂아야 하는 개수를 가리키는 거야. 60센티미터 트레이라면 23분 안에 마쳐야 해. 자넨 5분이 늦었어."

현장 주임은 분류함에 써 있는 숫자 23을 가리켰다. "23분이 표준이라고."

"저 23은 아무 의미도 없어요." 내가 말햇다.

"무슨 뜻이야?"

"제말은 어떤 남자가 페인트 통을 들고 와서 저기다 23이라는 숫자를 써놓았을 뿐이라는 거죠."

"아니야, 아지지. 이 시간은 몇 년 동안 검증된 거고 재확인 된 거야."(P221)

 

지나간 11년이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이 일이 사람을 갉아 먹는 것을 봐왔다. 사람들은 흐늘흐늘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도지 우체국에 지미 포츠라는 직원이 있었다. 내가 처음 왔을 때 지미는 흰 티셔츠를 입은 건장한 사내였다. 이제 그 때 그 사람은 사라졌다. 그는 바닥에 가능한 한 가까이 붙어 앉아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로 버티고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이발도 못했고 3년 동안 똑같은 바지를 입었다. 일주일에 두 번 셔츠를 갈아 입었고, 아주 천천이 걸었다. 우체국이 그를 살해한 것이다. 그는 쉰다섯 살이었다. 퇴직까지는 7년이 남아 있었다. (P220)

 

이런 상황 속에서도 치나스키는 끊임없이 상사에게 대들고,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경마장에 간다.

그 사이 그는 베티, 조이스, 페티라는 세 명의 여성과 결혼하거나 동거하고 페티에게서는 마리나 루이즈라는 딸까지 낳는다.

저자는 여자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 딸이 태어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너무나 담담한 필치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치나스키는 우체국 사무직을 11년째 되던 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

자신이 더 이상 있을 곳이 아님을 깨닫고......

 

 

이 책을 읽으면서 그냥 먹고 노는 것이 꿈이 치나스키의 삶이 한심하게 느껴지다가도, 우체국이라는 규격화된 조직사회가 숨이 막히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치나스키가 그 곳을 나올 때 나조차 자유를 경험하는 것 같았다.

 

과연 치나스키와 같은 인물은 우리는 부적응자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저자의 표현대로 조직사회에서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사람이 진정 착실한 인간일까?

사회는 그런 사람을 성실하고 바른 인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일평생을 사는 것이 성실하고 바른 삶일까?

아직 인생을 조금밖에 살지 못해 어떤 삶이 정답인지 알지는 못하겠다.

다만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조직사회에서 흐물흐물 녹아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때로는 치나스키처럼 그런 조직사회를 마음껏 비웃으며 자신의 멋대로 사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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