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하가시노 게이고의 [공허한 십자가]가 나왔을 때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에 관심을 가졌었다.

나 역시 이 작품이 나오자마자 인터넷에서 이 작품의 서평을 찾아 볼 정도로 관심을 가졌었다.

그런데 서평에서 이 작품이 일본의 사형제도에 대한 찬반을 다루고 있다는 내용들이 많았다.

법률적인 논쟁이나 사회적 논쟁에 한 발 자국 떨어지고 싶어하는 내 자신의 성향상 이 책을 읽기가 꺼려졌다.

그런 이유로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 작품을 읽었다.

너무나 심각하거나 딱딱한 소설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소설은 법률적인 논쟁에 치우친 작품이라기 보다는 작가 특유의 추리소설 필치로 분위기를 압도하는 소설이다.

물론 사형제도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추리소설이란 큰 틀 안에 있는 소제일뿐 이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은 아니다.

전체적인 스토리 역시 하가시노 게이고의 어떤 작품보다도 치밀하고 완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은 처음엔 사오리라는 한 여자 아이의 이야기를 등장시킨다.

그녀는 어머니 없이 아버지와 단 둘이 살면서 외롭고 쓸쓸한 학교 생활을 해 나간다.

그런 그녀에게 그녀가 짝사랑해 왔던 상급생 후미야가 접근해 온다.

후미야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읽을 때 무언가 불길함을 느끼며 후미야의 접근에 어떤 의도가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원래 짝사랑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그러나 작가는 그 후의 이야기를 단절시킨다.

둘의 사랑이 어찌 되었다거나 후미야가 나쁜 놈이었다거나 그런 내용도 없다.

그러나 후에 이 둘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사건을 푸는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이야기는 갑자기 세월이 지나 반려동물의 장례를 치루는 회사를 운영하는 나카하라라는 남자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는 11년 전 이혼 한 아내가 살해 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나카하라와 그녀의 아내 사요코는 11년 전 딸 아이가 강도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 되었다.

둘은 범인이 사형판결을 받게 하게 위해 전심으로 노력을 했다.

그 결과 범인은 사형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둘의 사이는 회복되지 못하고 결국 이혼을 하게 되었다.

11년이 지난 지금 갑자기 아내의 살해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리고 한 노인이 자신이 살해범이라며 자수를 한다.

단지 돈이 필요해서 우연히 범행 대상을 물색하다가 사요코를 발견하고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건은 수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나카하라가 아내의 사건을 파해지면서 다시금 소설 앞에 등장햇던 사오리와 후미야가 등장한다.

나카하라는 아내의 장례식장에 찾아 온 사오리라는 여성을 만나게 된다.

또한 아내를 죽인 노인의 사위가 이제는 유명한 소아과 의사가 된 후미야라는 남성이었다.

결국 나카하라는 사오리와 후미야가 연관이 있는 인물이고 이들의 과거가 아내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활을 했음을 짐작하게 된다.  


나카하라는 전 아내 사요코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그녀가 잡지에 글을 기고하며 사형제도폐지운동을 반대하는 것에 노력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녀는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 당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글을 출판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가령 사형 판결이 나온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유족의 승리는 아니다. 유족은 그것을 통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다만 필요한 순서, 당연한 절차가 끝났을 뿐이다. 사형 집행이 이루어져도 마찬가지 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겼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일도 없다. 그렇다면 사형이 아니라도 상관없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만약 범인이 살아 있으며 '왜 범인이 살아 있는가? 왜 범인에게 살아 있을 권리를 주는가?'라는 의문이 유족의 마음을 끊입없이 갉아 벅는다. 사형을 폐지하고 종신형을 도입하라는 의견도 있지만, 유족의 감정을 떨끈만큼도 이해하지 못한 말이다. 종신형에서 범인은 살아 있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매일 밥을 먹고, 누군가와 이야기 하고, 어쩌면 취미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상상하는 것은 유족에게 죽을 만큼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몇 번씩 끝질기게 말하지만, 사형 판결을 받는다고 유족의 마음이 풀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유족에게 범인이 죽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P189-90)

나카하라 역시 아내의 글에 동감하여 이 책을 출판하려 한다.

그러나 아내의 죽음을 파해지면서 그 신념이 흔들리는 사건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 만든 사형이나 형벌로는 사람을 진정으로 갱생시킬 수도 없고, 속죄시킬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사형은 속죄가 아닌 '공허한 십자가'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의 신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요코는 딸의 죽음으로 사람을 죽인자는 반드시 사형당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고, 그 신념을 향해 달려갔다.

나카하라 역시 그 신념을 쫓아가며 사건을 파해치지만 결국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요즘들어 드는 생각은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들이 점점 단단해져서 나중에는 그것이 돌처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돌처럼 된 생각과 신념은 왠만한 것으로 무너뜨릴 수 없고, 그것을 무너뜨리려는 시도에 대해 강한 반격을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생각과 신념들은 대부분 과거의 상처들로 인해 생긴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면서 한 번쯤은 과연 내 생각과 신념들이 맞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것이 또 다른 상처들을 만들지 않는 방법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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